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선교사 캠벨
남편과 두 자녀를 잃고서
조세핀 캠벨은 1853년 미국 남부 텍사스 웨이코Waco에서 출생해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9살 때 캘리포니아주로 이동하여 로스앤젤레스 인근에서 자랐다. 21살이 되던 1878년 캠벨A. M. Campbell목사와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그러나 둘째 아이를 낳은 후 조지아 주 애틀랜타로 오는 길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둘째 아이를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먼 여정으로 인해 남편의 건강도 악화되어 남편 역시 곧이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캠벨은 딸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으나, 2년 후 딸마저 성홍열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중국과 한국에서
5년간의 짧은 결혼 생활 동안 모든 가족을 잃어버린 캠벨은 자신의 남은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 공헌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중국 선교사로 나가기로 한 캠벨은 먼저 시카고에 있는 간호사 양성소에 들어가 간호사 교육을 받은 후, 1887년 봄에 중국 선교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선교지 중국에서 남감리회 해외 선교부 소속 리드 박사의 부인과 자신의 사역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은 로라 헤이굿Laura A. Haygood을 만났다. 캠벨은 상해와 쑤저우蘇州에서 10년간 학교의 음악 교사로, 여성 병원의 보조자이자 관리자로, 복음 전도자로 다양한 분야에서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요한복음을 중국 쑤저우 방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미국 남감리회는 1895년 한국선교를 결정하였다. 이에 1897년 남감리회 해외 여선교부는 10년 동안 중국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캠벨을 한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이에 캠벨은 1897년 10월 7일 남감리회 해외여선교부 첫 정식 선교사 자격으로 중국에서 얻은 수양딸 여도라余小姐와 함께 45세 중년의 나이에 한국에 들어왔다. 여도라는 정식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캠벨이 추진하는 선교사업에 훌륭한 조력자로서 선교사 이상의 활약을 보인 위대한 신앙의 여성이었다.
자골 선교지부 개척과 배화학당의 설립
1897년 10월 7일 인천에 도착한 캠벨과 여도라는 이틀 후인 10일 서울 용산에 도착해서 리드와 윤치호의 환영을 받았다. 캠벨은 이미 내한한 남감리회 리드 부부가 있던 남대문 안 남송현 선교지부 안에 정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캠벨은 남송현에 있던 선교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을 내었다. 남송현 선교지부가 시내 한복판에 잘 갖춰져 있지만, 스크랜튼이 세운 상동교회, 병원, 학교와 같은 언덕에 있어서 선교 지역이 중첩되고, 이로 인해 인력이 낭비되고 정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캠벨은 남송현 선교지부와 다른 곳에 별도의 선교 부지를 확보하고, 그곳에서 학교와 여성 선교를 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 결과 1898년 8월 1일 서울 북서부에 주로 궁에 드나들던 내시들이 살던 ‘고가나무골’, 속칭 자골지역인 지금의 종로구 내자동 75번지로 이주하게 되었다.
자골로 선교지부를 옮긴 후, 두 달 뒤인 1898년 10월 2일 캠벨은 6명의 학생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는 매일학교가 아닌 기숙학교의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한국인들은 이 학교를 ‘자골학당’이라 부르고, 선교사들은 학교 건물을 위해 헌금한 캐롤라이나 주의 선교사 자녀 연합회 어린이들을 기념하여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1903년 12월 조선 정부 학부대신의 정식 인가를 받을 때, 윤치호가 지어준 ‘배화학당’培花學堂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캠벨과 여도라의 노력으로 처음에는 한문과 한글밖에 배울 수 없었던 학당은 발전을 거듭해 1903년 교과 과정에 성경, 교리문답, 중국 고전, 수학, 지리학, 물리학, 영어, 한국고전, 논술, 그리고 산업 등을 포함했다. 특히 캠벨은 교육을 통한 선교를 구원에 이르는 수단으로 생각했기에 성경공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캠벨은 교육을 통해 더욱 훈련된 여성들을 배출하기를 원했고 이를 통해 기독교 가정을 만들고, 한국여성들이 사역자로 성장하여 활동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 실제로 배화학당을 졸업한 학생들은 결혼하여 기독교 가정을 꾸려가거나, 선교 현장에 투입되어 사역자로서의 귀중한 역할을 담당해 나갔다. 이처럼 학당은 사역자를 길러 내는 질적인 성장을 이뤄갔다.
