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마음의 동기와 중심을 철저히 보십니다.
어떤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둘 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수영을 해서 대서양을 건너라고 명령하십니다.
한 사람은 어찌 사람이 이 넓은 대서양을 건너느냐며 이건 불가능하다 미리 포기하고 시도조차 안 합니다.
인간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매우 힘든 것은 알지만,
내 힘과 능력으로는 할 수 없으나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시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아예 시도조차 안 한 사람의 생각과 같이 믿음으로 시도하려는 사람도 시도는 했지만 도저히 힘들어 중도에 포기할 확률이 높겠지만 그러나 주님의 뜻이고 주님만 의지하면 할 수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기에 계속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처음부터 인간적인 논리적 판단으로 횡단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시도조차 안 하는 사람은 세상적으로 보면 참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인본주의 세계관에서는 이런 사람이 지혜롭게 세상의 가치에 따라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뱀장어나 미꾸라지처럼 가뭄이 들어 물이 없으면 비 내리는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면서 땅속으로 들어가 살고, 비가 와서 물이 고여 좋은 환경이 되면 땅 밖으로 나와 활동하는 아주 기회주의적 이해득실에 따라 살아가며편하게 믿음 생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제 때 아무 일 없을 때는 입술로는 믿음과 은혜를 힘차게 외쳤지만 가뭄(총칼)일 때 은혜를 구할 생각도 없이 그저 목숨 부지하기 위해 믿음을 저버리고 신사 참배했던 사람들이 그런 부류입니다.
아니... 애초에 온전한 믿음이 없었기에 그리했던 것입니다.
이런 부류는 평온할 때는 믿음의 여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환란이 와야 바로 열매의 정체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반면...
어느 누가 봐도 수영으로 대서양을 결코 건널 수 없는 것을 상식으로 다 아는 사실이지만
믿음 하나로 건너려고 시도했던 사람은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참으로 미련하고
세상의 이치에 역행하는 자로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힘든 부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순수하여 가뭄이 들면 뱀장어나 미꾸라지처럼 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기에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며 비의 은혜를 내려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는 우직하고 순수한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들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이 두 사람의 태도를 어찌 생각하십니까... ]
믿노라 하는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하는 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상 16장 7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장 23절)
예수님께서 대표적으로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을 통해 여러 가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하라' '하지 마라'라는 말씀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정말 수영해서 대서양을 건너라는 말씀과 진배없이 힘듭니다.
이런 내용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비슷하게 반응합니다.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이런 걸 어떻게 지키라는 것이지?"
"이런 걸 사람의 능력으로 어떻게 지키냐는 말이지..."
"평생을 인간의 타고난 습성대로 살았는데 믿기만 하면 되지 뭘 또 전부 부인하라는 것인지... 믿음 생활이 이리 힘들어서야 원"
맞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의와 힘과 능력으로 이 말씀은 그 누구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두 부류로 갈립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찾지만 아예 인간적으로 판단하여 포기하고 말씀을 지키려고 시도조차 안 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과
힘든 건 알지만 믿음으로 순종하여 말씀을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인간적인 판단으로 시도조차 안 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입술로는 '주여주여'하며 더욱 소리높여 믿음을 외친다는 사실입니다.
입술로는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 힘들어 지킬 수 없다고 단칼에 규정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분들이 말하는 믿음과 은혜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역사함과 실체가 없는 지식과 이론과 관념에 그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적인 이론으로만 믿음 생할을 하기에 믿음의 실체적 삶에서 나오는 열매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입니다.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되지 무슨 열매를 운운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안된 교리가 주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열매를 '행위 믿음'이란 말로 색칠한 것입니다.
'행위 믿음'이란 말을 앞세워서 자신들의 열매 없는 삶을 정당화시키며 가리려는 시도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자동으로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도 그것마저 행위라고 하며 부정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이론과 관념적인 선에 그치기에 실제 삶에서는 온전한 믿음이 출력되지 않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삶에서 당연히 좋은 열매가 출력되고 온전한 믿음이 없다면 삶에서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리 이 말을 인정하기 싫겠지만 예수님은 단호히 열매로 확증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래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장 43-46절)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은 곧 하나님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성경에 기록된 말씀 하나하나가 모두 주님의 말씀이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을 단 한 개도 빼지 아니하고 모두 믿어야 그게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관점에서 보기에 너무 힘들어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아예 포기하며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태복음 19장 26절)
이 말씀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믿었다면 주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지키려고 해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지킬 수 있도록 능력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믿었다면... 처음부터 못 지키는 말씀이라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믿음을 강조하지만, 실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니 현실적 삶에서는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이론만 왔다 갔다 하며 내 편한 대로의 이론 신앙에 그치는 것입니다.
