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은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평안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평안한 삶을 얻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 그냥 생각에 불과하다. 아니면 최소한의 노력으로 거저 얻었으면 하는 속물근성이 작동하지 않은가? 세상에도 공짜가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워낙 교회에서는 공짜선물로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1분짜리 영접기도를 마치면 천국은 거저 얻어지는 보너스라든가, 일주일에 한번 1시간짜리 예배의식에 참석하여 지폐 몇 장을 던져주면, 하는 일마다 잘되고 성공한다는 투의 세속적인 축복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던 터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목회자들도 공짜복음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이들이다. 천국의 자격을 확인하는 것은 심판대 앞에서 가능한 일이니, 부도수표를 남발하여도 현세에 처벌받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 땅에서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믿음이 부족하다느니 때가 덜되어서 그렇다느니 하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말로 때우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누가 하나님의 대언자(?)인 목사에게 어깃장을 놓으며 딴죽을 걸겠는가? 그래서 적당한 교회규모의 담임목사만 되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쩝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성경은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그야말로 보증수표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욕구가 채워져서 얻어지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평안인데 반해서, 예수님이 주는 평안은 절대적인 평안을 말하고 있다. 이 평안은 어떤 환경과 상황이든지간에 상관없이 평안이 주어지게 된다. 그래서 당신은 이러한 평안을 일상의 삶에서 누리고 계신가? 솔직히 말해보자. 없다면 없는 것이다. 없는데도 있다고 우기니까,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왜 다른 사람에게 거저 주는 평안을, 당신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이유를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평안을 얻는 조건을 말하기 전에, 예수님이 말하는 평안을 누리는 성경의 위인들의 삶을 한번 살펴보겠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행12:1~7)
위의 말씀은 초대교회에 행해진 헤롯의 박해를 기이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헤롯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여서 유대인의 환심을 산다. 그들의 칭송에 어깨가 으쓱해진 헤롯은, 당시 초대교회의 최고지도자인 베드로를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다음날 처형할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베드로는 잡혀서 심한 매질 끝에, 다음날이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절박한 운명에 놓여 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베드로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피곤에 곯아 떨어졌는지,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워도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니, 내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끔찍하게 처형당할 운명인데, 당신 같으면 잠이 오겠는가? 온갖 두렵고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혀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베드로는 마치 자기 집 안방에서 자는 것처럼 쇠사슬을 칭칭 동여매고 쿨쿨 잠을 자고 있다. 그의 마음은 아무런 두려움이나 걱정이 없다는 증거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야고보사도처럼 내일 죽을 수도 있고, 아니면 천신만고 끝에 살아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더 이상의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자신의 상황을 제삼자 관찰자 입장에서 지켜보는 묘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배짱은 어디서 나왔는가?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6:3,4)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은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제자들과 성령이 내주하는 간절한 기도 끝에 성령이 임재한 사건을 당신도 아실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초대교회에 새로 입교한 교인들에게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훈련을 열심히 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이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위의 사건을 살펴보자. 사도들은 새로 입교한 사람들의 구제에 대한 형평문제로 골머리가 아파지자 새로운 집사들을 세우면서, 자신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선포를 하고 있다. 여기서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쓰다’는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룬테스’는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120여명의 제자들과 기도했던 모습과 동일한 단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이 헬라어 단어는 초대교회에 입교한 새신자에게 기도훈련을 시키는 단어와도 동일하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평소에도 얼마나 기도에 힘썼는지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최고지도자가 되어 폼 나는 인생을 살아갔지만, 그의 인생이 순탄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우리도 잘 아는 상황이다. 유대교와 로마당국에 의해 초대교회에 가해진 박해가 얼마나 끔찍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와중에서도 평안하게 살면서 사역을 훌륭하게 마치고 이 땅을 총총히 떠나갔다. 그가 누린 평안은 성령과 동행하는 기도의 습관을 통해서였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네 교회는 그런 평안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천국복음을 헐값에 팔고 사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천국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이 천국복음을 판다고하니, 기가 차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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