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입’ 요한 크리소스톰 | |
영혼을 움직인 설교자1 | |
출처: 교회와신앙
|
엄청난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아프간 피랍 사태를 통해, 우리는 이 땅의 기독교가 얼마나 외면당하며 비난받고 있는가를 실감했다. 그것은 비단 이번 사태 때문만은 아니다. 그 동안 기독교에 대해 쌓여온 분노와 비판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다. 설교 없이는 선교도 없고, 설교 없이는 구원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그리고 온전하게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서 교회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한국교회의 위기 원인을 설교에서 찾는 것은 타당하다. |
“장내는 온통 열광의 도가니였다. 감동의 절정에서 터져 나온 청중들의 환호와 갈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설교자 정점을 향하여 치달을 때 회중들은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고, 못된 소매치기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더욱 광분했다. 다음 설교지로 그를 초빙하려고 계획한 무리들은 저마다 납치 기회를 노리면서 바싹 긴장했다.”
이런 상황을 연출한 매력적인 설교자는 안디옥과 동방교회가 자랑하는 4세기의 요한(St. John Chrysostom, AD 347~407)이다. 너무나도 뛰어난 언변을 지녔던 설교자요, 당대를 움직인 사회적 인물이기에 ‘황금의 입’(金口·Golden-mouthed)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20세기 초반, 설교 역사에서 최고봉을 이룬 그의 위대함을 기려 교황 비오 10세(Pius Ⅹ?AD 1835-1914)는 설교자의 수호 성자로 그를 추증(追贈)하였다.
크리소스톰의 멘토: 어머니와 디오도루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사람인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원래 이름은 요한이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후, ‘크리소스톰’(Golden-Mouthed)이란 별칭이 주어졌다. 이후 크리소스톰으로 불리게 되었다.
크리소스톰은 어려서부터 엄격하고 단순한 생활을 했다. 다소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었으며, 예의 바르고 다정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거인이었지만, 체구는 왜소했다. 하지만 쾌활한 얼굴, 주름진 이마, 벗어진 머리, 꿰뚫어 보는 듯한 맑은 눈은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영속적인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다.
크리소스톰은 주후 347년에 안디옥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세쿤투스는 황제의 군대를 지휘하는 군대 장관이었고, 어머니 안투사(Anthusa)도 훌륭한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 크리소스톰은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신앙이 좋은 어머니에게서 경건훈련을 받았다. 20살에 과부가 된 안투사는 상당한 미모를 지녔고 교양이 있었다. 따라서 많은 구혼자들로부터 재혼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그 당시 황제도 안투사가 자신의 고관과 결혼해 주기를 기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안투사는 모든 청혼을 거절했다. 오로지 어린 크리소스톰을 키우는 데 헌신하여, 아들에게 최상의 훈련을 받게 하였다.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고, 가장 훌륭한 교사 문하에 들어가도록 주선했다.
크리소스톰은 다른 학문으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세심한 연구에 일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의 죽음 직후 곧장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성경 연구에 몰두한다.
여기서 그의 영적 스승 디오도루스(Diodorus)를 만난다. 그의 스승은 성경을 알레고리화시키는 대중적 방법 대신, 성경을 문자적이고 역사적으로 면밀히 연구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은, 크리소스톰이 당시에 유행하던 심각한 알레고리 해석에 빠져 들지 않고 본문 해석에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크리소스톰의 5단계 생애
제1단계: 안디옥에서의 어린 시절(AD 347~370)
크리소스톰은 어머니 권유에 의해 당시 이교도의 대변자요, 수사학의 대가인 리바니우스 수하로 들어간다. 여기서 헬라 문학과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리바니우스에게 최우수 학생으로서 후계자로 지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앙적인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크리소스톰은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의 법정 변론은 널리 칭송 받았고, 따라서 성공적인 변호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자신은 정작 법률에 환멸을 느꼈다. 변호사로 일하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변호사를 그만두고, 기독교를 세밀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크리소스톰은 20세 되던 해에 세례를 신청했다. 법률가로 활동할 때, 교회의 관습대로 3년간의 훈련을 거친 후 당시 안디옥 감독 멜리티우스(Meletius)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후 크리소스톰은 도시를 떠나 수도사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떠날 수 없었다. 이 기간에 크리소스톰은 기독교 신앙과 경건한 삶에 대한 동경 속에서 내적 고뇌와 깊은 갈등을 갖게 되었다.
