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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칭의의 결과는 무엇인가?

Joyfule 2023. 9. 18. 09:51

 

 

 

 

    회개와 칭의의 결과는 무엇인가?

 

1. 성화. "성화"라는 용어는 "성결", "성별", "성화"를 의미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스(hagiasmos)를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다", "성화시키다", "구별하다"라는 뜻의 하기아조(hagiazo)로부터 나온 말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카다쉬(qadash)로서 "보통 용도로부터 판별하다"를 뜻한다.*
진정한 회개와 칭의는 성화로 인도한다. 칭의와 성화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분명히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그것들은 구원의 두 단계를 표시한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인 반면에 성화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이다.


칭의나 성화 그 어느 것도 공로가 인정되는 행위의 결과가 아니다. 둘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에서 기인된다. "우리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해주는 의는 전가되는 의이며 우리가 성화되게 하는 의는 나누어주는 의이다. 전자는 하늘에 들어갈 우리의 증서요, 후자는 하늘에 들어갈 우리의 적합성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성화의 세 국면은 (1) 신자의 과거에 이미 성취된 행위, (2) 신자의 현재의 경험 가운데서 진행되는 과정, (3) 신자가 그리스도 재림 때 경험하는 최종적 결과 등이다.
신자의 과거에 대하여 말하자면 칭의의 순간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고전 6:11) 또한 성화된다. 그는 "성도"가 된다. 그 시점에 새 신자는 속량함을 받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속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결과로(롬 1:7) 신자들은 "성도"로 불리우는데 그것은 그들이 죄 없는 상태를 이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빌 1:1; 요 15:1-7참조). 구원은 현재적 경험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딤 3:5)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별하사 우리를 거룩한 목적과 그리스도와의 동행을 위해 성별하셨다고 말했다.


2.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됨. 동시에 신자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입양하셨다. 즉, 신자들이 우주의 왕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는 그들을 당신의 후사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롬 8:15-17)로 삼으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며 영예이며 기쁨인가!


3. 구원의 보증. 칭의는 또한 신자의 가납을 보증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과 지금 재연합된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 과거의 생애가 아무리 죄악적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며, 우리는 더 이상 정죄나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4. 승리하는 새 생활의 시작. 구주의 피가 우리의 죄된 과거를 가리운다는 깨달음은 몸과 영혼과 마음에 치유를 가져다준다. 죄책감은 제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것이 새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날마다 당신의 은혜를 내려주심으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하신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치유와 변화가 진전되며 그분은 어둠의 권세에 대해 점점 더 승리를 얻게 해주신다. 세상에 대한 그분의 승리는 죄의 예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실 것을 보증해 준다(요 16:33).


5. 영생의 은사.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새 관계는 아울러 영생의 은사를 가져다 준다. 요한은 이렇게 단언하였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우리의 죄된 과거는 다 청산되었다. 내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의 축복들을 충만히 누릴 수 있다.

구원의 경험과 현재
정결케 함, 칭의, 그리고 성화를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화의 생애로의 부르심.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에서 이루신 것에 기초하여 성화된 생애를 영위하는 것을 포함한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윤리적 성결과 도덕적 행위에 전념하는 생애를 살도록 호소하였다(살전 4:7). 하나님은 신자들이 성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성결의 영"(롬 1:4)을 주신다. 바울은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6, 17)라고 말하였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신자는 새로운 책임을 진다.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제 그들은 "성령 안에서"(갈 5:25) 살아야 한다.
성령의 채움을 입은 신자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롬 8:4, 8:1 참조)해야 한다. 그들은 변화되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롬 8:6)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내재를 통하여 그들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롬 8:9)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생애의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살전 4:1). 성화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바울은 말했다. 그러므로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살전 4:5-7)라.

내적인 변화. 재림 때 우리의 육체는 변화함을 입을 것이다. 이 썩을 몸, 죽을 몸이 불멸성을 입을 것이다(고전 15:51-54). 그러나 우리의 품성은 재림에 대비하여 변화를 받아야 한다.


품성 변화는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할 저 "내적 본질"(고후 4:16, RSV; 롬 12:2 참조)인 하나님의 형상의 정신적, 영적 국면들을 포함한다. 이와같이, 헤르마스의 목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노파처럼 교회는 내부적으로 점점 젊어진다. 온전히 굴복한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고 있으며 마침내 재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그들의 변화가 완성될 것이다.