이론 신앙에 머물므로 평소 육적인 모습이 쏟아져나오는 것입니다.
실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주님의 모든 말씀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며 지키려고 하는 것과 아예 지킬 수 없다 하며 사전에 포기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지만,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하여 또 죄지으면 눈물로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사람과 처음부터 사람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단정하며, 죄짓는 것에 대하여 죄책감과 회개도 없이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 피로 용서받았다며
왜곡된 자유함을 느끼는 것의 차이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속사람 속에 있는 동기와 중심을 먼저 보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만으로 판단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 주님의 빛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 죄의 더러움이 더욱 보이므로 매우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 사도의 애통한 탄식을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더욱 멀리하며 점차적으로 성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없어 빛(주님)과 멀리 있을 때는 주변이 어두워 눈이 가려짐으로 인하여 나의 죄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죄에 대하여 애통함도 눈물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배운 지식적 이론에 충실하여 보혈 피와 은혜를 남용하여 내 죄를 덮으려고만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사람의 생각일 뿐 주님과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세리가 가슴을 치며 애통함으로 회개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회개한 세리가 한 톨의 죄도 없이 살았을까요?
예수님은 그의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중심을 보셨기에 그를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죄를지어 애통하며 회개했지만 또 죄짓는 것과 사람이 어찌 죄를 안 짓고 사냐고 하면서 미리 포기하고 죄짓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마음의 동기와 중심의 출발선 자체가 이미 다른 것입니다.
이쯤이야 하는 악한 마음으로 자기 죄를 정당화하고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의 보혈 피와 은혜로 용서가 되겠거니 스스로 확신하며 입술로만 주여주여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그 마음 중심 속에 있는 죄에 대한 동기 자체가 이미 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피를 내 허황된 죄와 거리낌 없는 이방인의 삶을 정당화하고, 가리고, 덮는 도구로만 이용하는 것은 그리스도 보혈 피의 가치를 싸구려로 만들며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피의 은혜는 내 죄를 주님께 낱낱이 고백하며 애통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께 용서해달라고 마음을 찢으며 완전히 굴복하여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그 가치가 크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보혈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주님께 애통하게 매달려 회개도 안 한 사람들에게 보혈 피가 다 적용된다면 저절로 죄가 다 용서되고, 다 거듭나고, 다 구원받아야 합당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을 찾는 자가 아주 적다고 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장 13-14절)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장 14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
정리하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주님이 주신 말씀이고 주님 그 자체이십니다.
나 자신이 주님을 사모하고 진실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확실히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교리적인 이해득실에 따라, 내게 유리한 말씀만 취하고, 불리한 말씀은 버리거나 변질시키려는 시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도 빼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모든 말씀을 100% 믿고 의지할 때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 내 믿음과 모든 삶에 살아서 역사하는 간증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있는 동기를 철저하게 보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가 같아도 마음의 중심에 있는 동기의 출발선이 어디인가에 따라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진짜와 가짜로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같이 기도했던 바리새인과 눈물로 회개했던 세리도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게 살지 못하고 또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세리는 그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죄에 대한 생각과 동기에 의하여 분명히 출발선이 달랐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은 회칠한 무덤이라 하고 세리의 기도와 믿음은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훤히 알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마귀가 공중권세 잡고 있는 이상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회개해도 또 죄를 지으리라는 것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예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며 아무 거리낌도 없이 이방인의 습성에 젖어 사는 사람에게 있는 마음의 동기와,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악한 것이고 우리는 주님의 자녀이기에 죄지으며 살면 안 되므로 양심을 치며 애통하게 회개하고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또 죄짓고 또 애통해하는 사람의 그 근본 동기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애통해하는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남이 있고, 거듭난 후에도 주님의 비취심으로 인하여 죄를 더욱 미워하고
열매를 계속 맺으며 점차적으로 성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은 이런 거룩한 분들의 것이고 이런 분들이 천국을 침노해가는 장본인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이분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께서 괭장히 기뻐하시며 복있다고 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녔다고 이들이 죄 안 짓고 완벽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죄를 미워하고, 이방인의 세속적 삶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적 양심이 속사람 속에 굳건히 진을 치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심령이 되고, 애통한 자가 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양심적 의지를 면밀히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성령으로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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