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 아이레스 - 해피 투게더 春光乍洩
감 독 : 왕가위
주 연 : 장국영, 양조위, 장첸 ...
줄거리...
홍콩이든, 홍콩의 정반대 쪽에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수밖에
없는 청춘들. 95년 5월 1일 보영(장국영), 요휘(양조위)는 홍콩을 떠나 아르헨티나에 도착한다.
두사람은 보영이 사온 전등속의 폭포를 찾아 여행한다. 곧게 뻗은 고속도로, 저멀리 보이는 지평선,
그러나 낡은 자동차는 고속도로에서 고장나고 두사람은 폭포에 이르지 못한채 헤어진다.
남미의 파리로 불려지는 화려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뒷골목 빈민가의 작은 바(bar)에도,
밤이 되자 손님들이 모여들고 흥겨운 탱고판이 벌어진다. 그 곳의 도어(door)맨 일을 하는
양조위와 바에 오는 손님들의 춤상대를 하는 장국영은 이곳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음지에서
생활하는 떠돌이 이방인이다. 빈민가 낡은 호텔의 침실에서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게이의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다.
해피투게더에 등장하는 장국영과 양조위는 그들의 뿌리를 떠나 부유하는 이방인이다.
그들은 지구상에 홍콩의 정반대 위치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서에서 사랑을 하고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결국은 서로를 떠나간다. 이 남미의 황량한 오지야말로 철새처럼 구름처럼
부유하는 행려자ㆍ이방인들에게 있어 시한부의 아늑하지만 불안정한 휴식처이기 때문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모사되는 축구는 아르헨티나에서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스포츠다. 영화속에서도
축구와 관련된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요휘와 장(장진/張震)은 이따금 식당 뒷편의 골목길에서
다른 종업원들과 어울려 축구를 한다. 골목길에서 동네 축구를 하는 요휘는 언듯보면 낯선 도시에서의
새활에 나름대로 잘 적응해 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조로운 일상의 무료함을 순간적을
달래는 의식적인 몸부림에 불과하다. 축구경기장에서 관중들이 모두 열광하는 가운데 요휘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낯선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인 그는 스포츠 경기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일
뿐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겉돌고 있을뿐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언제 떠나고 언제 돌아올 지 모른다. 이별도 만남도 모두 이 안에 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생기는
아픔조차 감독은 시한부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보낸다. 해피투게더를 영화의 제목이자 배경으로
사용한 감독의 의도도 이들의 방황과 분리가 반드시 아픔이나 슬픔만이 아닌 행복한 내일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보영과 요휘는 사랑하는 사이다. 홍콩을 떠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도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보영은 철 없이 굴며 떠나고, 요휘는 상처받으며 기다린다. 대만 청년 장은 요휘 곁에서 위로한다.
이들이 항상 지니고 있는 의무감은 슬픔을 묻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고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뇌까린다. 가끔은 반대편 홍콩의 일도 궁금해한다.
작품해설
<열혈남아>, <아비정전>, <동사서독>, <중경삼림>, 그리고 95년의 <타락천사>등,
전작 5편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세계와 이른바 '왕가위 감독 스타일'을
창조해 이후의 모든 영상매체의 기술적 흐름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씨네아스트
왕가위. 세계 초유의 아트디렉터로서 전세계 영화인 및 그의 매니아들의 주목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는 그의 차기작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제 50회 깐느 영화제에
<해피투게더>라는 제명으로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전통적인 장르영화의 속성인 기승전결의 완결된 형식을 파괴해 온 왕가위는 열려 있는
구성과 실험적인 카메라 각도로 늘 새로운 영화적 구성과 화면을 창조해 각광받아왔다.
그는 그의 여섯 번째 작품 <해피투게더>에서 세계 최첨단의 디지틀 카메라가 연출한
총천연의 화면을 사용, 흑백과 칼라를 넘나드는 복잡한 구조 속에서 다양한 기호를
파생시키고 있다. 왕가위팀(촬영/두가풍, 미술/장숙평)은 <아비정전>이후 최상의
일치된 호흡으로 영화가 빛의 예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준다. <해피투게더>에서
그들은 공동으로 작업한 지금까지의 어떤 영화보다 아름다운 화면을 잡아내는데 칼러화면은
화려한 원색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미학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음울한
단조로운 색체의 화면들은 비극적 정서를 더욱 심화시켜 주고 있다. 왕가위의 다른 영화가
그렇듯이 해피투게더 역시 점프컷으로 부드러운 기승전결식의 이야기 구조를 벗어나 있어서
대중적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삶의 바닥까지 내려다보는 왕가위의 시선은 훨씬
성숙되어 있고 그 방법적 드러냄은 훨씬 독창적이다.