자골교회 설립
1898년 리드를 도와 남송현 교회에서 설교하며 남송현 선교지부를 이끌었던 윤치호는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해 개혁을 추구하다 결국 좌천되어 원산의 덕원 감리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 서울을 떠났다. 1899년에는 리드가 부인이 병 치료를 위해 고국으로 귀환하였다. 윤치호와 리드 가족이 떠나면서 남송현의 선교사업은 침체에 빠졌다. 매일학교와 주일학교가 모두 폐지되고, 교회의 주일예배도 중단 위기에 처했다. 이에 캠벨은 침례교 선교부 소유였던 자골지역을 매입해 여선교부 부지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캠벨은 학당의 학생과 교사, 전도부인들을 위한 주일예배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자골교회의 시작이었다.
자골교회는 여선교부 안에 설립된 배화여학교 기도실에서 여성들이 시작한 교회이다. 창립예배 때 하디가 설립자로 창립 설교를 했으며 초대 담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00년 9월 연회에서 서울을 담당했던 하디를 원산선교 책임자로 파송했으며, 무스James R. Moose가 한국지방 장로사로 임명되면서 서울을 담임하게 되었지만, 한국 선교 전체를 관리하는 지방 장로사라는 직책상 자골교회 목회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캠벨은 실질적인 자골교회의 담임 사역자로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자골교회는 매 주일 60-70명이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발전해 급기야 예배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고 새로운 예배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01년의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기념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자골교회의 성장에는 여도라, 김세라, 백루이시 같은 전도부인들의 역할이 컸다. 전도부인은 성경반과 성서학원 등의 과정을 마친 뒤, 여 선교사나 선교사 부인의 조력자로 채용되었다. 이들은 당시 외부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들을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이들이 복음에 흥미를 갖고 전도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캠벨과 전도부인의 노력으로 자골교회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다.
죽음도 한국에서
한국에 온 첫 남감리회 여선교사로서 많은 사역을 감당해오던 캠벨은 1918년 고국인 미국으로 세 번째 휴가를 떠났다. 캠벨은 휴가 중에도 한국선교를 위해 강연을 다니고, 후원자를 모집하고, 함께 사역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특히 캠벨은 한국 여성들이 참혹한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한국 여성들을 위한 새로운 사업들을 구상했다. 한국 여성들에게 양계업養鷄業과 양봉養蜂을 가르치는 것도 준비했다. 특히 양봉업은 한국에서 특별히 큰 수요를 갖기 때문에 이 사업을 통해 한국 여성들이 더 나은 경제적 상황을 갖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비교적 건강했던 캠벨은 1918년 발목 부상으로 수술을 받은 후, 다시 급성 감염질환인 디프테리아를 앓으면서 심장이 약해졌다. 먼 여행을 하기에는 위험하고, 오히려 집에서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캠벨은 한국에서 몇 년 더 헌신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캠벨의 건강을 염려한 지인들은 만류했지만, 캠벨은 “나는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한국에 가서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말하고 주변의 만류를 물리치면서 1920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원하던 한국에 돌아온 캠벨은 4개월 후인 1920년 11월 12일 하늘의 부름을 받아 양화진에 묻혔다.
배화여고에는 옛 배화학당 건물과 생활관, 1926년 건립된 캠벨기념관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2008년 배화학원 창립 110주년 및 대학 개교 30주년을 맞아 캠벨의 흉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흉상 옆에는 1995년 리드의 내한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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