1.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여. 창조주께서만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창조사업을 성취시킬 수 있으시다(살전 5:23).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참여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의 통로에 자신을 두어야하는 바 그 일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명상할 때 성령은 신체적, 정신적, 영적 기능들을 회복시키신다(딛 3:5 참조). 성령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일에 관여하신다(롬 8:1-10 참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 안에 사시기를 원하신다. "내가 저희 가운데 거"(고후 6:16; 요일 3:24, 4:12 참조)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바울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갈 2:20; 요 14:23 참조)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조주의 내재는 매일 신자를 내적으로 소생시키고(고후 4:16) 그들의 마음을 쇄신시켜 준다(롬 12:2; 빌 2:5 참조).


2. 신의 성품에 참여함. 그리스도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우리의 품성의 변화를 완성시킬 그분의 신적인 능력을 보증한다(벧후 1:4).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벧후 1:5-7)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벧후 1:8, 9).


1)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을 그들의 창조주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것(롬 13:14; 히 3:14) 즉,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이다. 그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요일 4:12).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 비견할만한 신비가 있다. 성령께서 신성이신 그리스도로 인성을 취하실 수 있게 해주셨던 것처럼 그 동일한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의 특성들을 취하는 일을 가능케 해주신다. 신의 성품을 이와같이 내 것으로 삼을 때 속사람은 새롭게 되고, 개인차는 있지만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만들어 준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는데 반하여 신자들은 신이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품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


2) 역동적 과정. 성화는 점진적이다. 기도와 말씀 연구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한다.
구원의 계획을 단순히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안에 거하나니"(요 6:53-56)라고 계시하셨다.


그의 비유적 표현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소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마 4:4도 보라)고 말씀하셨다.
품성은 마음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꼴지어진다. 생명의 떡을 소화시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3. 두 가지 변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그의 95개 조항을 독일의 비텐베르크(Wittenberg)성 교회의 문에 못 박았던 같은 해에 라파엘은 로마에서 그의 유명한 현성용(한문-Transfiguration)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두 사건은 공통점이 있다. 루터의 행위는 개신교주의 탄생을 알렸고, 라파엘의 그림은, 의도적은 아니었지만, 개신교 정신을 요약하였다.
그 그림은 그리스도께서 산 위에 서 계시고 귀신들린 자가 골짜기에서 희망의 눈초리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막 9:2-29 참조).


산 위에 있는 제자들과 골짜기에 있는 제자들은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을 묘사한다. 산 위에 있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기를 원했고 외관상 아래 골짜기의 필요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듯 보였다. 각 시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필요를 멀리 등지고 "산"위에 초막을 세웠다. 그들의 경험은 활동이 없는 기도이다.


반면에, 골짜기에 있었던 제자들은 기도없이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귀신을 내어쫓으려는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없이 다른 이들을 위해 활동하는 덫이나 다른 이들을 위한 활동 없이 기도만 하는 덫 중 하나에 걸려 있다. 이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들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


1) 참된 변화.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의 의지, 마음, 소망, 그리고 품성을 일변시킴으로써 사람들을 당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성령은 신자들의 사고방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여전히 썩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남아 있지만 성령의 열매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가 이제 그들의 생활 방식이 된다.


