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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왕의 역사

Joyfule 2016. 4. 5. 09:33

 

 헤롯 왕의 역사

 

 

아켈라오(Archelaus, B.C.4-A.D.6)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으로 확정되었으나 통치자로서 호평을 받지 못하여서 그가 통치하면 할수록 백성들은 더욱 더 그를 싫어하였다. 그는 자기 일로 로마에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였으며 그의 군대는 유월절에 3천명의 유대인을 살해하였다. 그의 전 통치 기간은 혼란과 피바람으로 특징 지워졌다. 그는 헤롯의 죽음이 남기고 간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였다. 이혼한 여인과의 결혼은 그로부터 유대인의 충성심을 갈라놓았으며 헤로디아(Herodias) 일가에 대한 그들의 혐오감을 고조시켰다. 두 번에 걸쳐서 그는 대제사장을 해임시키고 자신이 직접 야만적이며 고압적인 태도로 그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권력의 욕망으로 잔인한 자였기에 유대와 사마리아 대표들이 로마 황제인 아구스도를 찾아가서 그의 폐위를 요구했고, 그는 AD 6년에 왕이 된지 9년만에 폐위되었고, 로마의 총독들이 그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의 치리 가운데서 한 가지 칭송받을 반한 모습은 그의 건축계획이었다. 10년간에 걸친 아켈라오의 분봉왕으로서의 통치 기간에 쌓인 그와 유대인 사이의 알력이 폭발하여 그는 로마인에 의하여 고울(Gaul)지방으로 추방된 것은 로마 황제가 보기에 그가 너무 오랫동안 유대를 지배하게 되면 그 땅에 대규모의 반란이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유대는 이어서 코포니우스(Coponius) 출신의 총독을 맞아들였다(A.D.6-9).

 

아켈라오가 해임되고 로마 총독이 유대 땅을 지배하게 되자 로마인들은 주민들의 등록을 지시했다. 이것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이와 같은 조치는 일단의 유대인 집단을 격분시켰으며 반로마적 저항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 중에는 특히 적극적인 정치적 행동으로 그들의 반감을 표시했던 열심당원 혹은 열혈당원, 혁명당원이 있었다.

 

신약 성경에서 단 한 번 언급된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2:22~23) 이미 그 당시에 그는 포악한 사람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요셉은 그를 피하여 갈릴리로 향했던 것이다.

 

안티파스(Herod Antipas, 주전 4-주후 39)

헤롯대왕의 아들 중 가장 유능한 자로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린 왕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를 여우’(악하고 간교하며, 참된 힘과 위엄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라고 하였다(13:32). 사마리아 출신의 네 번째 부인 말다크가 낳은 막내아들 안티파스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의 사마리아인 모계 혈통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를 더 싫어하였다.

말다스(Malthace)가 낳은 큰아들 아켈라오를 헤롯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둘째 아들 안티파스는 아버지를 따라 헬라 문화를 퍼트렸고, 많은 건축물을 지었으나, 두번째 부인 마리암네2(시몬 뵈투스 대사장의 딸)가 낳은 아들인 동생 빌립1세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반하여 청혼을 하였고, 본부인을 쫓아내고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이했다. 세례요한이 헤롯 안디파스에게 책망한 일로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혔다가 헤로디아는 자기 딸 살로메를 시켜서 헤롯 안디파스에게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청한 결과 목이 잘려 순교당했다(6:27).

 

헤롯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설득을 받아 그녀와 함께 로마에 가서 칼리굴라(Caligula, 주후 37-41)에게 왕의 칭호를 제수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의 청원을 수락받지 못하고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헤로디아와 함께 추방당하였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형제를 시기한 헤로디아를 심판하셨고, 쓸데없는 여인의 수다를 들은 헤롯 또한 심판하셨다.”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으로서 두 지역이 그에게 주어진 이유는 아켈라오와 세력 균형을 유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일부는 비옥했고, 다른 부분은 개발 가능한 지역이었다. 특히 갈릴리는 인구가 조밀했고 무역과 어업이 번창하였다. 그는 대규모의 건축을 실시하였고 그의 국방을 견고케 하였다. 안티파스는 유대인의 종교를 존중하려고 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축제에도 나타났고 사람 형상이 없는 동전도 발행했으며, 유대 총독 빌라도가 헤롯의 예루살렘 궁전에 황제의 이름을 쓴 금 현판을 두려고 했을 때 반대하였다. 그는 중용의 길을 택하여 어떠한 동요도 없이 30년 동안을 통치할 수 있었다. 그는 AD 39년에 폐위되었고, 그 후에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왕이 되어 야고보를 죽인 자(12:1~3), 베드로를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었으며, 초대 교회 여러 지도자들을 괴롭히다가 AD 44년에 죽었다(12:20~23).

 

​▶빌립(Herod Philip, 주전 4-주후 34)

헤롯의 셋째 아들인 빌립은 갈릴리 호수의 동부와 남동부에 위치한 속주의 분봉왕이었다. 헤롯의 아들 가운데서 그는 단연코 최상의 통치자였다. 빌립은 온화하고 평화로운 성품의 지배자였다. 그는 자신의 영지를 그가 죽을 때까지 조용하고 평화스럽게 다스렸다. 아마도 그는 헤롯왕의 아들 중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그가 통치하는 영지의 주민은 대부분 아람인이나 헬라인이었다. 야심이 많지 않은 그는 주어진 영지를 평화롭게 통치하여 무역과 문화를 진흥시켰다. 그는 인상적인 기념물은 남겨 놓지 않았으나 중요한 두 도시, 즉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와 벳세다-줄리아스(Bethsaida-Julias)를 확장하였다. 빌립은 신약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복음서 저자들은 바리새인들의 증오심이 예수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때 주님은 빌립이 다스리는 지경으로 피신하였다고 적고 있다. 쉬러(Schürer)의 견해를 따르면 빌립의 통치는 온건하고 공정하며 평화로웠다.”

 

헤롯 빌립 1(헤롯 대왕과 대제사장 시몬의 딸 마리암네 1세와의 아들. 헤로디아의 처음 남편(6:17). 살로메의 부친. 공직에 있지는 않았다.)

헤롯 빌립2(B.C.4-A.D.34) 헤롯 대왕과 그의 다섯째 처(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이두레와 드라고닛 지방의 영주가 됨(3:1). 헤롯가에서 가장 존경을 받은 인물.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