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선교사 베어드(배위량)
부산, 대구, 서울, 평양을 이은 선교사
윌리암 베어드는 1862년 미국 인디애나에서 출생하여, 1885년 하노버대학과 1888년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하노버대학에서 철학박사(1903)와 신학박사(1913)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선교사역을 하면서 가진 1926년 네 번째 안식년 휴가 때 시카고대학, 히브리대학, 프린스턴신학대학 등에서 연구하기도 했던 학구파 선교사였다.
베어드의 선교 활동은 크게 초기 영남 지역 전도활동과 후기 평양의 교육 사업으로 구분할 수 있다. 1891년 한국에 들어와 부산을 선교 구역으로 배정받은 베어드는 1896년까지 경상도 지역을 순회하며 대구에 선교지부를 개척했고, 이후 서울을 잠시 거쳐 1897년 평양으로 자리를 옮겨 숭실학당을 세우고 교육 사업에 헌신했다. 1916년 숭실대학장을 사임한 뒤에는 교재 발간과 번역 등 문서선교에 치중하였다.
경부선과 경의선을 잇듯이, 부산에서 시작해 대구와 서울을 거쳐,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에서 선교사역을 만개시킨 사람이었다.
평양의 마펫, 영남의 베어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서울 이외의 선교지부 개척을 토론하여 북부지방에는 평양을, 남부지방에는 부산을 그 대상지로 선정했다. 베어드보다 1년 앞서 한국에 온 마펫은 베어드와 하노버 대학과 맥코믹신학교에서 8년 동안 같이 공부한 가장 친한 친구 사이였다. 베어드는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있었지만,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 박사가 한국의 남부지역 개척을 간곡히 요청해 한국 땅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로써 맥코믹사단의 마펫은 평양을 중심으로 서북지역 선교와 베어드는 부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부산에 둥지를 튼 베어드는 1893년부터 본격적인 순회전도에 나섰다.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와 함께 부산을 출발해 하루에 16-32km를 걸으며 밀양, 대구, 상주, 안동, 경주를 돌아 울산을 거쳐 부산에 돌아오는 496km의 긴 전도여행을 기꺼이 하기도 했다. 베어드 일행을 천주교 신자로 착각하여 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과 기독교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대게는 식사를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전도 책자를 사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베어드는 이런 기회를 이용해 기독교의 진리를 전했다.
이후에 대구, 상주, 경주, 안동 등지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방을 빈번하게 여행한 베어드는 경상 감영과 약령시藥令市가 있는 대구 지역이 정치, 상업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인구가 많고 교통이 편리해 선교지부로 적합하다고 생각해 선교지부 개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구 주민은 외국인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는데, 1891년에 이곳에 거주하던 프랑스 신부가 주민의 습격을 받았고 청주에서는 프랑스 신부가 살해된 역사를 갖고 있었다. 더군다나 내륙지방에 선교지부를 설치하는 것은 당대 한국정부의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어서 주한 미국공사 알렌도 대구 선교지부 설치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베어드는 1896년 마침내 대구 선교지부를 개척해 대구에 거주지를 구입했고, 지방관청의 승인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평양에 의지의 마펫이 있었다면, 대구엔 친구 베어드가 있었던 것이다.
베어드는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1891년 베어드가 부산진에 한옥을 짓고 그 해 11월에 공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 몇 사람과 예배를 드림으로 경남지역 최초의 장로교회인 부산진교회를 시작했다. 1892년에는 이후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게 될 영선교회(현 초량교회)를 설립했고, 내륙지방을 여행하는 동안 양산 물금교회, 밀양 유천교회, 청도 화양교회, 영천 조곡교회(현 대창교회)를 세웠다.
교육사업으로의 부르심
베어드는 1896년 4월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해 본격적인 영남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베어드는 서울선교지부 교육 담당 고문으로 발령이 나서 대구 선교를 처남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 안의와)에게 인계하고 대구를 떠났다.
