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박 신목사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1)

Joyfule 2018. 7. 20. 23:53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11:21-24)


마르다는 부활을 믿었는가?

예수님은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고도 요단 강 저편에 이틀을 더 유(留)하시다가 베다니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어서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이 육신 곁에 사흘을 머물다 나흘째에 완전히 떠난다고 여겼기에 모든 이들이 볼 때에 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믿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늦게나마 찾아주신 주님을 만나 나눈 대화에 따르면 그녀만은 예외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무엇이든 이뤄주신다는 것을 믿기에 나사로를 살려 달라고 그녀가 주님께 요청한 것 같습니다. 이어서 부활 신앙도 고백했으니 주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믿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는 조금 잘못된 이해입니다. 무엇보다 성경 자체가 그 사실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이 무덤의 돌을 옮기라고 명하자 마르다는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라고 그런 믿음과 상반되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주님이 함께 하셨더라면 죽지 않았으리라 말한 후에 ‘그러나’(22절)라고 말을 이음으로써 마치 그녀가 처음에는 소생의 확신이 없다가 생각이 바뀐 것처럼 여겨지긴 합니다. 이에 관해선 동일한 뜻으로 연결시키는 접속사 ‘그리고’가 이미 있는데도 '그러나'를 후대에 첨가한 것으로 보는 신학자도 많습니다. 그녀가 “이제라도” 주님의 전능성을 믿는다고 말했기에  그 생각이 바뀐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다수의 영어 역본들은 ‘그러나’라는 단어를 넣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라도’(even now)가 마르다와 예수님 중 누구를 수식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먼저 그녀를 수식하면 자기는 지금도 주님이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는, 당장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뜻이 됩니다. 평소 지니고 있던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수식하면 주님더러 지금이라도 제발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간청한 뜻이 됩니다. (이 부분은 영어번역은 물론 원어에도 애매합니다.)


이 난제를 해결해 줄 결정적인 힌트는 따로 있습니다.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이라는 그녀의 말에서 주님이 "구하는 것"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단수라면 지금 나사로를 살리는 일 한 가지를 뜻하지만, 복수면 위에서 말한 대로 주님이 구하는 모두를 하나님이 이뤄주신다는 일반적 믿음이 됩니다.

따라서 마르다가 주님께 말한 내용을 쉽게 풀면 이렇습니다. “주님이 나흘 전에 오셨으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살렸을 텐데 그러지 못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나는 주님이 무슨 일이든 기도하면 다 이루시는 분이라는 믿음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너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그를 살려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이 “마지막 날의 부활”에 관해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이어서 당신을 믿으면 부활한다고 해도 그녀는 나사로를 당장 살려달라고 요구하기보다는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일반적 진리로 답했습니다. 주님과 그녀는 당장의 소생과 마지막 부활로 대화의 핀트가 어긋났습니다.(25-27절)

만약 마르다가 나사로의 소생을 믿었다면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28절)는 기록도 바뀌어져야만 합니다. “급하게 마리아에게 뛰어가 선생님이 지금 오라비를 살리려하니 어서 빨리 함께 가자”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 언니보다 믿음이 좋았던 마리아였음에도 현장에 도착해서 한 첫마디에도  소생에 대한 기대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마르다와 똑 같았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요컨대 당시 현장에 있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당장 나사로를 살려내리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두 자매는 물론 제자들마저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핍박 받을 곳으로 왜 다시 들어가느냐고 말렸고(8절), 의심 많은 도마는 심지어 함께 죽으러 가자고(16절) 약간은 비아냥조로 말했습니다. 내키지는 않지만 스승이 간다니까 어쩔 수 없이 따른다는 뜻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두 자매는 물론 문상 온 모든 유대인들이 주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소생을 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믿은 사람들이 취할 행동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목적

 두 자매가 마지막 날의 부활은 믿었을지라도 주님께 나사로를 다시 살려달라고 간구하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신 이유 또한 소생으로 그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능력만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특유의 목적이 따로 있었습니다. 주님이 직접 밝히신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4절)

