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도망친다고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밤늦은 시간에 산길을 운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동차 시동이 꺼져버렸다. 아무리 시동을 걸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보닛을 열고 살펴보아도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도 없다. 그래서 다시 차 안으로 들어온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둡고 산짐승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갑자기 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인다. 그래서 당신은 눈을 감고 자신에게 주문을 걸고 있다. 지금 자동차의 시동이 걸려서 잘 가고 있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눈을 뜨면 안 된다. 두려운 현실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이 당신 마음대로 바뀌겠는가? 이런 일이 교회에도 있다.
당신이 읽고 있는 성경의 약속은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 괴리감이 깊다. 그러나 당신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며, 믿음이 없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자신이 맞닥뜨린 현실을 덮어두고, “이건 꿈일 거야 사실이 아닐 거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어”하며 고개를 흔들며 자신에게 주문을 걸고 자기암시를 하고 있다. 필자의 글을 읽으면서도, 위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서운 산속에서 눈을 감고 자신이 산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자기암시를 거는 사람처럼,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은 자신에게 성경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는 자기 확신과 자기암시를 하면서 지내고 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21:22)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당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을 것이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으므로, 주일성수를 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각종 신앙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물론 목회자들도,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을 근거로 들면서, 영접기도행위에 아멘을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구절에서 하나님은 믿음이 있다고 인정하는 자녀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심지어는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이라고 기적을 불러일으킨다고 콕 집어서 말씀하고 계시다. 그래서 당신은 그런 믿음의 능력을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계시는가? 아니라면 둘 중의 하나이다. 당신의 믿음이 헛것이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게 거짓말이든지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는 당신의 곤혹스런 표정이 안타깝다. 당신이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은 현실이다. 현실에서 믿음의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데, 하나님께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네 교인들은 기도의 응답이 내려오는 믿음의 능력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다.
서두에서 말한 산길에서 시동이 꺼진 운전자처럼, 눈을 감고 자신의 차는 시동이 다시 걸려서 빠른 속도로 산을 빠져나가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자기암시를 걸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여기에 대해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런 저런 변명과 구실을 대면서 현실을 회피하고 도망치려고 하고 있다. 하나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러니까, 교회에서 요구하는 희생적인 신앙행위의 박차를 가하라고 하고 있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교회에 맨 처음에 왔을 때, 영접기도행위를 통해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을 인정받았다고 한 말과 앞뒤가 맞지 않은가?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은 있는데, 기도응답이 내려오는 믿음은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또 어떤 목회자는 때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조금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 거라고 덕담을 하고는 꽁무니를 빼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를 열심히 다니다가 세상을 떠난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을 보라. 죽을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것 다 치우고, 목회자들이 어떤 능력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도 어렵지 않게 잘 알 수 있다. 개척교회를 시작한 목회자들의 대부분은 곧 교회문을 닫을 것이다. 왜냐면 교인들이 없어서이다. 현재 중견교회나 대형교회에서 부목사로 있는 목회자들도 45세가 넘으면 갈 데가 거의 없다. 그래서 쫓겨나듯이 교회를 나와도 마땅히 갈 데가 없어, 택배나 대리기사, 막노동 등으로 입에 풀칠을 하면서 차가운 삶의 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들이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죄다 응답해주시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고 침을 튀기며 가르치지 않았는가? 그런데 정작 자신들의 가족들조차 부양하지 못하고 극빈층으로 내몰리는 현실에 대해 누가 시원하게 설명 좀 해주시라.
어떤 이들은 성경말씀 대신에, 자신이 경험하는 신비하고 기이한 현상들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바꿔치기를 하고 있다. 기이한 동작으로 성령 춤을 추거나, 성령의 불이라고 소리 지르면서 배를 꾹 누르면 웃으면서 뒤로 자빠지고, 금가루가 손바닥에 떨어지고 아말감이 금이빨로 변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춤을 춰서 바뀐 게 무엇이 있고, 뒤로 자빠져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뒤로 자빠져서 고질병이 낫고 삶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손바닥의 금가루를 긁어모으고 금이빨을 빼서 금은방에 팔아서 부자라도 되었는가? 그런 현상이 성령의 능력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었는가?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행하지 못한 성령의 능력을 받았다면, 그들보다 더 하나님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사람이란 말인가? 기가 막히고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당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한다고 현실이 바꿔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필자도 20여년의 세월을 그렇게 믿으며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실패뿐인 인생이었다. 그러나 왜 이렇게 삶이 곤두박질치고 나락에 떨어지는지 말해주는 목회자는 한 명도 없었다. 필자가 뒤늦게 신대원을 졸업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목회자들도 평신도들과 다름없이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도 경험하지 못하는 믿음의 능력을, 설교단상에 서면 믿어야한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성경에 언급한 하나님의 약속을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겸손하게 하나님께 돌아가서 지난날의 어리석음과 불신앙을 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시라. 아니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멸시한 죄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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