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마게도니아인, 이수정
한국인 최초 신앙고백문
‘한국의 마게도니아인’으로 불렸던 이수정은 세례받은지 보름 만인 1883년 5월 8일, 요코하마에서 개최된 제 3회 일본기독교도친목대회에 초대받았다. 이 모임엔 그를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었던 츠다센(津田仙)을 비롯하여 우치무라간죠(內村監三), 니이지마죠(新島襄), 우에무라마사히사(植村正久), 에비나단죠(海老名彈正) 등 일본 교계 지도자 4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그 열기가 대단하였다. 일본 부흥운동의 기원으로 기록되는 이 모임에 ‘새내기’ 교인 이수정은 한복 두루마기에 정자관을 쓰고 참석하여 우리말로 회중 기도를 하였다. 그는 일본 기독교계의 ‘귀빈’이었다.
당시 일본 기독교계 대표적인 간행물이었던 <六合雜誌>나 <七一雜報> 등은 이수정의 행적을 소상하게 보도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발표한 <신앙고백서> 전문을 소개하였다. 7백여 한자로 된 이 고백문은 현존하는 한국인 신앙고백으로는 최초의 것이어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일본에 와서 세례를 받기까지 내력과 그 과정에서 일본인 교우들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한 후 나름대로 파악한 기독교 진리를 설명해 나갔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4장을 보니, 예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는데, 그 가르침이 밝히 드러나고 그 숨은 뜻이 오묘해서 설교의 요지요, 믿음의 관건이요, 학자들이 불가불 탐구할 바로서 예수께서 반복해서 자세하게 가르치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按新約書約翰傳第十四章耶所示曰我在父而父在我爾在我而我在爾云其旨明顯而厥義奧妙乃說敎之要旨致信之關鍵學者不可不探究故耶最於此旨反覆申詳)
이수정은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을 그리스도 가르침의 핵심으로 보았다.
“무릇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한 것은 하느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를 가리킴이며,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비유하여 이르시기를 ‘내 아버지는 포도원 주인이요, 나는 포도나무이며 너희는 가지라’ 하셨으니, 그 이치는 쉽게 곧바로 이해될 것이어늘 번거로이 천착하지 않을 것이므로 제가 이제 무슨 말로 밝힐 수 있겠습니까?”(天父在我我在父我在爾爾在我卽神人相感之理有信必成之確證耶說譬曰我父爲圃人我乃眞葡萄樹爾爲此樹枝其理直捷易解不煩穿鑿今僕更有何辭)
그는 신앙을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神人相感之理)로 해석했다. 하느님은 인간을 알고, 인간은 하느님을 느낀다. ‘하느님과 인간의 합일’(神人合一)이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성경의 ‘포도나무’ 비유를 풀이하였다.
등잔과 종의 비유
그러나 ‘포도나무’ 비유가 극동 아시아인에게 익숙지 않았다. 포도나무가 16세기 이후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를 통해 극동 아시아 지역에 이식되었으나 포도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팔레스틴과는 환경이 달랐다. 동양인을 위한 ‘동양적’ 비유가 필요했다. 이수정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대저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감응하는 이치는 등잔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등잔 심지가 타지 않으면 빛이 없으니 심지는 도를 가리킴이요, 도심이 타서 믿음이 되며 불타는 마음은 하느님을 감동시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감동은 믿는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고는 얻을 수 없으며, 한갓 심지만 가지고는 등잔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불타지 않을 때는 끝내 빛을 볼 수 없듯 믿지 않고서는 끝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盖神人相感之理如是譬燈炷不燃則無光燈炷是向道心燃然信心火爲神感故神感非由信心則不可得徒有炷則不成爲燈故不燈時終不見光不信時終不得救)
등잔 속에 빛이 있다. 그러나 심지에 불을 붙이지 않으면 빛이 나지 않는다. 심지는 도를 향한 우리 마음이고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에 불타는 우리 마음에 감동한 하느님은 구원의 은총을 내리신다. 믿음이 아니고는 하느님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불타지 않는 심지는 믿음 없는 행위이니 ‘맛을 잃은 소금처럼’ 버려질 뿐이다(炷終不受燃則碎棄之如失其味).
이수정은 이해를 돕기 위해 또다른 ‘동양적’ 비유를 들었다.
“하느님께서 하늘에 계심이 소리가 종에 있는 것과 같아 치면 응하고 때리면 소리나는 것이니, 종과 망치가 구비되어 있더라도 각기 다른 곳에 달려 있다면 소리가 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큰 심지로 등잔이 타면 빛이 크고 조그만 망치로 치면 소리가 적으니 곧 많이 구하면 많이 얻고 적게 믿으면 적게 이룬다는 뜻이요 오직 이루지 못함이 없다는 이치입니다.”(神之在天如聲之在鐘擊則響槌有聲鐘與槌雖具而各懸一處其有聲乎故燈以大炷燃則光大鐘以小槌叩則聲小卽多求多與小信小成之意惟無不成之理)
종 속에 소리가 있다. 그러나 종과 망치가 따로 있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망치로 종을 때려야 소리가 난다. 등잔 속에 있던 빛이 심지에 불을 당김으로 나타나듯, 종 속에 있던 소리도 망치로 때릴 때에 나타난다. 빛과 소리는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우리의 믿음이다.
신학의 토착화
이것이 이수정이 말한 ‘신인상감의 이치’다. 그는 믿음과 행위를 떼어놓고 보지 않았다. 구원은 인간의 믿음 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진다. 웨슬리 신학의 특징인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 synergism)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또한 그는 종 속에 담긴 소리와 등잔 속에 담긴 빛처럼 구원의 가능성이 이미 사람 속에 있음을 밝힌다. 즉, “구원을 받았는지 여부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자신에게 믿음이 있는지 여부를 살펴볼 것이지 스승에게도 묻지 말고 하느님께도 구하지 말 것입니다.”(欲確知得救之成否只自省信心之有無莫問於師莫求質於神) 하여 사람 속에 내재해 있는 구원의 가능성으로서의 믿음을 강조했다. 그 믿음의 심지에 불이 당기는 것을 성령의 감화(聖靈之感化)라 하였다. 이는 웨슬리가 말한 ‘선행 은총’(先行恩寵, preliminary grace)에 다를 바 없다.
이처럼 이수정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以信得義)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동양 언어’로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팔레스틴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계시된 메시지가 극동 아시아에서 ‘등잔’과 ‘종’의 비유를 통해 재해석되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은 우리 언어와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를 토착화라 한다. 한국 신학의 역사는 여기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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