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엽의 대학자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일생 동안 7천 수가 넘는 시를 지었습니다. 신동으로 소문이 나 9세 때부터 경전과 역사, 제자백가, 불경 등을 섭렵하였으며, 한 번 읽은 내용은 모두 기억하는 재사였습니다. 그의 사후 발간된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은 총 53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입니다. 시화집 속의 수필 두 편이 눈에 띄어 옮겨 봅니다.
<남쪽 지방으로 여행을 떠나 강을 건너가려고 나룻배를 탔다. 마침 내가 탄 배 옆에 있던 배도 함께 출발했다. 두 배는 크기도 사공의 수도 같고, 배에 탄 사람 수도 거의 비슷했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니 옆의 배는 벌써 저쪽 기슭에 닿았는데, 내가 탄 배는 느릿느릿 가고 있었다. 옆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저 배에 탄 손님은 사공에게 술을 사 주어, 사공이 기분 좋게 힘껏 노를 저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부끄러운 빛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혼자 탄식했다. “이 작은 갈대 잎 같은 배가 가는 데에도 뇌물이 있고 없는 데 따라 빠르고 느리거나 앞서고 뒤서는데, 하물며 벼슬길을 경쟁하는 마당에 내 수중에 돈이 없으니 오늘까지 하급 관직 하나 얻지 못했구나. 따지고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로구나.” 기록해 두었다가 훗날 참고삼아야겠다.>
<행랑채가 허물어져 장마에 세 칸이 비가 샜다. 어쩔 수 없이 모두 수리했다. 그런데 그중 두 칸은 비가 샌 지 오래되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손을 대지 못했다. 수리하려고 보니 서까래, 기둥, 들보와 추녀가 모두 썩어 못 쓰게 되었다. 수리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나머지 한 칸은 한 번 비가 샜을 때 서둘러 기와를 갈았기 때문에 재목들이 멀쩡했다.
나는 여기서 느낀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몸도 잘못을 알고 바로 고치지 않으면 나쁘게 되는 것이, 마치 나무가 썩어 못쓰게 되는 것과 같구나. 뿐만 아니라 정치도 이와 같다. 백성에게 엄청난 해로움이 미치는 정책을 곧 개혁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백성이 못 살게 되어 나라가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고치려 들면 쉽지 않다. 조심해야겠다.>
이규보는 문재는 뛰어났지만 16세 때부터 사마시에 응시했으나 세 번이나 낙방했습니다. 22세에 장원급제하고도 그는 오랫동안 미관말직 한 자리 얻지 못했습니다. 이때 아버지마저 여의고 천마산에 들어가 10년 동안에 ‘백운거사록’ 20권과 ‘동명왕편’(東明王篇) 3권을 지었습니다.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여 스스로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칭한 그는 붓을 든 자는 언제나 곧고 바른 말을 해야 한다는 철학을 행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급제 10년 만에 전주(全州) 목사의 서기로 벼슬을 시작한 그는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쉴 틈 없이 민정을 살펴 억울한 죄인을 방면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고, 기우제를 지내 주는 등 애민의 정을 폈습니다. 그러나 동료의 참소로 파직당한 뒤 복직과 유배를 거듭한 그의 생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동방문학의 관(冠)이라 불리는 이규보의 문장이 오늘날까지 전해온 것은 오로지 그의 꼿꼿한 성품과 청백리 정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무신의 난이 한창이던 당시 경상도 일원에는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경주, 청도, 울산, 합천, 진주, 김해와 태백산 등지에서 여러 도당들이 서로 호응하여 관아를 침공하는 등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 있었습니다. 상국(相國) 최충헌(崔忠獻)이 토벌령을 내렸습니다. 낙백한 후 모친상을 당해 상복을 입고 있던 35세의 이규보는 “내가 나약하고 겁이 많기는 하나 역시 한 백성인데 국난을 회피하면 대장부가 아니다”며 용약 출전했습니다.
청도 운문산에 주둔하면서 민란 진압에 힘쓰면서도 그는 산과 들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도록 청원했습니다. 전사한 장졸들은 관군이나 적군 할 것 없이 명복을 빌어 주고 논공행상을 해 달라고. 상부에서도 그의 애민과 논리정연함에 감복하여 각 부대에 쌀을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토벌전이 끝난 다음 해의 논공행상에서 이규보는 제외되었습니다.
그는 곧장 개성 동쪽 봉향리(奉香里)에 초당을 지어 은거하였습니다. 이름하여 지지헌(止止軒). 군자는 그칠 때가 되면 그쳐서 그 지혜의 밝음이 마치 물속의 밝음과 같음을 비유한 이름입니다. 이 무렵 이규보는 스스로를 달래고 명예를 좇는 인간의 얕은 마음을 풍자하는 ‘조명풍’(釣名諷)을 지었습니다.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청백리 양진(楊震)을 찬양하며 자신의 벼슬길에 임하는 좌우명을 표현한 시입니다.
이규보는 그 후 41세에 한림원 학사, 50세에 사간원의 고위직에 발탁되기도 했으나 52세에 경기도 계양(桂陽) 수령 좌천, 63세에 전북 위도(島) 유배 등 험난한 벼슬살이를 했습니다. 65세에 겨우 귀양에서 풀려났습니다. 벼슬을 물러난 후에도 그는 몽고군의 침공을 막는 데 정열을 쏟고,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붓을 들고 조정으로 덜려갔습니다. 문순공(文順公) 이규보는 7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시를 읊었습니다.
이규보의 생애를 되돌아보게 된 연유는 요즘 명리욕에 젖어 갑(甲)질, 힘질, 말질, 돈질을 휘둘러대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입니다. 손톱만한 힘만 있으면 윽박지르고, 단가를 후려치고, 뒷돈을 요구하고, 제값을 안 주고 빼앗으려 합니다.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갈등을 부추기는 해괴한 논리의 궤변과 이론을 양산하고,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거나, 아예 탈세 천국에 거금을 빼돌리고 있습니다.
‘천인공노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원자력발전 불량 부품 공급으로 인한 전력수급 위기에 화가 치솟는 것은 유달리 이른 초여름 더위 때문만일까요. 체르노빌 원전 폭발 이후 태어난 각종 기형아들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지경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후유증은 오이나 호박의 열매에 꽃이 피거나, 해바라기 꽃 가운데 꽃봉오리가 돋아나고, 한 꼭지에 네댓 개의 토마토 열매가 달리는 돌연변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만 예상되는 수습 비용은 500조 엔 이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1년 예산 330조 원의 20여 배에 달하는 돈입니다. 돈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몇 십 년을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야 할지, 어떤 괴이한 모습의 후손이 태어날지, 무슨 가공할 질병이 생길지, 또 언제 다른 자연의 재앙이 닥칠지 살아 있는 한 불안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끔찍한 사고가 인재(人災)라면 그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범죄가 아닙니까.
흰 구름 바라보며 뜬구름 같은 인생을 관조하고, 명경지수(明鏡止水)에서 삶의 철리를 터득한 이규보. 새삼 범인이 흉내 내지 못할 그의 생이 돋보이는 여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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