제 5 장 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제네바는 1387년 이래로 도시의 군주로서 주교,도시의 소유자로서 사보이 가문의 백작,그리고 자유 시민들로 이루어진 3원체제에
의해서 통치 되어 오다가 1444년 이후로는 사보이 가문에서 주교까지 세습적으로 계승함으로서 자연히 자유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네바의 시민들은 스위스의 자치주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라이부르크와 제휴하였지만 베른은 이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적잖은 대결상태를 유지 했었다.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제네바 시는 소의회와 대의회제도로 바뀌었으며, 모든 중세사는 대의회에서 결정 하였다. 베른은 제네바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눈치 였으나,공개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현수막 사건이 발생 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를 회개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진실하게 믿으면 모든 죄에 대한 완전 면죄부를 수여 받을수 있다”라고 쓰여 졌다.
이로 인해서 1532년 가을에 제네바에 도착해서 조용하게 가정집에서 설교하던 파렐,사우니어,올리베탄은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파렐은
제네바를 포기 할수가 없어서 프로망을 불어선생의 자격으로 제네바에 잠입 시켜서 불어교습과 더불어서 개혁적 복음주의를 설교케 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숫적으로 불어난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 사이에 시민전쟁을 방불케하는 격렬한 몸싸움도 있었다
.
여기에서 윌리라는 이름의
가톨릭 사제가 희생 되었다.
카톨릭측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베른은 복음주의자 편에 서서 옹호하고 나섰다. 프로망의
활동으로 가톨릭 수도자와 공개 토론회가 실시 되었으며 파렐은 공개 토론회 참가자로서 1532년 12월20일 에 다시금 제네바에 발을 딛을수
있었다.
그래서1533년 2월에는 최초의 복음주의식 세례를 베풀었으며,3월1일 부터는 공개적으로 복음주의식 예배를 드렸으며,수도원의 교회를 빌려서 사오천명씩 한꺼번에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제네바 시는 기사도 정신에 뛰어난 프랑스인 파렐을 맞이해서 개혁을 이끌어 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길이 닦인 도로 위에 복음주의 마차를 이끌어갈 마부가 필요 하였다. 바로 이러한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준 사람이 바로 존 칼빈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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