그 중 해피투게더가 주목받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점은 그의 전 작품이 홍콩의 중국귀속과
관련을 지닌다라는 정치적 독해가 가능하면서도 보편적 사랑문제를 다룬 영화로 보이는 것은
주제를 노출시킬 때 영화미학이 얼마나 피해를 입는지 잘알고 있는 감독의 역량 때문이다.
이 영화 안의 사랑은 성별과는 무관한 사랑이다. 왕가위는 사건에 관한,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관한 빗겨가고 놓쳐버린 감정들을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왕가위는 항상 그의 영화에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인간관계 내에서의 의사소통의 단면을 그려내 왔다. 그는 온갖 종류의 엇갈리고 비껴 가는
감정의 층을 예리하게 들여다보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제시한다. 그러기에 퇴폐적이고 충격적인 동성의
사랑을 그렸을 거라고 생각하는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실망할 것이다. 물론 감독은 자기 작품에
대한 해석을 관객 각자에게 맡긴다. 그러나 애초에 감독은 이 영화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낭만'과 '당사자들 외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죽음의 과정'을 그리고 싶어했고, 당연히 이러한 사랑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만이 아니고 동성들 사이에서도 모두 일어날 수 있는 것임을 영화를 접한 관객들은 결국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해피투게더>가 고독과 좌절 그리고 사랑과 이별에 관해서 다른 영화들과의 차이는 영화 분위기에 적중한
음악의 선택 때문이다. 또한 인물들의 내면을 드러내 보여주는 아름다운 상징들이 보석처럼 박혀있다.
공중촬영으로 잡아낸 이과수 폭포의 거대한 물보라나 고속촬영으로 영상화된 도시의 야경, 땅끝의 등대등은
세 인물들이 만나고 헤어지며 겪게되는 심리적 갈등을 보여주기 위한 뒷 배경으로 사용된다.
왕가위는 화려하고 독특한 영화의 외양을 통해 비로소 그 속에 가려진 본질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탁월한 스타일리스트다. 이는 다른 기교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현란한 속도와 이미지 변조는 평범함에
대한 거부이면서 홍콩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해석이었다.
<해피 투게더>는 신비화의 혐의를 안고 있다. 여기서의 '신비화'란 <해피투게더>란 영화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각도에 볼 때에 새로운 독법이 가능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홍콩의 정 반대편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촬영화면에 담아내면서 그의 영화언어는 홍콩과 무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영화는
홍콩을 통해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방랑자의 모습,이상향을 찾아 헤매는 도시 방랑인의 모습을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보영이나 요휘,장진이 모두 자신의 근거지인 홍콩과 대만을 떠나서 이상향을 찾아서 방황하는 도시의 방랑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 스스로도 시대의 기호가 된 왕가위는 많은 문화적 기호를 즐긴다. 아르헨티나의 정열, 뜨거운 색조,
이과수 폭포, 탱고와 음악, 축구의 열광 등이 영화 곳곳에 있다. 이런 것들은 현대문화의 이상향을 의미하는 표지인 것이다.
왕가위는 이런 기호들의 배치를 통해 공간의 신비화를 자신이 직접 응용하면서 거꾸로 홍콩의 공간을 생각하게 한다.
수많은 억측과 오해가 난무하면서 실체와 관련 없이 동떨어져 낯설게 표류하며 소비되던 홍콩의 이미지들에 대한 반사 의도인 것이다.
영화(해피투게더)에는 저속 촬영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경이 두차례 나온다. 한번은 밤의 풍경이고
또 한번은 낮부터 밤까지의 도시 경관의 변화를 담은 풍경이다. 가운데 우뚝 솟은 탑, 빠르게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물결, 현란한 도시들의 불빛들, 이것들은 도시에서 떠도는 청춘들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는
듯이 언제나 그모습 그대로 변함없다. 하지만 이 화려한 도시, 흥청거리는 도시 부에노스아리에스에서
이방인으로 떠도는 청춘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헤어날 수 없는 무한회귀의 과정에 빠져있는것만은 아니다.
