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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비밀

Joyfule 2019. 2. 23. 18:01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비밀



엊그제 각종 언론에는 문재인대통령이 북한으로 날아가서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을 만났다는 기사로 도배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직접 만난 북한 주민들의 휘둥그레 한 시선도 기사거리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직접 만나서 악수를 한번 하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요 평생 잊지 못할 놀라운 사건일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일국의 대통령이라도 5년이 지나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며, 그 권한도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국민이 위임해준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대통령과 악수한 손을 영광스럽게 여겨서 씻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세상을 지으시고 우주를 운행하시고 대자연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서 평생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엄청난 일이 아니겠는가?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바로 성경의 위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며, 놀라운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다가 이 땅을 떠나 천국에 입성하였다.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가? 그러나 기이하게도, 우리네 교회에서는 1분짜리 영접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들어오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이다. 들어오셨다고 믿으면 되는 것으로 더 이상 말이 없다. 말하자면 벌거숭이 임금님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영성학교는 아니다. 이곳은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훈련 사역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떤 비밀을 가졌는지 살펴보고 싶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29:13)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4:29)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은 다름 아닌, 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두루 다니시며, 자신을 전심으로 찾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능력을 주시어서 자신의 일을 맡겨주시며 사역자로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당신이 해아 할 것은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다하여 찾고 부르기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쉬운 방법을 그동안 우리네 교회에서 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산속에 들어가서 목이 터지라고 하나님을 부른 사람도 있었고, 여러 날 동안 하나님을 끈기 있게 불렀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이전의 기도방식으로 되돌아오거나 기도하는 것을 그만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거짓이었는가? 그렇게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그동안 교회에서 하지 않는 낯선 기도방식인, 소위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을 성경에 소개하고 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22:32~30)

 

여기 하나님을 만나서 겨루어 이긴 기이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하도 유명해서 당신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바로 야곱이다. 야곱은 자신과 가족들이 형 에서의 분노로 멸절의 위기에 처할 때, 모든 가족을 먼저 보내고 밤새도록 하나님의 이름을 절박하게 부르며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기도로서 기어이 하나님의 허락을 얻어냈다. 그가 어떤 태도로 기도했는지는 하나님의 답변을 보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겨루어 싸워 이겼다는 표현에 주목해보라. 그동안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를 한 사람들이 과연 야곱처럼 절박하게 하나님을 애타게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의 잣대에 의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서 하나님을 만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소개하겠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12~14)

 

위의 사건도 너무도 유명해서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는 명령에 따라, 사도들과 120여명에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올라가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불러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했던 사건이다. 이 때 사도들과 제자들이 어떤 기도를 했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를 했을 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태도로 기도했느냐고? 성경에는 전심으로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역개정판 번역 바로 전에 사용했던 개역한글판에는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썼다라고 번역하였다. 전심으로 기도했다거나,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썼다거나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전심으로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해서 그들도 역시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들이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스데반집사나 빌립집사가 바로 그들이다. 사도들과 120여명의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이 기도훈련을 통해 제자가 되었던 수많은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전심으로 부르는 기도를 통해 성령이 동행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300여년이 흘러서, 로마황제가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자 하나님을 전심으로 부르는 기도는 교회에서 사라져 버렸다. 대신 예배의식과 종교의식 그리고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로 채워졌다. 그리고 2000여년이 흘러서 외국선교사들의 피땀 흘린 선교로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들어왔고, 드디어 우리도 예수를 믿는 크리스천이 되었다. 그러나 1분짜리 영접기도로 성령이 들어오시며,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간편하고 손쉬운 구원론이 우리네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성경의 위인들에 불과하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자의 교단교리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네 교회에서는, 그들이 가르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무능하고 무기력한 믿음으로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하나님의 종으로 인생을 하나님의 사역에 바쳤다는 목회자들조차 사정이 다르지 않다. 집을 담보로 시작한 개척교회는 목회자부부의 눈물 속에 속속 문을 닫고 있으며,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빈곤층에 허덕이고 있고, 기독교는 개독으로 목사는 먹사로 불리며 세상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사라진 교회는 청소년과 젊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으며, 교회는 늙은 교인들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100년이 채 되기 전에, 텅텅 비어버린 유럽의 교회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 불 보듯 환하다. 만약 베드로와 120명의 제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간증을 직접 듣게 되었다면, 지금처럼 크리스천들이 이 기도를 간과하며 무심하게 여기겠는가? 어쨌든 이 기묘한 시기에, 영성학교가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훈련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게 기이하지 않는가?

