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성경적 기독교철학과 교육의 토대를 쌓은 신학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창궐하는 성경파괴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과 현대주의 철학에 대항하여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회를 거뜬히 지켜낸 3대 개혁주의 신학자를 들자면, 대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벤자민 B. 워필드(Benjamin B. Warfiel),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를 든다. 이들은 개혁교회의 전통을 잘 이어받고 또 멋지게 후대에 전달하여 준 시대의 영적 파수꾼들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헤르만 바빙크는 개혁주의 신학 사상에 입각한 기독교철학과 교육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신학자로서, 기독교를 훼파하려는 수많은 적들로부터 여호와의 신앙을 수호하는 데 쓰임받은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였다.
바빙크의 생애
바빙크는 1854년 12월 3일 네덜란드 Drenthe주의 호그벤(Hoogeveen)에서 정통 보수적 교회인 분리 측 목사인 얀 바빙크 목사의 7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바빙크는 비교적 내성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대단히 겸손하고 온유한 목회자로서 매우 청교도적이며 엄격한 가운데 자녀들을 양육하였고, 어머니는 불어에 능통하며 아침저녁으로 성경을 읽어주고 자녀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모범적 환경에서 성장한 바빙크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 청교도적 신앙으로 투철히 무장할 수가 있었다.
바빙크가 7세 때에 아버지는 자녀들을 위해 근무지를 옮기면서까지 당시 명문학교인 하셀만(Hasselman) 사립학교에 입학시켰고, 이 곳에서 바빙크는 학업에 관한 정확성과 조직적 응용력을 훈련받게 되었다. 16세 때에(1870) 바빙크는 즈볼러(Zwolle) 고전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여 4년 과정을 3년에 마치며 1873년 7월 15일에 바빙크는 졸업시험을 치렀고, 라틴어와 불어와 네덜란드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같은 해에 아버지가 신학교가 있는 캄펀교회로 옮긴다. 당시 학문의 전당이라 일컫는 라이덴 대학(Leiden)에 진학코자 하였으나 바빙크는 1873-4년 한 해 아버지의 권유로 약 1년 동안 보수신학의 중심지였던 캄펜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나서 라이덴으로 가게 된다. 그 시절 마침, 카이퍼가 1874년 3월 24일에 캄펀의 학생들 앞에서 「네덜란드 헌법에 보장된 자유의 원천과 보장인 칼빈주의」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였다. 이것은 바빙크의 일생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두 사람의 첫 번째 조우였다.
바빙크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1874년 9월 23일, 레이던으로 향하였다. 당시 라이덴은 자유주의 신학의 선봉에 있었기 때문에 바빙크가 라이덴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은 그의 아버지와 친지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현대 신학의 본거지였던 레이덴에는 스홀턴과 쿠우넌, 틸러 등이 있었는데, 이들로 인하여 레이던은 유럽에서 큰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스홀턴에게서 바빙크는 옛 개혁신학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았고, 교의학을 명쾌하게 강의하는 방법도 배웠다. 헬라어와 라틴어 뿐 아니라, 별도로 문학부에서 셈어를 전공하기 시작하였다. 바빙크는 특히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친 란트의 영향을 많이 받아 평생 옵조오머의 경험주의를 경계하고, 칸트를 따라 18세기의 합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바빙크는 사람들의 염려와는 달리 이러한 신학적 자유주의 속에서도 불구하고 성경적 신앙을 고수(固守)하고 분리 측의 아들이었던 바빙크는분리교회 출신 학생들과 학생회와 독서회를 조직하여, 이들과 함께 독일, 프랑스 고전들을 읽고 토론하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
1876년 5월 24일에 바빙크는 예과를 최우등으로 마쳤다. 1877년 12월부터 1878년 4월 사이에 신학 과정 시험에서도 우등의 성적을 얻었다. 그 해 9월 20일에 셈어 문학 졸업시험에도 합격하였다. 이 공부로써 그의 교의학은 주석적 기초를 얻었다. 1879년 4월 4일에는 신학 석사 시험을 치렀고, 이번에도 우등의 성적을 얻었다. 석사 논문 주제는 “슐라이어마허가 성경 해석에 끼친 영향”이었다. 그리하여 1880년(26세)에 ‘울리히 쯔빙글리에 있어서의 윤리’(De ethiek van Ulrich Zwingli)라는 연구논문으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그의 학자적 삶이 출발하게 되었다.
