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경제 프리즘/허승호] 헛발질하는 재벌 개혁
허승호 논설위원
호텔신라는 요즘 고민이 깊다. 100% 지분을 가진 빵집 ‘아티제’의 영업을 그만두겠다고 발표했지만 출구가 마땅찮다. 아티제를 사회적 기업화하는 방안이 나왔으나 ‘호텔신라 주주에 대한 배임’이라는 지적 때문에 폐기됐다. 아티제 종업원들은 고용안정 때문에 외국 자본이나 대기업이 인수하기를 바라는 눈치다. 호텔신라는 “외자나 대기업은 배제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230명의 고용을 승계해 제대로 경영할 만한 국내 기업이 잘 안 보인다. 어쨌거나 이달에 협상 대상자를 정하고 다음 달 말까지 정리할 계획이라고 한다. 롯데의 ‘포숑’은 사정이 더 복잡해 과연 사업철수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급소 못 짚은 ‘재벌 빵집’ 논란
재벌이 빵집 영업에서 철수하면 동네 빵집의 매출이 올라갈까. 제과협회 관계자는 “아니다. 상품이나 타깃 고객이 골목 빵집과 다르다”고 말했다. 고급 빵에 대한 별개의 수요가 새로 형성됐다는 것이다. 이 수요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대기업이나 총수 일가가 빵집 같은 것을 하면 정말 안 되는 걸까. 롯데의 롯데리아, 두산의 버거킹, CJ의 뚜레쥬르, 신세계의 스타벅스, LG패션의 하꼬야도 시장에서 철수해야 하나.
최근 경제학자가 대부분인 한 공부 모임에 참석했다. 이날 주제는 ‘재벌 개혁의 올바른 방향’. 세미나 후반에 기자가 짧게 질문했다. “재벌 빵집에 대해서는 아직 얘기가 안 나왔는데… 재벌이 빵집을 하면 왜 안 되나요.” 모두 웃었고 답변은 없었다. e메일을 보냈다. ‘정말 설명을 듣고 싶어서 다시 여쭙습니다.’ 이제야 답신이 왔다. “소비자 이익을 경시하는 공급자 위주의 사고입니다.” “재벌에 대한 질시죠.” “파리에는 ‘포숑’ 같은 세계적인 빵 회사가 있으며, 초콜릿 값은 우리의 20배가 넘습니다. 재벌이 빵집 해서 세계적 기업이 되면 제2의 삼성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가 논리와 이성보다는 감정과 선동, 집단 히스테리에 빠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8건의 답변 중 7건은 ‘막을 이유가 없다’였고 1건이 “재벌의 진입은 중소 빵집을 도태시키면서 시장을 독점화할 우려가 있다”는 반대 의견이었다.
제빵업 문제가 본격적으로 꼬이게 한 것은 정치 쪽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재벌 2, 3세들은 취미로 할지 모르지만 빵집 처지에서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하자 공정거래위원회가 식품 등에 진출한 대기업 현황을 발표했다. 이어 제과업체 ‘보네스뻬’를 운영하는 롯데브랑제리를 조사했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재벌 때리기 경쟁을 하고 있다. 경제 민주화는 좋다. 하지만 ‘재벌 개혁’의 초점을 빵집에 맞추면 곤란하다. 문제의 핵심은 이익 몰아주기를 통한 세금 없는 부(富)의 세습, 소액주주 권리를 훼손하는 순환출자 등 소유지배구조, 유착, 담합, 후려치기다. 헛발질로 힘 빼지 말고 문제의 급소를 짚어야 한다.
재벌 ‘때리기’ 말고 진정한 개혁을
헛발질 사례를 하나 더 들겠다. 2001년 7월 정부는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대형마트 등의 셔틀버스 운행을 금지했다. 그러나 고객들은 시내버스 타고 재래시장에 가지 않았다. 승용차를 끌고 대형마트에 갔다. 한꺼번에 많은 상품을 운반할 수 있게 되자 손님당 구입액(객단가·客單價)이 23∼29% 늘어났다. 고객 차량도 1.8∼2배로 늘어나 마트 주변 교통이 크게 혼잡해졌다. 반면에 셔틀버스 운전사 3000여 명은 일자리를 잃었다. 재래시장 영향은 당시 집계되지 않았지만 좋아졌을 성싶지 않다. 최근 유통산업법 조례의 개정으로 서울시내 대형마트, 대기업슈퍼마켓(SSM)의 90%에 대해 영업시간 제한, 강제휴무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지난 주말 전북 전주에서 SSM 18곳을 일제 강제휴무하게 해봤지만 인근 재래시장엔 눈에 띄는 혜택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실패담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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