그럼 실제 어떤 모습과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셨기에, 그것도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 나는 시체로 하여금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무덤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하셨기 때문입니까? 물론 맞습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생명을 주시기도 앗아가시기도 하는 분입니다. 단순히 질병을 고치는 이적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생명의 근원되심을 여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말씀 한마디로 폭풍우를 잠재운 것이나, 오병이어 같은 사건이 이보다 더 신기해 보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나사로를 살린 이적은 피부에 직접 와 닿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죽으면 천국 갈 것인데 구태여 다시 살아날 이유나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 이 땅에서 큰 재앙이 없고 먹고 사는 일에 부족함이 없으면 좋겠다 싶은 정도의 믿음인지라 다른 이가 다시 살아나는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이 이적에서 정작 주목할 사항은 예수님이 두 자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활의 확신을 품고 나사로를 다시 살려달라고 간구한 적은 없습니다. 두 자매는 “주님이 나흘 전에만 여기 계셨더라도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텐데 이젠 되살리기는 때는 늦어서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이젠 끝났다고 한탄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요구대로 들어주었다니 무슨 뜻입니까?

분명 그녀들은 소생은 마음에 소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넋두리이자 일종의 불평만 늘어놓았습니다. 이미 완전히 엎질러진 물이라 전혀 방도가 없다고 포기했던 일입니다. 누가 봐도 완전한 실패, 패배, 종말, 파멸로 끝났음에도 주님은 새 것으로, 그것도 이전보다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려 주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한탄 속에 담긴 아쉬움마저 놓치지 않으시고 다시 바로잡아 주었던 것입니다. 


영원한 시간의 주관자

 그녀들의 한탄은 최소한 나흘 전에만 오셨어도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나흘 전으로 되돌렸습니다. 오직 시간의 주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공상과학의 단골 소재인 타임머신을 타고 나흘 전 과거로 되돌아간 셈입니다. 다른 모든 인간들은 당시의 시간 영역에 그대로 남겨 두시고서 본인만 말입니다. 당신께서 과거로 들어가서 과거에 있던 나사로를 데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이야말로 처음이자 끝이요, 알파요 오메가인 것입니다. 태초에 생명을 주신 창조주요, 현재에 심판과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요, 마지막 날에 부활로 이끄시는 부활주십니다.


나사로 본인은 이미 죽어서 전혀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가 다시 살려는 믿음과 소망은커녕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권능으로 주님만이 타고 운행할 수 있는 영원한 타임머신에 동승하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기도나 소망도 하지 않고 단지 한탄한 것까지 주님은 관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겐 어떤 경우라도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마르다에게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죽어도 살겠고 살아도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이미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린다면, 당연히 현재 살아 있는 신자들도 죽지 않게 하실 수 있으며, 마지막 날 부활의 주체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생명뿐 아니라 시간의 근원이자 주관자라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나사로를 살림으로써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특별히 주님 앞에서 불평 아닌 불평을 털어 놓은 두 자매로 하여금 부활승리를 실제로 체험케 했습니다. 부활이 기독교의 객관적 원리로 사람들의 관념상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도하고 두 손으로 실감나게 만져지는 부활이 되었습니다.


언제 어떤 상태의 어느 사람을 고쳐내고 살리느냐는 것은 그분께는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서 전혀 가망 없는 자도 살렸습니다. 그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주인이십니다. 지금 나사로만 주님의 타임머신에 동승한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이가 다 그랬습니다. 모두가 죽은 지 나흘 되는 시체가 살아나오는 모습을 직접 보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이 땅의 시간대에 묶여있는 인간이 창조 시까지 거스르는 과거부터 마지막 날의 미래까지 주님과 함께 여행한 것입니다. 지구 시간으로는 길어야 기껏 한두 시간 안에 말입니다. 당신께서 택하시고 사랑하는 이에게는 죽음을 이겨내는 부활의 영광을 주신다는 약속을 그들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구현하셨습니다. 죽음의 주인인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깨트리고 부활 생명을 나사로의 육신에 넘치도록 부어주었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태초에 세우신 구속계획에

전적으로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영생을 이 땅에서부터 실제로 문자 그대로 체험한 자가 되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은 하나님에게 식은 죽 먹기입니다. 주님의 뜻은 하나님이 태초에 세우신 구속 계획이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에게 영원토록 유효함을 나사로를 통해 다시 확인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천하 만민 앞에 가시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소생의 기적을 맛보려면?

