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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조 강희제의 리더십 3.

Joyfule 2007. 6. 16. 07:10
중국 청조 강희제의 리더십 3.

또 그 2년 후인 1685년 강희 24년에는 러시아 군대를 패퇴시키고 알바진 요새를 공략했으며,
그 후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켰다.
그런가 하면 1696년과 1697년에는
준가르 전사들의 지도자 갈단을 정벌하러 나서 결국 그를 자결케 했고
사망하기 두 해 전인 1722년, 강희 59년에는 티베트를 공략해 복속시켰다.
현재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는 중국의 지도는
이 시기에 대체적인 윤곽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강희제의 치세를 세계사적으로 비교해서 보면 이렇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즉위한 것은 강희 21년 즉, 1682년이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사망한 것은 강희 54년 즉, 1715년이었다.
결국 강희제의 시대는 유럽의 절대주의 왕정과 맞물리는 시기였다.
하지만 당시 청왕조는 러시아는 물론 유럽 최강이었던 프랑스보다도 국부(國富)면에서 앞섰다.
한마디로 강희제는 그의 치세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강대한 나라의 CEO로 61년을 지낸 셈이었다.
바로 문무겸전의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말이다.

청왕조를 세운 만주족과 그 지배를 받게 된 한족 간에는 먹거리가 사뭇 달랐다.
더구나 청왕조 초기에는 이른바 만주족의 만식(滿式) 먹거리와
한족의 한식(漢式) 먹거리 간의 차이 만큼이나
만주족과 한족간의 민족적 갈등과 불화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만주족은 15만여 명에 불과했고, 한족은 그 100배가 넘는 1억5000여만 명이었다.
청왕조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족의 참여가 절실했다.
그런 이유로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 간의 갈등과 불화를 씻고
민족간 화해와 통합을 이루기 위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고민 끝에 던져진 강희제의 카드는 언뜻 보기에 의외의 것이었다.
다름 아니라 상호 이질적인 만주족 먹거리인 만식과
한족의 먹거리인 한식을 한데 모아 놓으라는 것이었다.
강희제는 만주족과 한족간의 민족적 화해와 화합을 이루기 위해
전국적으로 만주족과 한족의 고유한 먹거리들을 모아 올리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요리 비법, 색상, 맛과 향, 건강식의 네 가지 기준을 적용해
108가지의 음식을 최종 선발해 차려 놓았다.
그리고 이 음식들이 차려진 자리에 만주족 출신과
한족 출신 관료들을 함께 불러모아 대연회를 연 것이다.
이것이 이름하여 만한전석(滿漢全席)'이다.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만한전석'이 선보인 적이 있다는데
시대적 배경으로 보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만한전석'은 중국황실의 음식연회이기에 그것이 조선의 궁중에서 재연될 리도 만무했다.
어쨌거나 시청률 50%를 넘는 초인기 드라마에서 등장했던 그 '만한전석'의 진정한 유래가
다름아닌 강희제의 피나는 만주족-한족 통합노력의 결실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을 듯 싶어 사족을 달았다.
강희제가 만한전석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한마디로 음식의 나눔을 통한 민족간의 화해와 통합이었다.
먹거리의 통합을 통해 만주족과 한족간의 화합을 꾀한 그 발상이 참으로 탁월하지 않은가.
아무리 서로 으르렁거리고 질시하다가도 먹는 자리에 와서는 서로에 대해
너그러워지고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강희제는 바로 그것을 노렸을 것이다.
결국 강희제의 이런 감각있는 화해와 통합의 노력 덕택에 15만 명 남짓했던
만주족이 당시 1억 5000만 명이 넘는 한족을 268년간이나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 단지 지배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만주족의 에너지와 한족의 에너지를 뒤섞어 내어
대중화(大中華)의 시너지를 이뤄낸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