 

아시다시피, 영성학교의 기도훈련을 필자가 18년 전에 시작했던 기도의 방식을 그대로 훈련하는 것이다. 필자의 뒤를 따라 아내가 이 기도를 시작하였고 영성학교가 문을 열자 코치진들과 동역자 그리고 많은 식구들이 기도훈련에 동참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다. 필자가 인정하는 성령의 사람은,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제자들처럼 귀신을 쫓아내며 고질병을 고치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이 내주하심을 증명해보여야 한다. 지금까지 천명의 사람들이 영성학교를 찾아왔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기도훈련을 시도하였으며, 여러 달이 지나서 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하는 증거가 나타나서 졸업을 하였으며 지금까지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경험하였다. 귀신이 쫓겨나가고 정신질환과 고질병이 치유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성령의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전심으로 기도하지 않아서이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신을 향하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능력을 베푸실 거라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이 성취된 사람들이 바로 성경의 위인들이다. 필자도 10년의 기도 후에, 성령께서 필자가 죽기 살기로 하나님을 찾았다고 인정해주셨고, 천 번의 넘는 기적을 경험하게 해주셨으며 지금의 기도훈련 사역을 맡기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일까? 사도들과 120명의 제자들을 초청하여 간증을 듣는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참에 필자가 과거에 어떻게 기도했는지 말씀드리겠다. 이런 간증은 이전에도 기회가 날 때마다 말씀드렸지만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자칫하다가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게 아니라, 필자가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으로 변질되어 필자의 의를 드러내는 죄를 범할 수도 있으며, 과거에 하나님께서 필자의 기도를 인정해주신 사실이 현재까지 유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위험과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필자의 과거사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전심으로 기도하는 구체적인 태도를 배워서 자신의 기도에 적용하여 성령의 사람이 되는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여러 번 말씀드렸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겠다. 성경에서 발견한 기도의 태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와 전심으로 기도하라 였다. 그래서 필자는 이 두 가지 태도를 삶에 그대로 적용하기로 했다. 필자는 당시 아내와 식당가와 재래시장을 돌면서 저가화장품 방문판매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자동차 안이거나 일터에 있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하나님을 부르려고 애썼다. 운전할 때는 항상 입에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불렀으며, 일터에서도 틈만 나면 하나님을 불렀다. 추울 때는 자동차 안에서(재정적인 이유로 히터나 에어컨을 틀수가 없었음) 오리털 옷을 껴입고 솜옷을 무릎담요를 삼아서 기도했으며, 여름에는 가로수 그늘에 깔판을 깔고 좌식의자를 차에 비치하고 꺼내어 길거리에서 기도했다. 소음에 시달렸으므로 수영용 귀속마개를 끼고 기도하였고, 밤에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눈부심을 방지하기 위해 안대를 끼고 차안에서 기도했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사건을 경험하기도 했다. 차 안에서 힘을 주고 손을 떨면서 기도하니까 차창으로 우연히 본 사람이 발작이나 쇼크 상태에 빠진 것으로 여겨 창문을 두드리기도 했고, 길거리 그늘나무 밑에서 깔판위에 앉아서 기도하니까 계룡산에서 도사가 눈길을 끌려고 한 것으로 여러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운동하거나 산책할 때, 혹은 병원에서 순서를 기다리거나 고객을 만나기로 해서 기다릴 때도 예외 없이 항상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소음이 심하고 시선을 빼앗기기 쉬운 번화가나 길거리에서 기도집중이 되는 기도를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이 기도하려고 애썼다. 조금이라도 긴 시간이 나면, 으레 조용한 곳으로 차를 이동해서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기도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기도하지 못하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도 했다. 아내와 시장에 가거나 백화점에 쇼핑을 가도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시키고 아내만 들여보내고 혼자 남아서 기도했다. 차 안에는 언제나 기도할 수 있도록 깔판과 좌식의자, 그리고 추운 겨울에는 두툼한 솜옷으로 무릎을 덮을 것들을 비치하고 있었다. 필자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그래서 많은 시간을 기도했다는 게 아니다. 사실 툭하면 주문 전화가 오거나 고객을 만나야하므로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기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짜투리 시간이라도 내서 기도하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은 사실이다. 일 년에 한번 여름휴가를 내어 부산의 처형을 방문해서도, 좌식의자(처음에는 좌식의자가 아니라 두툼한 베개 두 개를 쌓아서 허리를 기대었다. 그래서 아내가 이 베개를 가지고 가는 것을 아내가 무척 싫어했음)를 가지고 가서 평소와 다름없이 기도했다. 필자의 과거사를 말씀드리는 요지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기도하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사람을 만나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도 안 만나고 좋아하는 일도 끊고, 친척들은 물론 형제들조차 만나지 않고 지냈다. 집중을 하고 기도하든,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도하든 그게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22:37,38)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8:17)

 

영성학교에 찾아와서 기도훈련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필자가 과거에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아직도 성령께서 찾아오시지 않는 이유는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찾아오려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고,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게 죄라고 콕 집어서 말씀하셨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조차 습관을 들여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쉴 공간도 집도 없으셨으며 광야에서 이슬을 맞아가며 기도하셨다. 이렇게 기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를 가르치지도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인지를 곱씹어보시라. 성경을 질리라고 믿는다는 크리스천조차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왔던 기도의 방식은 아무도 찾지 않는 비밀이 되어버렸다. 기이하고 섬뜩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