26세 때(1882년)에 보수적 개혁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franeker에 있는 교회의 목사로 1년 동안 시무를 포함 약 2년간 목회를 하다가, 교단에 속한 캄펜신학교에서 교의학 교수로 청빙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치며 1895년부터 1901년까지 4권에 걸친 ‘개혁교의학’을 출간하였다. 이후 1902년부터 그의 생이 마칠때까지 그는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교(Free University)에서 교의신학, 교육학, 심리학, 기독교철학 등을 가르치며 총장을 지내고 또한 상원위원을 지내다가, 1921년 7월 29일 심장마비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과 이별했다.
바빙크의 신학
바빙크 신학의 특징은 철저히 성경적이다. 그의 계시관은 심오하고 방대하여 이를 모르고서 바빙크의 신학을 안다고 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그는 자연주의적, 범신론적, 관념론적 계시부정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계시가 성경으로 완결된 후 지성적 조명에 그치고 아무런 역사가 없다고 보는 정통 지성주의적 계시관도 부정한다. 그는 말하기를 “계시는 완결이자 영속이다”라고 함으로써, 기록되어져야 할 계시는 완결되었으나 역사하시는 성령의 계시는 영속적으로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계시관은 성령의 역동적 역사가 교회의 성경 중심적 신앙과 생활에 있음을 일깨우고, 개혁주의 교회들에게 ‘하나님중심-성경중심-교회중심’의 중대한 원리를 뒷받침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구원관에 있어서 바빙크는 성도의 법정적 칭의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믿는 자들은 모두 “실제로 거룩하게 되어 부활에 이른다”고 하는 실제적 성화론을 말하고, 이는 미래적인 것이 아니고 과거적인 것이라고 한다(롬8:30). 그리고 종말론에 관하여는 상세한 성경적 근거를 내세워 무천년설을 주장한다. 어쨋든 바빙크 신학의 특성은 철저히 성경계시에 의존해 있고, 계시를 통한 신령한 성령 역사의 계속성에 있다.
기독교철학자 및 교육가로서의 바빙크
바빙크의 신학 원리는 학문 자체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실제적 삶과 그 삶의 틀을 형성하는 교육에까지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후반기 사역은 그래서 철학과 교육의 문제로 씨름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다. 1904년 자유대학 총장 취임 연설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강연하였고, 4년 후에 프린스턴 신학교에 초빙되어 스톤 강연을 했을 때에도 역시 “계시의 철학”라는 제목으로 ‘계시 철학의 개념’, ‘계시와 철학’, ‘계시와 자연’, ‘계시와 역사’, ‘계시와 종교’, ‘계시와 기독교’, ‘계시와 종교경험’, ‘계시와 문화’, ‘계시와 미래’ 등 주로 성경에 기초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한편 신학자인 바빙크는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개혁주의 학교관계의 문제’, ‘기독교 교육의 장래’, ‘칼빈주의 교육의 사명’, ‘교육의 원리’, ‘기독교 가정’, ‘성경과 청년 교육’, ‘성경심리학’ 그리고 ‘기독교교육요리’ 등과 같은 10여 권에 달하는 책을 펴내면서 왕성하게 기독교 교육 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그는 당시의 무신론적인 공립학교에 도전하여 기독교 신앙의 부모들이 여타 불신자들과 같이 자신들의 자녀를 기독교 학교에 보낼 선택권이 있고 국가는 그것을 존중하여 국가 예산으로 기독교교육을 시켜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바빙크의 교육사상은 후에 여러 나라의 기독교교육에 영향을 미치었고, 그를 칼빈주의 교육가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위대한 신학자요 철학가이며 개혁주의 교육가로 당대를 풍미했던 바빙크는 그 시대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의 사상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부모님께로부터 뿌리 깊은 정통적 신앙 유산을 물려받게 하시고, 우수한 학교를 거치면서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습득하게 하시고, 게다가 성경과 함께 세상의 문명과 운동을 볼 수 있는 지혜와 통찰력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를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셨기 때문이었다. 성경에서 그랬듯이 지금도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역사는 당신이 택하신 사람들을 준비시키고 훈련하시어 전개하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으로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 고려파 교회들이 카이퍼-워필드-바빙크가 풍미했던 하나님의 구속 운동을 더욱 힘있게 펼쳐야만 하고 또한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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