제2단계: 금욕 생활과 수도원 생활(AD 370~381)
이 시절은 크리소스톰이 영적인 삶에 대한 동경과 삶의 이상을 고독 속에서 구현한 시기다. 어머니의 임종 후 그는 시리아에서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때 안디옥 학파 지도자인 타르수르의 디오도루스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디오도루스는 성경을 우화적(Allegory)으로 해석하는 유행 방법을 배격하고, 본문의 축어적이고 역사적인 연구를 최선의 방법으로 고수했다. 크리소스톰은 이 방법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크리소스톰은 6년간의 수도원 생활 가운데 2년 동안 밤낮으로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의 위장은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었고, 신장도 추위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없게 되자, 결국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가 AD 380년이다.
그는 훗날, 수도원 생활은 목회자 훈련으로 적당치 못했다고 저서에서 고백했다. 또한 수도자와 목회자를 비교하면서, 목회자는 수도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3단계: 안디옥 교회 목회자(AD 381~398)
크리소스톰이 안디옥으로 돌아오자마자, 안디옥 교회의 부제가 되어 5년간 일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부요한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을 접했고, 교회 실상도 익히게 되었다.
크리소스톰은 설교자로서의 서임을 한 번 이상 회피했다. AD 381년에 집사 안수를 받고, 가난한 대중과 접촉하면서 무엇을 설교해야할 것인지 깨달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39세가 되었을 때(AD 386) 안디옥 교회의 장로 겸 수석 설교자로 임명받아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이 때 그의 명성을 높여 준 한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과다한 세금 문제로 안디옥 시내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흥분한 안디옥 시민들은 황제와 황후의 동상을 부수면서 격렬한 항의를 벌였다. 그러나 황제 데오도시우스(Theodosius)의 분노가 두려운 나머지, 안디옥 감독 플라비안은 진상조사단을 꾸려 콘스탄티노플로 떠났다.
이 기간 동안, 크리소스톰은 석상에 대한 21편의 유명한 설교를 했다. 그 내용이 얼마나 시의에 적절하고 진실했든지, 지대한 효과를 거두었다. 이 설교는 오늘날도 그의 천재적인 설교자로서의 모범으로 남아있을 정도다.
플라비안 감독의 부재로 크리소스톰은 설교자요, 목회자이자, 한 시민으로서의 모든 재능들을 발휘하여 안디옥 시민들의 두려움을 안심시켰다. 무엇보다 심각하게 침체된 영혼들을 회복시키려고 애썼다. 그가 강단에서 쏟아내는 황금 줄기 같은 설교를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 같이 모여들었다.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온갖 영적 체험을 경험했다. 안디옥의 고통을 묘사할 때는 마음이 녹아내려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그의 격려에 자극을 받았다. 특히 황제의 너그러움을 상기하여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플라비안 감독이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서 평안을 가지라는 그의 말씀에 영혼의 활력을 되찾았다.
이처럼 이 시기의 크리소스톰은 가장 인기 있고, 탁월한 설교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가 설교할 때면 교회는 그의 설교를 들으려는 회중들로 가득했다. 그의 강해설교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회중들은 자발적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이것을 싫어했다.
안디옥 교인들은 크리소스톰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크리소스톰의 생애 가운데 이 시기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설교자로서의 명성을 드높였으며, 많은 설교와 주석을 기록한 때이기도 했다.