인생에는 엎질러진 물 같은 사태가 많이 발생합니다. 아무래도 완전한 실패 같아 더 이상 손을 써볼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판단되는 여러 정황이나, 그에 따라 스스로 느껴지는 감정과 믿음이 도무지 그 실패의 크기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회복될 가능성은 아예 제로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제로인지도 모릅니다. 능치 못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마치 수학공식은 달달 외우는데도 막상 문제는 풀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선 엎질러진 물도 얼마든지 다시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이미 흙탕물로 변한 물 대신에 깨끗한 새 물로 채워서 말입니다. 시간의 주인 되시는 주님이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를 태워서 그 엎질러지기 전의 상태로 데려가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모든 사역의 궁극적이고도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아니고는 어떤 일도 행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소망과 믿음과 간구와 도고도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은 소망에만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아무 응답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무엇을 먹든 마시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또 그러면 이런 놀라운 소생의 이적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두 자매는 기도는커녕 소망조차 하지 않고 거의 한탄만 했는데도 주님은 나사로를 살려 주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또 다른 이유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이라는 안타까운 탄식 안에 의심과 불신의 뜻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들은 주님은 어떤 병이라도 고치시는 분이라는 점만은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전혀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로가 중병이 들자 어서 와서 고쳐 달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실제로 행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우리의 도덕적 선행, 경건하고 거창한 종교적 행위나 업적, 신령한 체험과 역사 등이 동반되어야만 높아진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환난이나 문제가 닥치면 어서 빨리 그것에서 벗어날 길만 구하다가 언뜻 정신을 차리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고 자책합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의 노를 사게 되어 이 문제도 여태 해결되지 않는가보다 여깁니다. 이런 자책과 이해는 사실상 우리의 큰 착각이자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신자가 따로 구한다고 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영광은 당신께서만 드러내십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함께 하시면 자연히 당신의 영광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에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신자가 그분이 자기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믿고 그 믿음대로 행한다면 그분의 영광도 너무나 당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는데도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 더더욱 이상한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가 의심과 불신을 갖고, 다른 말로 완전한 확신을 갖지 않고 신앙생활을 영위한다면 그분의 영광도 신자가 의심하고 불신한 만큼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이 높일 수는 절대 없습니다. 인간이 유일하게 행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것뿐입니다. 따리서 우리가 그 영광을 가리지만 않아도 그분의 영광은 자연히 드러나는 법입니다.    .  

신자가 문제와 환난에서 벗어나려 열심히 간구한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여서 문제와 환난에서 벗어나야만 그래서 내 형통과 안일이 보장 되어야만 그분의 영광이 높아졌다고 여기는 것이 잘못입니다. 문제와 환난을 통해서도,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고난의 현실적 결말이 어떻게 되든 간에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 가운데, 아니 그 문제와 환난 가운데도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의 실체

 재차 강조하지만 나의 의나 영광을 높이려 하지만 않으면 그분의 영광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또 그 확신으로 나를 온전히 비워 그분께 내워드리는 것만이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든 간에 나를 통해 주님 홀로 영광받기를 진짜로 소원하고 입술로가 아닌 실제로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내가 당장 죽더라도 주님의 영광은 단 한 치의 손상도 없다는 고백이 언제 어디 어떤 어려움 가운데도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또 바로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주님은 무슨 일이든 이루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은 불신자도 압니다. 참 믿음은 엎질러진 물도 그분께서 다시 채워주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 혹시라도 다시 채워주지 않아도 그분의 영광은 결코 손상되지 않음도 아는 것입니다. 참 신자에겐 현재 고난이 언제 끝날 지는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고난 자체에, 나아가 현실적 고난으로만 끝나도 이미 그분의 영광이 크게 드러났음을 전혀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은 지금도 신자를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신자의 미래에 보장된 영광은 정확히 알지 못하고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단지 성경 기록으로, 또 현재 그 예표와 징조로 받아 누리고 있는 은혜와 사랑에 비추어 어림짐작만 할 뿐입니다. 물론 그 영광은 엄청나고 신묘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영원한 타임머신에 올라 타 있습니다. 신자는 나사로가 그랬던 것처럼 이 땅에서부터 그 놀라운 영광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우리가 따로 구할 그분의 영광이  더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범사의 운행을 그분께 온전히 맡긴다면, 아니 그분이 맡고 있음을 확신하고 우리 믿음이 그 자리에 확실하게 거하고 있다면, 절로 그분의 영광은 드러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말씀 그대로 이미 부활 생명 가운데 있으니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자의 가장 큰 특권입니다. 주님의 활기차고 아름다운 생명이 신자에게 이미 넘치도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고 그 안에서 기쁨과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은 틀렸고, "주께서 여기 고난 가운데도 함께 계신다."가  맞는 말이지 않습니까?
    

6/21/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