어떤 이유든 홍콩에서, 대만에서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출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세계의 끝을 확인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바(bar)에서 쫓겨난 요휘는 중국식당
중앙반점의 주방에 취직한다. 거기서 대만에서 온 장을 만난다. 때가되면 집으로 가겠다는
장은 우슈아이아 등대에 들렀다가 대만으로 돌아간다. 1997년 2월 20일 요휘도 홍콩으로 돌아가기전
대만에 들른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장은 대만으로, 요휘는 홍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현실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처연한 사랑, 그리고 그것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삶의 또다른 한 측면을 화면위로 드러내는 감독의 시선이 있을 뿐이다. 영화를 끌고 가는
세 인물들의 관계를 홍콩의 중국 반환에 따른 중국인들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정치적 해석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 영화적 독법은 '중국'은 '장국영', '홍콩'은 양조위를, '대만'은 장진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의도적 배치 때문에 설득력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해피투게더를 단순히 정치적 코드로만
읽어내는 것은 이 영화를 동성애로만 보는 것과 똑같이 참으로 안타까운일이다.한편으로는
왕가위감독의 영화를 홍콩이 방랑자(여행자)의 천국이라는 배경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홍콩과 대만에서 온 보영과 요휘, 장은 낯선 나라의 낯선 도시에서 결코 '해피투게더'
할 수 없는 듯 하다. 오히려 영화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해피투게더' 하지 않았던
기억들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해피투게더'는 미래에는 '해피투게더'
할 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을 말한다. 낯선 이국땅에서 떠돌았던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함으로써 어디에서도 뿌리 내리지 못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이런 의미에서 영화 '해피투게더'는 홍콩의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이다.
홍콩의 정반대편인 아르헨티나까지 홍콩인들로 하여금 이상향을 찾는 방랑의 여행을
떠나게 해서 결국은 양조위로 하여금 대만을 거쳐서 돌아오게 하는 '해피투게더식 여행'은
기존의 왕가위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방랑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단순히 현대인의 방황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 주목된다.1997년 2월 20일에
요휘가 홍콩을 들어오기 전에 대만을 방문한다거나 1997년 5월에 개봉한 점 등의
'기한설정'이나 중경삼림에서의 기한이 설정된 통조림에 연연하는 223 호 사복경찰의 모습,
5세때 유통기한이 지난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은후 말을 잃어버린 하지무(金城武)의 이상행동 등은
홍콩의 중국귀속이라는 기한설정을 통해서 기한을 두고 또 다른 이상향을 찾아 방랑의 길을 떠나기를
모색했던 사람들이나,홍콩을 떠나고는 싶어도 떠나지 못해서 불안해 했던 홍콩인들의 특수한
사회성과 정체성의 혼돈을 실어낸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감 독 : 왕가위
주 연 : 장국영, 양조위, 장첸 ...
줄거리...
홍콩이든, 홍콩의 정반대 쪽에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수밖에
없는 청춘들. 95년 5월 1일 보영(장국영), 요휘(양조위)는 홍콩을 떠나 아르헨티나에 도착한다.
두사람은 보영이 사온 전등속의 폭포를 찾아 여행한다. 곧게 뻗은 고속도로, 저멀리 보이는 지평선,
그러나 낡은 자동차는 고속도로에서 고장나고 두사람은 폭포에 이르지 못한채 헤어진다.
남미의 파리로 불려지는 화려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뒷골목 빈민가의 작은 바(bar)에도,
밤이 되자 손님들이 모여들고 흥겨운 탱고판이 벌어진다. 그 곳의 도어(door)맨 일을 하는
양조위와 바에 오는 손님들의 춤상대를 하는 장국영은 이곳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음지에서
생활하는 떠돌이 이방인이다. 빈민가 낡은 호텔의 침실에서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게이의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다.
해피투게더에 등장하는 장국영과 양조위는 그들의 뿌리를 떠나 부유하는 이방인이다.
그들은 지구상에 홍콩의 정반대 위치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서에서 사랑을 하고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결국은 서로를 떠나간다. 이 남미의 황량한 오지야말로 철새처럼 구름처럼
부유하는 행려자ㆍ이방인들에게 있어 시한부의 아늑하지만 불안정한 휴식처이기 때문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모사되는 축구는 아르헨티나에서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스포츠다. 영화속에서도
축구와 관련된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요휘와 장(장진/張震)은 이따금 식당 뒷편의 골목길에서
다른 종업원들과 어울려 축구를 한다. 골목길에서 동네 축구를 하는 요휘는 언듯보면 낯선 도시에서의
새활에 나름대로 잘 적응해 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조로운 일상의 무료함을 순간적을
달래는 의식적인 몸부림에 불과하다. 축구경기장에서 관중들이 모두 열광하는 가운데 요휘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낯선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이방인인 그는 스포츠 경기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일
뿐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겉돌고 있을뿐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언제 떠나고 언제 돌아올 지 모른다. 이별도 만남도 모두 이 안에 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생기는
아픔조차 감독은 시한부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보낸다. 해피투게더를 영화의 제목이자 배경으로
사용한 감독의 의도도 이들의 방황과 분리가 반드시 아픔이나 슬픔만이 아닌 행복한 내일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보영과 요휘는 사랑하는 사이다. 홍콩을 떠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도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한다.
