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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영성의 길.

Joyfule 2021. 11. 20. 12:59


 

  

    참된 영성의 길.

 

 

 참된 영성에의 길

 

필자는 지금까지 ‘영성’에 대한 정의를 뒤로 미뤄 왔다. 이제 영성의 근본이 되는 단어 ‘신령한’의 의미를 자세히 고찰했으므로, 이에 기초하여 ‘영성’이 무엇인지 밝힐 계제에 이르렀다. 영성(spirituality)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인이 견지하는 ‘신령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상태가 가능하려면 세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영성은 영(혹은 혼)이라는 비물질적 실체(invisible substance)를 가진 존재와 연관해서만 언급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짐승의 경우에는 영성을 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과 천사가 후보자로 부상하는데, 우리의 토의 상 후자를 제외하면 인간만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고전 2:11).

 

둘째, 영성은 영적 실체를 만드시고 붙드시는 하나님(히 12:9)을 고려함 없이 이야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영이셔서(요 4:24) 자신의 피조물 또한 영적 존재로 만드신 것(창 2:7)이기 때문이다.

 

셋째,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 존재인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활동 및 상호 작용을 전제함 없이 논의가 불가능하다. 이 때 하나님은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지만 특히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신령한 상태’를 지칭하는 일은 오순절 이후에나 가능한 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령성’의 표현이 ‘70인역에나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실상 이것은 오순절 이후에 생긴 단어(an after-Pentecost word)이다 (강조는 필자의 것).’ 다시 말해서 진정한 의미의 영성은 오순절 이후 성령님의 보편적 사역과 연관시켜서만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내용을 배경에 깔고서 필자는 영성을 ‘영이신 하나님 (특히 성령)께서 영적 존재인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지속적 역사를 이루심으로써 그의 심령 가운데 형성하시는 신령한 상태’라고 정의 내리고자 한다. 영성을 이렇게 이해할 경우, 우리는 참된 영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참된 영성의 출발점은 중생이다.

죄인인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첫 단계는 부패하고 죄된 그의 심령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영적 생명을 부여 받는 일이다. 성경은 이 현상을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요 3:5~7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둘째, 참된 영성의 목표는 신령한 자로 성숙해 가는 것이다.

중생은 참된 영성을 이루어 가는 시작일 뿐 성숙의 목표는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일단 중생한 이들은 신령한 자 (고전 3:1; 14:37; 갈 6:1)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영적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고전 3:1; 히 5:13), 장성한 자(히 5:14)로 성장하겠다는 결의와 노력이 요구된다. 지난 분단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원론적 의미의 신령함에만 머무르지 않고 판단론적 의미의 신령함을 추구하는 태도와 자세를 말한다.

 

셋째, 참된 영성의 형성은 성령께서 부여하신 자원을 올바로 활용할 때 이루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성령께서는 적어도 여섯 가지 사항의 영적 자원을 허락하셨다. 이런 것들을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참된 영성을 형성하고 신령한 자로 성숙해 갈 수 있다.

 

① 우리가 신령한 집이 되도록 하셨다(벧전 2:5): 이는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병입될 때(고전 12:13)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각자(고전 6:19)와 공동체(고전 3:16; 고후 6:17; 엡 2:21~22)는 성령님의 내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뜻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과 긴밀히 연계하여 사역하시기 때문에(요 16:14; 고전 15:45; 고후 3:17), 성령님의 내주는 그리스도의 내주를 가능하게 했다(롬 8:9~10). 따라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연합적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었고 살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요 14:20, 23; 15:5; 고전 6:17; 고후 13:5; 갈 2:20; 엡 3:17). 이러한 연합과 교제를 통해 참된 영성의 형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②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과 신령한 지혜․총명을 허락하신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기독교적 지성(Christian mind)의 계발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영적 분별력(고전 2:13~14)과 신령한 지혜 및 총명(골 1:9)을 받아 누릴 수 있고, 이것이 또 우리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③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내려 주셨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복을 향유하게 하심으로써(엡 1:3) 우리가 복된 존재임을 알려 주신다. 우리가 신령한 복을 향유하면 할수록 참된 영성의 형성이 가속화된다.

 

④ 우리가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신다 (엡 6:19; 골 3:16): 우리의 노래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성도 간의 교제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이런 수단을 옳게 활용할 때 우리의 심령에 참된 영성이 형성된다.

 

⑤ 우리에게 각양 다양한 영적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롬 12:5; 엡 4:12), 교회의 덕을 세우기(교회가 신앙적으로 든든히 세워지기) 위해 (고전 14:12), 서로 봉사하기 위해(벧전 4:10), 그리스도인 사이의 교제를 활성화하고 상호간의 영적 유익을 신장하기 위해(롬 1:11~12), 우리의 은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런 은사들을 사모해야 한다 (고전 12:1). 이러한 영적 은사의 활용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영성을 형성하도록 돕는 좋은 방편이 된다.

 

⑥ 우리로 하여금 신령한 제사를 드리도록 해 주셨다(벧전 2:5): 우리가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 또한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바치든지(롬 12:1), 찬미를 하든지(히 13:15), 재물을 드리든지(빌 4:18; 히 13:16), 선행을 하든지(히 13:16)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제사로 간주된다. 이러한 제사 행위야말로 우리의 영성 형성을 이루어내는 구체적 수단이 될 것이다.

 

넷째, 참된 영성의 표징은 사랑이다.