제4단계: 콘스탄티노플 주교(AD 398~404)
AD 397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죽자, 후임으로 크리소스톰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동방 기독교의 노른자위를 차지할 마음이 없었고, 안디옥 교인들도 위대한 설교자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지도자들은 명성이 자자한 크리소스톰을 콘스탄티노플로 납치하듯 데려갔다. 안디옥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애썼지만, 전격적인 조치로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으로 전임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첫 시작은 만사가 순탄하였다. 이곳 사람들도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많은 수입을 구제와 다른 경건한 일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인 술수와 교직의 타락이 난무하는 도시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크리소스톰은, 부패하고 타락한 수하의 성직자들을 한 치의 용서도 없이 치리했고, 사회 개혁을 촉구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도들을 향하여 도덕적이고 검소한 삶을 살아갈 것을 설교했다. 그러자 크리소스톰의 개혁에 반대자들이 등장하였다. 일부 부패한 성직자와 알렉산더의 데오빌로 주교와 황후 유독시아는 크리소스톰을 모함하여 추방령을 내렸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분노했다. 위대한 설교자를 잃은 백성들은 울분을 갖고 궁전을 습격하면서 그의 귀환을 요구했다. 안디옥 시민들은 운집하여 “우리의 감독을 돌려 달라. 우리는 우리의 감독을 모시겠다. ‘황금의 입’이 닫히는 것보다 태양의 빛이 가려지길!”이라고 외쳤다. 때마침 거센 지진이 일어나 왕궁을 강타하자, 이를 하나님의 분노라고 해석한 황후는 당황하여 크리소스톰을 다시 불러들였다.
복귀 후, 처음에는 황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두 달 만에 깨지고 말았다. 예배당 근처에서 벌어진 황후 유독시아의 은상 헌당식을 기념하는 외설적인 행사와 춤을 크리소스톰이 방관할 수 없었던 것. 그가 이를 비판했을 때 둘 사이의 관계는 다시금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즈음 세례 요한의 축일에 맞춰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또 다시 헤로디아가 소리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난리를 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춤을 추었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목을 쟁반에 담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요한의 대적들은 이 설교가 유독시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의 재추방을 결의했다. AD 404년, 부활절 저녁예배 때 그가 황실 사제들과 더불어 세례를 베풀려고 대상자들을 욕조에 소집했을 때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예식은 중단되었고, 크리소스톰은 추방되기에 이르렀다. 크리소스톰이 교회 일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두려워한 세력들은 흑해 지방으로 추방해 버렸다.
이처럼 크리소스톰은 제국의 교회에 만연한 부패와 사치를 개혁하는 한편, 기독교 이상을 구현하려는 소명에 충실하고자 애썼다. 그의 태도는 교회 당국과 제국의 권력과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결국, 반대파들에 의해 추방당하게 되었다.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만약, 그가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다면 그를 따르는 민중의 힘을 사용해서 황후 유독시아와 전면전을 치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가가 아니라 설교자였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던 크리소스톰. 그렇기 때문에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제5단계: 추방과 소천(AD 404~407)
추방된 크리소스톰은 갑바도기아와 아르메니아의 경계선 가까이에 있는 쿠쿠수스에서 생활했다. 이곳에서 설교할 수는 없었지만, 친구들과 서신을 왕래하면서 양떼를 돌보는 일과 자선사업과 전도를 하였다.
크리소스톰의 유배를 떠나자 수많은 지역에서 지지자들이 나타났다. 로마 감독 이노센트(Innocent)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입가에 그의 이야기가 오르내리자, 적대 세력들은 쿠쿠수스에서 흑해의 피티우스라는 새로운 유배지로 크리소스톰을 이송시켰다.
크리소스톰은 파티우스로 이송 중 AD 407년에 사망하게 된다. 오랜 수도 생활과 금욕 생활을 통하여 건강을 상실한 크리소스톰은, 장기간에 걸친 추방생활을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유배지로 향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크리소스톰은 인근 교회당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이곳에서 성찬을 받고 주위를 둘러싼 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전 생애에 걸쳐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뛰어난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이라는 설교를 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범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서슴없이 외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 죄가 되어 유배의 길을 떠난 크리소스톰. 그의 피곤한 육신은 폭염 아래 쓰러져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바르지 못한 교권주의자들과 시기심으로 불타는 동료 설교자들은 그들의 권위와 안일을 위하여 코리소스톰을 영원히 추방해버리는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하고 만 것이다.
'━━ 영성을 위한 ━━ > 신앙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첫번째 귀출라프 선교사는 유대인이었다 (0) | 2015.11.08 |
---|---|
황금의 입’ 요한 크리소스톰 (0) | 2015.11.07 |
크리소스톰, 요한의 「성직론」 (0) | 2015.11.05 |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교부 크리소스톰 (0) | 2015.11.04 |
Reuben Archer Torrey (0) | 2015.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