보영은 철 없이 굴며 떠나고, 요휘는 상처받으며 기다린다. 대만 청년 장은 요휘 곁에서 위로한다.
이들이 항상 지니고 있는 의무감은 슬픔을 묻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고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뇌까린다. 가끔은 반대편 홍콩의 일도 궁금해한다.
작품해설
<열혈남아>, <아비정전>, <동사서독>, <중경삼림>, 그리고 95년의 <타락천사>등,
전작 5편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세계와 이른바 '왕가위 감독 스타일'을
창조해 이후의 모든 영상매체의 기술적 흐름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씨네아스트
왕가위. 세계 초유의 아트디렉터로서 전세계 영화인 및 그의 매니아들의 주목을
받으며 활동하고 있는 그의 차기작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제 50회 깐느 영화제에
<해피투게더>라는 제명으로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전통적인 장르영화의 속성인 기승전결의 완결된 형식을 파괴해 온 왕가위는 열려 있는
구성과 실험적인 카메라 각도로 늘 새로운 영화적 구성과 화면을 창조해 각광받아왔다.
그는 그의 여섯 번째 작품 <해피투게더>에서 세계 최첨단의 디지틀 카메라가 연출한
총천연의 화면을 사용, 흑백과 칼라를 넘나드는 복잡한 구조 속에서 다양한 기호를
파생시키고 있다. 왕가위팀(촬영/두가풍, 미술/장숙평)은 <아비정전>이후 최상의
일치된 호흡으로 영화가 빛의 예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준다. <해피투게더>에서
그들은 공동으로 작업한 지금까지의 어떤 영화보다 아름다운 화면을 잡아내는데 칼러화면은
화려한 원색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미학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음울한
단조로운 색체의 화면들은 비극적 정서를 더욱 심화시켜 주고 있다. 왕가위의 다른 영화가
그렇듯이 해피투게더 역시 점프컷으로 부드러운 기승전결식의 이야기 구조를 벗어나 있어서
대중적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삶의 바닥까지 내려다보는 왕가위의 시선은 훨씬
성숙되어 있고 그 방법적 드러냄은 훨씬 독창적이다.
그 중 해피투게더가 주목받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점은 그의 전 작품이 홍콩의 중국귀속과
관련을 지닌다라는 정치적 독해가 가능하면서도 보편적 사랑문제를 다룬 영화로 보이는 것은
주제를 노출시킬 때 영화미학이 얼마나 피해를 입는지 잘알고 있는 감독의 역량 때문이다.
이 영화 안의 사랑은 성별과는 무관한 사랑이다. 왕가위는 사건에 관한,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관한 빗겨가고 놓쳐버린 감정들을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왕가위는 항상 그의 영화에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인간관계 내에서의 의사소통의 단면을 그려내 왔다. 그는 온갖 종류의 엇갈리고 비껴 가는
감정의 층을 예리하게 들여다보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제시한다. 그러기에 퇴폐적이고 충격적인 동성의
사랑을 그렸을 거라고 생각하는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실망할 것이다. 물론 감독은 자기 작품에
대한 해석을 관객 각자에게 맡긴다. 그러나 애초에 감독은 이 영화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낭만'과 '당사자들 외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죽음의 과정'을 그리고 싶어했고, 당연히 이러한 사랑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만이 아니고 동성들 사이에서도 모두 일어날 수 있는 것임을 영화를 접한 관객들은 결국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해피투게더>가 고독과 좌절 그리고 사랑과 이별에 관해서 다른 영화들과의 차이는 영화 분위기에 적중한
음악의 선택 때문이다. 또한 인물들의 내면을 드러내 보여주는 아름다운 상징들이 보석처럼 박혀있다.
공중촬영으로 잡아낸 이과수 폭포의 거대한 물보라나 고속촬영으로 영상화된 도시의 야경, 땅끝의 등대등은
세 인물들이 만나고 헤어지며 겪게되는 심리적 갈등을 보여주기 위한 뒷 배경으로 사용된다.
왕가위는 화려하고 독특한 영화의 외양을 통해 비로소 그 속에 가려진 본질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탁월한 스타일리스트다. 이는 다른 기교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현란한 속도와 이미지 변조는 평범함에
대한 거부이면서 홍콩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해석이었다.