무엇이 참된 영성의 필수불가결한 표징일까? 많은 이들은 성령의 은사를 첫째 가는 목록으로 꼽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랑이 참된 영성의 양도할 수 없는 표징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사실 성령의 은사라는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고린도 교회만큼 풍족히 받은 예도 드물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했는데 (고전 1:6), 이는 그들이 결국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고전 1:7)는 뜻이다. 어느 정도로 풍족했느냐 하면 바울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지경이었다 (고전 1:4). 성령의 은사에 대해 바울 편에서 자세히 설명을 베푼 것(고전 12:4~11) 또한 그들이 은사를 풍족히 누리고 있던 때문이었다.

 

자, 그러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신령한 자, 곧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가? 웬걸!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 3)요,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이었다(고전 3:1).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그들의 풍족한 영적 은사에도 불구하고 미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판정을 받은 것은,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이요 (고전 3:3),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 사이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는 이름의 파당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전 1:11~12; 3:4). 그들 사이에 이러한 시기와 분쟁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성령의 은사를 풍족히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신령한 자)은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은 후에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이 점을 다시 한 번 더 밝히고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열등의식에 빠진 이도 있었고(고전 12:15~16), 반대로 우월의식에 휩싸인 이도 있었다 (고전 12:21). 이러한 그릇된 태도를 시정하기 위하여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길로서 ‘사랑’을 제시한다 (고전 12:31 하반). 사실 우리가 사랑 장(章)이라고 이야기하는 고전 13장은 철두철미하게 성령의 은사 활용 문제와 관련하여 주어진 바이다.

 

사랑의 특성으로 제시된 구절들 (고전 13:4~7)은 실상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고자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특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영성의 표징을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사랑(갈 5:22~23)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은사가 많든 적든 사랑으로 하면 그것을 통해 참된 영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에게 은사가 많든 적든 사랑이 없이 은사를 활용하면, 이는 우리가 아직도 육에 속한 자요 영적 어린 아이임을 노정하는 것이다.

 

다섯째, 참된 영성의 원동력은 성령 충만으로부터 생긴다.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인이 일시적으로나 항구적으로 성령께 장악되어 그 분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 드리는 영적 활동’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성령님의 역사와 관련하여 성령 충만을 간구하지 않아도 될 사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참된 영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에 참된 영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성령님의 소원이실진대,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의 은혜를 덧입혀 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 단지 우리 편에서 일시적으로나 (행 2:4; 4:8, 31; 9:17; 13:9) 항구적으로나 (눅 1:15; 행 6:3, 5; 11:24) 성령 충만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권면한 것이다.

 

여섯째, 참된 영성의 실상은 그것이 하나의 삶 ― 곧 성령으로 사는 삶 ― 이라는 데에 존재한다. 참된 영성은 종교적 의미를 반영하는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어떤 특정한 활동과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의 문제이다. 이러한 삶은 성령님과의 동행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에는 ① 종교적 영역과 일상 생활을 망라한 총체적 삶, ②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과정 전체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런 사상을 성경 몇 곳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는 성령을 언급하는 권면에 있어 함께 등장하는 동사들을 보아 알 수 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에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상기 구절에서 성령과 연계되어 나타나는 동사는 세 가지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롬 8:4; 갈 5:16)는 ‘성령의 자극과 능력에 의거해 생활하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다’(롬 8:14; 갈 5:18)는 ‘성령의 통제와 주관 하에서 이끌림을 받다’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는 갈 5:16의 경우와 다른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규칙에 맞추어 걷다’이다.

 

그래서 신국제역(NIV)은 이 동사를 ‘성령과 지속적으로 보조를 맞추다’(to keep in step with the Spirit)라고 번역했다. 이 세 가지 동사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본다면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의 주관 하에서 그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자극과 능력에 의거해 그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으로 사는 삶에는 필연적으로 내면적 싸움이 포함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우리의 죄성이 엄연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그 실상은 다음과 같다.

 

갈 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거룩한 투쟁, 선한 싸움을 지치지 말고 계속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영적 씨름이 없이는 ‘성령으로 사는 삶’을 운운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참된 영성을 위한 길로서 여섯 가지 주장 ― 참된 영성의 출발점, 목표, 형성, 표징, 원동력, 실상 ― 을 펼쳤다. 우리가 이러한 영성의 길을 걸어갈 때, 오늘날 영성과 관련한 혼란한 풍조를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영성이 흡사 성경의 교훈과 무관한 것처럼 이교도시(視)하는 순수주의적 오류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글 송인규 목사 (새시대교회) 3D3D3D3Dseniosong@hanmail.net"">3D3D3Dseniosong@hanmail.net">3D3D3Dseniosong@hanmail.net">3D3Dseniosong@hanmail.net">3D3D3Dseniosong@hanmail.net"">3D3D3Dseniosong@hanmail.net">3D3Dseniosong@hanmail.net">3D3D3Dseniosong@hanmail.net"">3D3Dseniosong@hanmail.net">3D3Dseniosong@hanmail.net">3Dseniosong@hanmail.net">3D3D3Dseniosong@hanmail.net">3D3Dseniosong@hanmail.net"">3D3D3Dseniosong@hanmail.net"">3D3Dseniosong@hanmail.net">3D3Dseniosong@hanmail.net">3Dseniosong@hanmail.net">3D3Dseniosong@hanmail.net"">3D3Dseniosong@hanmail.net">3Dseniosong@hanmail.net">3D3Dseniosong@hanmail.net"">3Dseniosong@hanmail.net">3Dseniosong@hanmail.net">senio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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