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본인이 와야 합니다 - 오형칠
은행은 신용, 신용하면 은행을 떠올린다. 그만큼 신용은 은행을 상징하는 말이다. 서비스 역시 은행의 상징처럼 여긴다. 얼마 전에 서비스 랭킹 1위가 은행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신용과 서비스 정신을 떠나서 은행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누가 생명처럼 귀한 재산을 아무에게 맡기며 함부로 그 은행을 즐겨 찾아가겠는가.
요즘은 인터넷뱅킹을 하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 은행에 가는 대신 인터넷뱅킹으로 금전을 관리한다. 인터넷뱅킹도 신용을 우선 순위 1위로 삼는다. 은행들은 신용을 잘 지키기 위해 혹시 인터넷뱅으로 남의 돈을 인출하지 못 하게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한다. 백신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는 이유도 다 거기에 있다.
해킹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말고는 인터넷뱅킹으로 남의 돈을 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수속과 절차가 까다롭다. 먼저 인증서암호, 둘째 계좌비밀번호 4자리 숫자, 셋째 이체용 비밀번호 영문 숫자 섞어 6자리, 수시로 변하는 보안카드 비밀번호를 알아야 돈을 인출할 수가 있고 무엇이든지 3회 틀리면 거래가 정지된다. 은행원들도 남의 이러한 비밀번호를 모른다. 왜 이러한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은행 명예를 걸고 신용을 지키기 위해서다.
작년 8월까지만 해도 우리 약국 앞에는 경남은행 중앙지점이 있었는데 구조 조정으로 아래에 있는 경남은행 본점과 합쳐버렸다. 새삼 은행이 가까이 없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깨달았다. 의료보험을 시작하고부터 거스름돈이 많이 필요했다.
그나마 다행히 새마을금고가 옆에 있으므로 통장을 하나 만들어 이용했으나 금년 7월 16일부터 왕릉 앞 새마을금고와 통합한다고 하니 걱정스럽다. 우리 약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N은행과 K은행이 있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N은행 인터넷뱅킹을 이용한다. 그 통장은 개설한지 35년이 넘는다. N은행 비씨카드도 초창기에 만들어 지금까지 쓰고 있다.
어제 출근하면서 전에 사용하던 N은행 통장을 다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터넷뱅킹을 사용하므로 통장이 필요없었다. 출근하자 곧바로 최집사를 시켜 계좌번호와 새로 사용할 도장을 가지고 15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은행으로 보냈다. 단순히 도장만 바꾸면 전에 사용하던 통장을 쉽게 만들어 주리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에 전화가 왔다.
“본인이 오면 쉽게 된데요.”
장마철이라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새로 수리를 하고 처음 가본 은행은 아주 산뜻하고 넓고 좋았다. 아침이라 손님을 별로 없었고 내가 찾아간 정문에서 왼쪽 방은 20평 정도, 통장을 새로 개설하거니 해지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방이었다. 여직원만 있을 뿐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가운데 앉은 여직원에게 말했다.
“금방 우리 직원이 본인이 와야 된다고 하여 왔는데요.”
나는 자초 지종 이야기를 했다. 담당 여직원은 이런 경우는 통장분실 신고와 도장을 새로 바꿔야 하므로 저쪽에 가서 번호표를 받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최집사는 본인이 오면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고 했는데, 예상 밖이었다. 이게 싫어서 최집사를 보냈는데.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문을 열고 나오는데 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새 통장을 하나 개설하자.”
되돌아 섰다. 원래 담당했던 직원은 자리에 없었다. 대신 왼편에 있던 직원이 용지를 한 장 주면 주소 등을 쓰라고 내어주었다. 주민등록증과 도장을 내어주었다. 통장을 새로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2-3분, 마지막으로 통장을 만들어주면서 말했다.
“입출금만 하면 되죠? 다른 서비스는 필요 없지요?”
“예.”
얼떨결에 예라고 대답한 이 말 한 마디가 이상한 사태로 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은행에 거의 가지 않는 나는 현금입출금기를 사용할 줄 모른다.