<해피 투게더>는 신비화의 혐의를 안고 있다. 여기서의 '신비화'란 <해피투게더>란 영화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각도에 볼 때에 새로운 독법이 가능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홍콩의 정 반대편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촬영화면에 담아내면서 그의 영화언어는 홍콩과 무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영화는
홍콩을 통해 방황하는 현대인의 모습,방랑자의 모습,이상향을 찾아 헤매는 도시 방랑인의 모습을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보영이나 요휘,장진이 모두 자신의 근거지인 홍콩과 대만을 떠나서 이상향을 찾아서 방황하는 도시의 방랑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 스스로도 시대의 기호가 된 왕가위는 많은 문화적 기호를 즐긴다. 아르헨티나의 정열, 뜨거운 색조,
이과수 폭포, 탱고와 음악, 축구의 열광 등이 영화 곳곳에 있다. 이런 것들은 현대문화의 이상향을 의미하는 표지인 것이다.
왕가위는 이런 기호들의 배치를 통해 공간의 신비화를 자신이 직접 응용하면서 거꾸로 홍콩의 공간을 생각하게 한다.
수많은 억측과 오해가 난무하면서 실체와 관련 없이 동떨어져 낯설게 표류하며 소비되던 홍콩의 이미지들에 대한 반사 의도인 것이다.
영화(해피투게더)에는 저속 촬영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경이 두차례 나온다. 한번은 밤의 풍경이고
또 한번은 낮부터 밤까지의 도시 경관의 변화를 담은 풍경이다. 가운데 우뚝 솟은 탑, 빠르게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물결, 현란한 도시들의 불빛들, 이것들은 도시에서 떠도는 청춘들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는
듯이 언제나 그모습 그대로 변함없다. 하지만 이 화려한 도시, 흥청거리는 도시 부에노스아리에스에서
이방인으로 떠도는 청춘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헤어날 수 없는 무한회귀의 과정에 빠져있는것만은 아니다.
어떤 이유든 홍콩에서, 대만에서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출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세계의 끝을 확인하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바(bar)에서 쫓겨난 요휘는 중국식당
중앙반점의 주방에 취직한다. 거기서 대만에서 온 장을 만난다. 때가되면 집으로 가겠다는
장은 우슈아이아 등대에 들렀다가 대만으로 돌아간다. 1997년 2월 20일 요휘도 홍콩으로 돌아가기전
대만에 들른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장은 대만으로, 요휘는 홍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현실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처연한 사랑, 그리고 그것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삶의 또다른 한 측면을 화면위로 드러내는 감독의 시선이 있을 뿐이다. 영화를 끌고 가는
세 인물들의 관계를 홍콩의 중국 반환에 따른 중국인들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정치적 해석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런 영화적 독법은 '중국'은 '장국영', '홍콩'은 양조위를, '대만'은 장진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의도적 배치 때문에 설득력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해피투게더를 단순히 정치적 코드로만
읽어내는 것은 이 영화를 동성애로만 보는 것과 똑같이 참으로 안타까운일이다.한편으로는
왕가위감독의 영화를 홍콩이 방랑자(여행자)의 천국이라는 배경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홍콩과 대만에서 온 보영과 요휘, 장은 낯선 나라의 낯선 도시에서 결코 '해피투게더'
할 수 없는 듯 하다. 오히려 영화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해피투게더' 하지 않았던
기억들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해피투게더'는 미래에는 '해피투게더'
할 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을 말한다. 낯선 이국땅에서 떠돌았던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함으로써 어디에서도 뿌리 내리지 못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이런 의미에서 영화 '해피투게더'는 홍콩의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이다.
홍콩의 정반대편인 아르헨티나까지 홍콩인들로 하여금 이상향을 찾는 방랑의 여행을
떠나게 해서 결국은 양조위로 하여금 대만을 거쳐서 돌아오게 하는 '해피투게더식 여행'은
기존의 왕가위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방랑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단순히 현대인의 방황을 그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 주목된다.1997년 2월 20일에
요휘가 홍콩을 들어오기 전에 대만을 방문한다거나 1997년 5월에 개봉한 점 등의
'기한설정'이나 중경삼림에서의 기한이 설정된 통조림에 연연하는 223 호 사복경찰의 모습,
5세때 유통기한이 지난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은후 말을 잃어버린 하지무(金城武)의 이상행동 등은
홍콩의 중국귀속이라는 기한설정을 통해서 기한을 두고 또 다른 이상향을 찾아 방랑의 길을 떠나기를
모색했던 사람들이나,홍콩을 떠나고는 싶어도 떠나지 못해서 불안해 했던 홍콩인들의 특수한
사회성과 정체성의 혼돈을 실어낸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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