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을 위한 ━━/역사와인물

홍국영(洪國榮)의 등장/홍국영(洪國榮)의 세도(勢道)/홍국영(洪國榮)의 과욕/홍국영(洪國榮)의 말로

Joyfule 2021. 5. 7. 11:40

    歷史 Essay 753 ☞ 홍국영(洪國榮)의 등장 영조(英祖)는 세손을 무척 아꼈지만 금기사항(禁忌事項)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의 정을 듬뿍 느끼게 하는 시전(詩傳)의 요아편(蓼莪篇)만은 읽지 말라는 것이었다. 호시탐탐 세손을 음해하려는 벽파(僻派) 대신이 내관을 부추겨 어느 날 세손이 시전을 읽기 시작했다. 세손이 눈물을 흘리며 그 부분을 읽을 때 내관이 영조에게 고자질했다. 영조가 세손을 불러들이고 그 책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런데 가져온 책에는 요아편만 칼로 오려져 있었다. 세손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동궁으로 돌아왔는데 그 일을 한 것은 말단에 있던 홍국영(洪國榮1748-81)이었다. 정조는 후일 그에게 허물이 있더라도 용서하겠다고 약속했다.

    歷史 Essay 754 ☞ 홍국영(洪國榮)의 세도(勢道) 그 날부터 국영(國榮1748-81)은 세손의 경호원 노릇을 했다. 후에 영조(英祖)가 승하하고 즉위 첫 해인 1776년 7월 28일 정조(正祖)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홍국영(洪國榮)은 경호실장의 자격으로 사건의 주모자인 홍인한(洪麟漢) 윤양로(尹養老) 등을 잡아들였다. 또한 정조의 즉위에 반대하다 귀양간 홍지해(洪趾海) 등도 역모로 몰아 모조리 사사시켜 벽파(僻派)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두 번 씩이나 정조를 구한 홍국영은 즉위 초부터 고속 승진으로 정권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그로부터 국영은 조정의 모든 요직을 차지하며 조정의 문무백관을 수하에 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소위 세도 정치(勢道政治)라는 말이 생긴 것은 바로 이때였다.

    歷史 Essay 755 ☞ 홍국영(洪國榮)의 과욕 그러나 풍산 홍씨 국영(豊山洪氏 國榮1748-81)은 공명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정조(正祖)의 약속을 믿고 욕심이 지나쳐 오만방자한 천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정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정조 2년 1778년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들여 원빈(元嬪)을 삼게 했다. 그러나 원빈이 1년 만에 죽자 정조에게 다른 후궁을 들이지 말라 간언하고는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인(裀)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상계군(常溪君)으로 봉하도록 정조를 설득한다. 정조는 임금인 자신의 신임을 빙자하여 온갖 횡포를 자행하고 왕통마저 바꾸려 하는 국영에게 실망하여 약속과는 다르지만 재위 3년부터 그를 내치기로 결심한다.

    歷史 Essay 756 ☞ 홍국영(洪國榮)의 말로 홍국영은 스스로 무덤을 팠다. 정조(正祖) 재위 4년 1779년 홍국영(洪國榮1748-81)은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된다. 그는 전에 여동생 원빈(元嬪)이 죽은 것이 효의왕후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었다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에 조정 대신들은 한결같이 홍국영의 대죄를 성토하고 사형을 종용했으나 정조는 세손 시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죽이지는 못 하고 1780년 강원도 횡성으로 그 후 강릉으로 유배 보낸다. 세도(勢道) 정치를 만들어 나중 안동 김씨 세도의 모델이 된 4년여의 권세를 뒤로 하고 유배지에서 분루를 삼키던 홍국영은 그 다음 해 봄 울화병으로 죽고 말았으니 나이 3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