약국에 도착하니 최집사가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찾거나 빼게 했냐고 물었다. 실은 이게 필요했다. 이 은행은 항상 손님이 많으므로 기다리는 시간이 많으면 안 된다. 새로 통장을 만든 이유가 이것 때문인데. 즉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나를 알아보기에 사정을 이야기했다. 나는 은행 출입을 잘 하지 않아 다른 서비스신청을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예라고 대답했는데 기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하고 말했다. 우리 직원을 보낼 테니까 서류를 주면 써 보내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내가 은행에 갔다 온 지는 불과 3분가량밖에 되지 않는다. 일언지하에 안 된다고 거절했다. 본인이 직접 와서 써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그럼 본인 아닐 확률은 0.9999999%도 없는데도 안 된다는 말인가요?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단지 아까 갔던 그 직원이 서류를 가져오면 내가 직접 써 보내게 해 달라고 사정했다. 단지 자기가 보는 앞에서 서류에 글을 써야 된다는 논리였다. 조금 전에 내 주민등록증과 도장, 자기가 만들어준 통장, 게다가 내가 처음 개설할 적에 써준 글씨 등등을 미루어 보아 본인이라는 것을 100% 증명할 수 있었으나 나더러 입장을 자꾸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만일 내가 몸이 아파, 어쩔 수 없이 두 번 다시 거기에 갈 수 없는 형편이라도 꼭 오라고 하겠는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아니다.
아무튼 본인이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하다. 이와 비슷한 경우 혹은 지금과 같은 경우 본인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으나 본인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할 수가 없다.
대화가 이정도에 이르러자 기분이 언짢았다. 나는 이 이상 이 사람과 대화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지점장을 바꾸어 달라고 했다. 이런 불합리성은 고쳐달라고 하고 싶었다. 우리 약국에 몇 달 전에 지점장이 새로 부임하여 인사차 들린 적이 있다. 어쩔 수 없다는 어투로 말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1-2분 기다렸으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버렸다. 5분 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바로 그 여직원이었다. 그 여직원도 나를 금방 알아보고 지부장님을 바꾸는 사이에 전화가 끊겼다고 했다. 아까와는 달리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웠지만 장황한 설명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자기는 나를 처음 보았다는 등 그 주장은 똑같았다.
외국에 살다온 사람들은 공무원이나 경찰서, 은행은 손님들을 얼마나 편하게 해 주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친절하다는 은행이 이 정도 수준이니 공무원들을 말해서 무엇하랴. 우리 공무원들은 정말 까다로워야 할 사항은 안 까다롭고, 별로 까다롭지 않아도 될 곳은 오늘 이 직원처럼 목숨을 걸어놓고 까다롭다. 왜 이럴까? 그것은 경직된 사고 방식과 사물이나 사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창조적인 사람이 되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본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이요, 두 번째는 금방 가져왔던 물건, 즉 주민등록증, 도장, 금방 만들었던 통장을 가져와 보라고 하면 된다. 그래도 모자라면 조금 전에 자기와 했던 대화를 한번 떠올려보라고 하거나 그래도 모자라면 아까 필적과 써올 글의 필적을 대조해 보아도 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여직원은 서류를 가지러 오라고 했다. 곧장 최집사는 서류를 갖고 왔다. 나는 몇 가지를 써서 다시 보냈다.
“주민등록증을 보내래요.”
나는 어이없는 부탁에 할 말을 잊고 주민등록증을 내어주었다. 또 본인 확인?
이제 모든 일은 끝났다. 하지만 일을 쉽게 풀지 못 하고 일부러 어렵게 푸는 그 직원이 가련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권고 하고 싶다. 본인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보이는 곳만 보지 말고, 안 보이는 곳도 보아라. 그대는 가장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효율적, 서비스 차원으로 보면 만족한 수준은 아니외다. 소위 말하는 탁상 행정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록이 피어날 때 - 김 설려 (0) | 2015.03.24 |
---|---|
예순이 되면 - 최민자 (0) | 2015.03.21 |
이 발 - 鄭 木 日 (0) | 2015.03.19 |
난향을 맡으며 / 천 하영 (0) | 2015.03.17 |
살아있는 풍경화 - 홍미숙 (0) | 2015.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