교회가 빠르게 성장해 전도자를 훈련할 교육기관에 대한 요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서울의 경신학당도 확장되어 당시 교장 밀러는 학교 사역에 경험이 있는 베어드를 선교부에 추천해 그를 초대하였다. 교육사업과 함께 베어드는 첫 휴가를 떠난 마펫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많은 시간을 평양을 비롯한 북쪽 지방 복음전도 사역에 할애했다. 그런데 북쪽 지방의 전도여행은 영남지방과는 달랐다. 그는 평양과 한국의 최 북단이자 북쪽 관문인 의주지역을 순회하며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교회로 조직될 준비가 되어 있는 여러 모임을 발견했으며, 여행 중에 교인이 되려는 후보자를 문답하고 세례를 주었다. 심지어 의주와 압록강을 넘어 중국까지 들어가 복음과 생명을 나누었다. 베어드는 평양과 이북지역에서 교육사업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고 이듬해 평양으로 옮겨 숭실학당을 시작으로 학교건립에 힘을 썼다.
평양 숭실학교
1897년 10월 베어드의 사택에서 13명의 학생을 모아 학교를 시작한 학교가 바로 숭실학교이다. 이 땅에 예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참된 교사와 교역자 양성을 설립 목적으로 중등교육기관으로 문을 연 숭실은 1900년에 수업 연한 5년으로 하는 정식 중학교 과정을 운영했고, 1904년 마침내 세 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이 땅에 고등교육 출범의 단초를 열었다. 이때 배출한 첫 졸업생을 대상으로 1905년 가을학기부터 대학과정의 교육을 시작하였다. 1906년 9월 15일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합동으로 학교경영에 참여한 가운데 숭실에 대학과를 설치하여 12명의 학생을 1, 2학년으로 운영하였다. 교명은 ‘Union Christian College’(합성숭실대학)이었는데, 이로써 숭실은 우리나라에서 정규 대학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베어드는 한국에 온 지 40주년을 맞은 1931년에 장티푸스에 걸려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전염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보건법에 따라 화장되어, 평양 숭실학교 구내에 안장되었다.
“멀리멀리 갔더니”
베어드의 아내 애니 베어드 부인(Annie L. A. Baird, 안애리)은 평양을 중심으로 여성사업, 문서전도, 육영사업에 헌신했고, 평양 외국인 학교, 여자 성경학교, 숭의여학교 교사와 교장을 역임했다. 평양외국인학교는 1899년 베어드 부인의 자택에서 자모회 모임으로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발전해 다음 해에 6명의 어린이를 모아 마펫의 사택에서 학교를 시작하였다. 초등과정으로 시작한 평양외국인학교는 1903년부터 고등과정으로 개편되었고 1914년에는 기숙사를 개설하였다. 한국에 내한한 선교사의 수가 상당히 증가하여 1935년에는 이 학교에 425명의 재학생이 있었다.
애니 베어드 부인은 찬송가 440장 ‘멀리 멀리 갔더니’ 창작을 비롯하여 한국 찬송가 번역과 편집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평양에서 1916년 6월 9일에 별세하였으며 양화진 제2묘역에 기념비가 있다.
베어드의 두번째 부인 로즈Rose M. F. Baird, 배로사는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교사로 성경과 미술을 강의하고 1937년부터 1942년까지 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직했으며, 성서 출판위원과 성서번역에 공헌하였다.
베어드의 아들 베어드 2세(William M. Baird Jr., 배의림)는 1923년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황해도 재령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고, 리차드 베어드(Richard H. Baird, 배의취)는 1923년 내한하여 강계에서 산간벽지를 순회 전도하고 강계성경학교 교장으로 봉직했다. 부인의 병으로 1941년에 귀국했다가 1957년에 한국에 다시 입국하여 북장로회 한국 선교부 총무로 섬겼다. 리차드는 부친의 한국 선교 활동을 적은 책 William Baird of Korea: A Profile by Richard H. Baird(1968)를 출간했으며, 이 책은 2004년에 《배위량박사의 한국선교》로 번역되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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