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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신격호 회장의 리더십

Joyfule 2007. 6. 10. 08:57


롯데 신격호 회장의 리더십     
일본에서는 매출 3천억엔을 올리는 껌과 과자회사이지만, 
한국에서는 매출 2조엔이 넘는 거대 재벌. 호텔, 백화점, 유원지 등 
다각적인 사업으로 급성장을 이룬 롯데의 비밀은 무엇인가.
최근 발간된 일본의 시사주간지 <다이아몬드>는 
롯데그룹의 창업주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신격호 회장(일본명:시게미쓰 다케오)과의 
인터뷰 및 취재를 통해 롯데 창업 56년에 얽힌 비화를 게재했다.
다음은 이 주간지에 실린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종전 직후에 롯데를 창업하여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거대재벌을 키운 남자 - 언론에 거의 등장한 적이 없는 그룹 총수인 
시게미쓰 다케오(신격호)가 여든한 살이 되어 자신의 체험과 경영철학을 적나라하게 밝혔다.
롯데 창업 56년은 그야말로 파란만장이라는 표현 그대로였다. 
그가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전후에 점령군들이 껌을 씹고 있는 것을 보고 
돈벌이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이 계기였다. 
껌은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뿐더러 별다른 설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당시는 설탕을 배급받던 시기여서 아이들은 단 것에 굶주려 있었다.
물론 간단히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경쟁도 치열했다. 도쿄에만 1백50~1백60사가 있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초콜릿으로 눈을 돌렸다. 
초콜릿은 과자업계에서는 가장 매출이 많아서 이것을 하지 않는 한 중소기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초콜릿 사업에는 메이지(明治製菓), 모리나가(森永製菓)라는 양대 산맥이 있었다. 
‘달걀로 바위치기’라며 은행은 물론이고, 사내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설비투자에 16억엔 정도 들었지만 은행은 도와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상사(商社)에 부탁해서 간신히 조업할 수 있었다.
 만일 초콜릿 사업이 실패한다고 해도 껌으로 올린 수익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은 서 있었다.
신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1941년. 18세라는 젊은 나이였다. 
종전 후인 47년에 츄잉껌 제조를 시작하여 다음 해인 48년에 현재의 롯데를 창업했다. 
껌 업계에서 최고였던 해리스를 제치고 64년에는 그토록 바라던 초콜릿 시장에 뛰어 들었다. 
그 후 메이지, 모리나가를 추격하여 84년에는 드디어 일본 국내 과자업계의 선두로 나섰다. 
58년에는 친동생이 한국 롯데제과를 설립, 일본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한국에 쏟아부어 유통과 엔터테인먼트를 기둥으로 하는 거대재벌의 태동이 시작된다.
한국에서 처음에는 식품회사가 아니라 중화학공업을 하고 싶었다. 
일본의 공업화를 지켜보고 한국에서도 같은 순서로 진행될 거라 생각했고, 
과자는 장래성이 없었다. 과자로는 선두기업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석유화학산업 참여를 검토했으나 한국정부가 지금의 LG를 지정하는 바람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정부가 제안한 것이 “제철을 하지 않겠나”는 것이었다. 
제철사업에 관한 것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알아보니 막대한 설비자금이 필요했다. 
당시 하치만(八幡)제철에 상담을 하러 가자 “음, 개인이 하기엔 무리가 아닐까요”란 말을 들었다.
하지만 정부의 요청도 있어서 1년 동안 일본의 제철공장을 전부 보러 다녔다. 
미국이나 유럽에도 갔다. 그 결과 연산 1백만톤 규모의 설비라면 충분히 경쟁력도 있고, 
은행의 융자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정부가 “제철은 국가에서 하기로 했으니 이제 됐다”고 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정부에서 제안한 것이 호텔사업이었다. 
정부의 관광공사가 경영하는 ‘반도호텔’이란 것이 있었는데, 제대로 일을 못해서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든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호텔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제철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세계 일류 호텔에 전부 묵어 보았다. 호텔사업이란 어려운 것이다.
 일본도 그렇지만 세계를 둘러보아도 호텔 단위로 이익을 내는 곳은 상당히 적다. 
단 한국이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으로 서울 시내는 폐허 상태라 일류호텔 같은 건 없었다.
신 회장의 경우 부탁을 받아서 시작한 사업이 많다. 
한국의 다른 재벌들은 돈을 빌려 사업을 키워나갔지만 그는 ‘소심’했다. 
호텔사업은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의 직접적인 요청이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신 회장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마음에 들었던 일본 제국호텔 본관의 외벽과 같은 
인도산 사암을 구하기 위해 사원을 인도로 파견해서 코스트를 10분의 1로 줄였다.
덧붙이면 현재 치바 롯데 마린스 야구단 매입을 부탁한 것은
 ‘쇼와(昭和)의 요괴’라 불린 전 총리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였다. 
신 회장의 차남 결혼식에는 기시 전 총리 이외에도 후쿠다, 현직 총리였던 나카소네 등의 
유력 정치가가 참석하여, 한일 양국에 강한 정치적인 영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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