우리가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당신 자신의 것과 같게 하시고 우리의 사상과 목적을 당신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도록 혼합시키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충동에 따라 실행하더라도 그분을 순종하게 될 것이다. 세련되고 성화된 의지는 그분의 봉사사업을 수행하는 데서 가장 드높은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두 종착점. 그리스도의 변형되심은 또 다른 뚜렷한 대조를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변형되셨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골짜기에 있었던 그 소년도 변형되었다. 그 소년은 악마의 형상으로 변형되었던 것이다(막 9:1-29을 보라). 여기서 우리는 두 대조적인 계획들 즉, 우리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사단의 계획이 예시된 것을 본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유 24)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사단은 우리를 타락된 상태에 묶어두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인생에는 끊임없는 변화가 수반된다. 중립지대는 없다. 우리는 고상하게 변화되어 가는 중에 있거나 타락해 가는 중에 있거나 그 어느 하나에 속한다. 우리는 "죄의 종"이나 "의의 종"(롬 6:17, 18)중 하나에 해당된다.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는 자가 우리를 차지한다. 만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점유하시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백성이 될 것이다. 성령이 충만한 생애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 10:5)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 살면 생명과 변화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며 우리의 최후 멸망은 불가피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완전. 성서적 완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1. 성서적 완전. "온전한" 혹은 "완전"이라는 단어는 "완성된", "옳은", "평화로운", "건전한", "완전한" 혹은 "흠잡을 데 없는"을 뜻하는 히브리어 탐(tam) 혹은 타밈(tamim)을 번역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헬라어 텔레이오스(teleios)는 "완성된", "완전한", "다 자란", "성숙한", 충분히 계발된",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한"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인간에 대하여 사용될 때 그 단어는 상대적 의미를 지닌다.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욥은 모두 불완전한 점을 가지고 있었지만(창 6:9, 17:1, 22:18; 욥 1:1, 18) 각기 완전하고 흠이 없는 자로 묘사되었다(창 9:21, 20장; 욥 40:2-5).
신약에서 완전한(perfect)은 접할 수 있는 최선의 빛에 따라 살아서 그들의 영적, 정신적, 그리고 신체적 능력의 가능성에 도달한 성숙한 사람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고전 14:20; 빌 3:15; 히 5:14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무한한 그리고 절대적인 영역에서 온전하신 것처럼 신자들이 그들의 유한한 영역에서 온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5:48 참조). 하나님께서 보실 때, 완전한 사람은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봉사하는데 전적으로 마음과 생애를 헌신한 사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승리의 생애 가운데 즐거워하면서 받은 바 모든 빛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이다(골 4:12; 약 3:2 참조).


2.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완전. 우리가 어떻게 완전하게 될 수 있을까?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완전을 가져다 주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완전한 품성이 우리의 것이 된다. 사람들은 "완전"이 그들의 타고난 소유물이거나 혹은 소유권이 있는 양 결코 독립적으로 그것을 주장할 수 없다. 완전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인간은 의를 얻을 수 없다. 그분은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성화)과 구속함"(고전 1:30)이 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특질들이 우리의 완전을 구성한다. 그분은 우리의 성화와 구속을 단번에 이루셨다. 아무도 그분께서 하신 일에 보탤 수 없다. 우리의 결혼 예복, 혹은 의의 두루마기는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의해 만들어졌다. 성령은 이제 그 완성품을 취하시사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 재현되게 하신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엡 3:19) 될 수 있다.


3.. 완전으로 나아가라. 3신자로서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영적 성숙에 이르기까지 성장한다. 그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사들을 통하여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발전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어린아이 시절의 경험을 뛰어넘어(엡 4:14), 그리스도인 경험의 초보적인 진리들 이상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으며, 성숙한 신자들을 위하여 준비된 "단단한 식물"(히 5:14)을 섭취해야 한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 2)고 말했다. 그는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고 말했다.
성화된 생활은 모진 어려움이나 장애가 없는 생활이 아니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훈계하였다. 그러나 그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인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 13).


그는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3, 14; 마 24:13)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히 10:26, 27)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당부는, 그리스도인들은 "순전히 사법적인 칭의와 성화 이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 준다. 구원은 항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긴 하지만 그들은 품성의 성결을 필요로 한다. 하늘 가는 권리 증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달려 있다. 칭의에 덧붙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이 증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내재에 의하여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적합성을 준비한다. 이 적합성은 구원이 '성취되었다'는 증거로써 인간의 도덕적 품성에 드러나야만 한다."*
인간의 용어로 위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끊임없는 기도는 그 발전의 매 단계마다 완전한, 성화된 생애를 사는 데 필수 불가결하다. "이로써...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 10).

매일의 칭의. 성령 충만한 성화된 생애(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생애)를 살고 있는 모든 신자들은 매일의 칭의(그리스도께로부터 부여받는 칭의)를 계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의식적인 죄들과 부지 중에 지을 수도 있는 과오들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의 죄악됨을 깨닫고 다윗은 그의 "숨은 허물"(시 19:12; 렘 17:9 참조)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특별히 신자들의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고 보증하신다.

구원의 경험과 미래
우리의 구원은 부활하여 영화롭게 되거나 하늘로 승천할 때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성취된다. 하나님은 영광화를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과 당신 자신의 찬란한 영광을 나누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모두가 고대하는 소망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기 위하여"(히 9:28, NIV) 재강림하실 때 이 일이 성취된다.

