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선교사 데이빗 브레이너드
크로스윅숭 부흥
브레이너드는 1745년 6월 19일 뉴저지 주의 크로스윅숭으로 가서 설교하였다. 그곳의 인디언들은 다른 곳의 인디언과는 달리 브레이너드의 설교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으며, 귀담아 들었다. 브레이너드의 설교에 대한 관심은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가 도착한 지 삼일 만에 청중이 17명에서 3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들 모두는 브레이너드의 설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브레이너드는 자신의 설교 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듣는 회중 가운데, 죄의 각성이 일어나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울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이도 있었다.
브레이너드는 다시 8월 3일에 크로스윅숭을 방문하였다. 지난 6월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8월 5일에 설교하는 가운데 설교를 듣던 인디언들 가운데,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울부짖는 소리들이 일어났고, 설교 후에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인 8월 8일에 약 65명가량의 인디언들이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설교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을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말씀을 전파할 때 한 사람씩 더욱 힘있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이 하나님의 능력이 모임 위에 내리는 듯하더니 모든 사람을 압도해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놀라운 힘에 사로 잡힌 듯했다. 불어난 홍수나 휘몰아치는 격류가 견디기 힘든 무게와 압력으로 그 앞에 거치는 것들을 휩쓸어 버리는 현상에나 비유할 수 있을 까? 그들은 거의 한 결같이 집안 곳곳에서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하며 울부짖어 기도하고 있었다.” 즉, 크로스윅숭의 인디언에게 부흥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부흥의 불길은 델라웨어의 휙스 지역에서도 그해 (1745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10월에 다시 크로스윅숭에서 성령의 역사가 더욱 강력하게 일어났다. 부흥을 통해서 인디언들 가운데 신실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났다. 이렇게 부흥을 경험한 브레이너드는 그해(1745년) 11월에 부흥에 대해서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점에서 인디언 가운데 이 일을 시작하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알기로는 이 시점은 나의 힘이 한계에 도달해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때가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였다. 모든 희망과 인간적인 소망이 완전히 깨어져 버렸을 때,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역사하셨다.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을 하락하여 주셨다. 여기서 나는 흑암과 절망의 늪에 있을 지라도 맡은 일을 끝까지 감당해야 함을 깨달았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 146) 자신의 사역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하여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27세의 젊은 청년 선교사의 고백이다.
교리 설교의 중요성
1745년에 부흥을 크게 경험한 브레이너드는 부흥의 원인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살폈다. 그는 사역의 초기부터 말씀을 가르칠 때 인디언들로 죄인 됨을 깨우치기 위해 역설하였다고 하였다. 더욱이 죄를 회개함에 기초를 두지 않은 신앙은 모래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다는 것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막 2:17절 말씀과 같이 주님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달았을 때 그들을 주님께 초대해야 하며, 이때 죄인 됨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746년 3월에 다시 크로스윅숭에서 가서 설교할 때에도 부흥이 일어났는데, 이때에는 회중이 14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때에도 부흥의 수단이 무엇이었을까를 그가 신학적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교리 설교와 함께 교리문답식의 성경공부가 그들에게 영적 각성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브레이너드는 교리 설교와 강의가 그들에게 성경적 지식의 진보를 있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그들이 진리에 대하여 궁구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들이 이러한 궁구함 속에 있을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영적 각성이 일어난 것으로 확인하였다. 사실 이러한 그의 사역은 이미 그가 영적대각성 당시에 체험하였던 것이며, 더욱이 그를 목사 안수하였던 펨버튼으로부터 사역에 있어서 지침으로 당부 받았던 내용들이다.
마지막 사역
브레이너드는 이렇게 사역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잘 이해하고 항상 도와주었던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서 그의 둘째 딸인 제루사를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기보다는 광야에 흩어져 있는 인디언들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더욱 계속되었다. 1746년 8월 11일 전도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그의 마지막 사역이었다. 서스퀴한나의 패스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그의 병은 깊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언들을 향하여 주께 돌아오라고 설교하였다. 11월에 서스퀴한나 사역을 마치고 뉴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봄까지 계속 휴식을 취하고 쉬었지만, 병은 더욱 깊어갔다. 1747년 6월 보스톤을 방문하는 동안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았는데, 폐에 궤양이 생겨서 소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병이 깊은 브레이너드를 받아 준이는 조나단 에드워즈이었다. 1747년 7월부터 에드워즈 집에서 간호를 받았다. 그에게 있는 시간들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피를 토하면서 때로는 혼수상태에 있으면서도,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다.
1747년 8월 23일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늘 아침 나는 생각이 매우 상쾌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시키고 싶은 기대와 희망을 가졌다. 내 바벨론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으리만큼 망해버린 때가 가까이 왔음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나로 영적인 묵상을 하게 하였고, 나를 새롭게 했다.” 결국 브레이너드는 1747년 10월 9일 금요일 오후 6시에 그렇게 그리워하던 주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임종 직전까지의 기도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선교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중요한 수단인 부흥을 갈구하였다. 그래서 보스톤의 목회자들을 향하여 부흥을 위하여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한탄하는 말도 하였다.
브레이너드는 29세의 청년선교사로 주님 품에 안겼지만, 오늘날에도 그의 선교의 정신과 방법은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비록 그의 사역이 4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인 성령의 쏟아부어주심을 경험하였다. 그의 사역은 기도로 시작하여 철저한 하나님 말씀의 강해와 성령의 역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교회사 속에서 어떤 성도보다 탁월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위한 기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도전을 주고 있다. 한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브레이너드가 갔던 그 길을 따라감으로 역시 선교지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인 부흥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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