영광화와 성화.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은 미래의 구원, 즉 우리의 죽을 몸의 영광화를 위한 조건의 하나이다. 바울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고 말하면서 다른 곳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 14)고 보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하늘의 궁전에 있다(골 3:1-4). "성령에 참예한 바"된 사람들은 실제로 "내세의 능력을 맛"(히 6:4, 5)보았다. 주님의 영광을 깊이 생각하고 우리의 시선을 매력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스런 품성에 고정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고후 3:18)른다. 우리는 재림 때 경험하게 될 변화를 위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최종적 구속과 하나님의 자녀로의 입양은 미래에 있을 것이다. 바울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며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9, 23; 엡 4:30 참조)고 말한다.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이 사건은 "만유를 회복하실 때"(행 3:21)에 일어난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세상이 새롭게"됨(마 19:28, "만물의 쇄신", NIV)으로 부르셨다. 그 때에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어떤 의미로 양자됨과 구속(혹은 구원)은 "이미" 성취되었고, 또 다른 의미로 그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성서적 견해로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구속주로서 그리스도의 사업의 전체 범위에 대한 연구가 그 해답을 제공해 준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초림과 연관시켰다. 역사적인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하늘 봉사를 통하여 우리의 칭의와 성화는 단번에 확보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미래의 구원 즉 우리의 몸의 영광화를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시켰다.
이와같은 이유로 바울은 과거에 있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십자가에 비추어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하고, 우리의 몸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장래에 오실 것에 비추어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하였다'고 동시에 말할 수 있었다."*
우리의 미래의 구원을 도외시하고 우리의 현재의 구원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부정확하고 잘못된 이해를 초래한다.

영광화와 완전. 어떤 이들은 영광화가 가져올 궁극적 구원이 이미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잘못믿고 있다. 저 헌신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그의 생애가 끝나갈 무렵 자신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성화는 평생의 과정이다. 현재의 완전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최종적으로 변화되는 일은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다윗, 솔로몬, 그리고 베드로의 생애는 모든 이들에게 심각한 경고가 된다. "생명이 지속되는 한, 확고한 목적으로 애정과 정욕을 감시할 필요가 있다. 내부의 타락과 외부의 유혹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이 진전되는 곳에는 사단은 언제나 유혹이 영혼에게 압도적인 세력으로 엄습하도록 상황을 그렇게 조성해 놓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지지 않는 한 한순간도 안전할 수 없다. "*


우리의 마지막 창조적 변화는 썩지 아니할 것과 불멸성이 우리의 것이 될 때, 성령께서 원래의 창조를 완전히 회복시키실 때 성취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납되는 근거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의 특질이나 흠없는 행위,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 우리가 가납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구원하는 의는 유일하게 의로우신 사람이신 예수로부터 나오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선물에 아무 기여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의롭지 못하다(롬 3:10). 독립적인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에 불과하다(사 64:6; 단 9:7, 11, 20; 고전 1:30을 보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랑에 반응하여 행하고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가납의 기초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 가납은 그리스도의 일로 확인되었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모셔오심으로 성령은 그 가납을 가져다주신다.


우리의 가납은 그리스도의 의롭다 하시는 의에 기초되는가 혹은 성화시키는 의에 기초되는가 아니면 둘 다에 기초되는가? 존 칼빈(John Calvin)은 "그리스도께서 나뉘어 질 수 없듯이 이 둘 즉 그리스도 안에 함께 연합되어 있다고 우리가 인지하는 바 칭의와 성화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봉사를 그 전체적인 면에서 보아야 한다. "칭의와 성화사이의 차이점들을 상세하게 정의하려"함으로 이 두 용어들에 관하여 억측하는 일을 피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지극히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영감(의 말씀)보다 더 상세하게 하려고 시도하는가?"*


태양이, 서로 나눌 수는 없지만 각기 독특한 기능을 보유한 열과 빛을 가지고 있는 것과 꼭같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뿐 아니라 거룩함(성화)도 되셨다(고전 1:30). 우리는 온전히 의롭다 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온전히 성화된다.


성령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가납의 유일한 경험을 우리에게 적용하시어 갈바리의 "다 이루었다"를 우리 마음속에 가져오신다. 십자가는 이 "다 이루었다"는 가납을 얻으려는 인간의 여타 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마음속에 모셔오고,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구원에 대한 유일하고 진정한 자격과 적합성을 마련해 주심으로 성령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가납의 유일한 근거를 만들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