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Hardy -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1891)4.
시월 그믐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테스가 한밤중에 말을 타고 체이조 숲 속에서
난생 처음 무서운 경험을 겪은 지 몇 주일이 지난 뒤였다.
아직 이른 아침 테스는 무거운 짐을 들고 더버빌의 양계장을 나왔다.
등 뒤의 지평선을 노랗게 물들인 빛은 테스의 눈 앞에 보이는 산마루를 환히 비쳐 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테스는 걱정하는 어머니의 목에 매달려 눈물을 흘리며
숲 속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가난에 시달린 더버빌 부인은
"그래, 그러고도 넌 그 사람더러 결혼하자구 말을 안했단 말이냐?
그대로 바보처럼 집으로 돌아오다니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일단 그런 일이 일어난 이상 넌 버젓하게 그 사람에게 결혼 신청을 할 수 있지 뭐냐?"
"어머니도 참, 결혼이라니요. 전 그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걸 어떻게 해요"
"사랑하지 않는다구..."
어머니는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계속 책망을 했다.
"여자란 건 그렇게 되고 나면, 어떠한 남자한테라도 따라가게 마련이란다.
더구나 알렉 같은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지.
남자 치고 그만하면 훌륭하고 게다가 부자가 아니냔 말이다"
알렉 같은 남자의 성질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테스는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는 어머니를 테스는 슬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머니, 저에겐 그 남자를 사랑할 마음이 도무지 없었어요.
저쪽에선 여러 가지로 말해 왔지만"
"아내가 될 생각이 없었다면 좀더 정신을 차렸어야 할 게 아니냐?"
테스는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남자라는 건 정말 징그럽고 무서운 것이라고 왜 진작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테스의 아름다운 큰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흘려내렸다.
그러나 이미 도리가 없었다.
자기는 이제 처녀가 아니다.
비록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속절없이 정조를 빼앗긴 여자였다
테스에게 심신이 모두 괴로운 날이 계속되었다
해가 바뀌고 봄이 왔다.
그리고 불행을 안은 채 숙명의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
테스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 운명을 중오했으나
일단 태어난 생명에 대해서는 애정을 느껴 아이를 안고 기도했다
"오, 자비로우신 주님이시여!
이 가련한 어린아이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에게는 어떠한 벌을 주신다 해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만은 부디 많은 복을 주시옵소서"
아이는 사생아였으므로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 없었다.
아이는 튼튼하지 못했다.
테스는 어느 날 밤 동생들을 불러 자신이 신부를 대신하여 아이에게 세례를 주겠다고 말했다.
테스의 얼굴은 맑고도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테스는 이 가련한 아이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확고히 생각했다.
자신이 세례를 주어도 이 아이는 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순박한 믿음이었다
테스는 어린아이를 안고 물이 담긴 그릇 곁에 서고
동생은 교회에서 하듯이 기도서를 펴들고 언니 앞에 섰다
"이름을 뭐라고 지을 테야?" 하고 동생이 물었다.
테스는 구약 성경의 소로우라는 이름을 생각해 냈다.
그리고 자기의 자식을 위한 신성한 생각으로 선언했다.
"소로우,
아버지이신 주님과 주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을 받들어
나는 너에게 세례를 주노라"
테스는 아이의 머리에 물을 뿌렸다.
"우리들은 이 아이를 받아 십자가의 표시를 너에게 하노라"
테스는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이 소로우라고 이름지은 갓난아이는 곧 죽고 말았다.
함부로 이 세상에 뛰어든 자 사회의 법도 모르는 염치 없는 자연이 준 사생아는
불과 며칠이라는 시간을 영원한 때로 알고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테스는 변했다.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성숙해진 그녀의 눈은 깊었으며
차분해진 표정이 그녀의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트란트리지에서 돌아온 지 2년 남짓한 5월 어느 날 아침
테스는 어느 목장에 취직하여 집을 떠났다.
모든 기억들로부터 해방되어 자연의 딸로서만 살아가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전세 마차에 몸을 싣고 스타워카슬이란 조그만 읍내를 향했다.
이번 길은 첫번째 집을 떠나던 때와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스타워카슬에서 마차를 갈아 타고 웨터베리를 거쳐 아름다운 탈보나이조의 낙농장에 이르렀다.
한없이 뻗은 녹색의 초원 희고 검고 붉은 무늬가 아롱진 소의 무리가
장미빛처럼 빛나는 낙조 속에서 노닐고 있는 곳 젖 짜는 곳에서는
여러 남녀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부르며 일을 하고 있었다.
테스는 2년 동안 고민에 찬 세월을 고향에서 보낸 뒤
꿈을 꾸며 맑고 즐거운 생활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이었다.
젖 짜는 여인으로서 테스는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이 건강한 생활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슬픈 추억으로 고통에 잠겼던 침울한 눈은 다시 이 맑은 태양 속에서 빛났으며
창백한 볼에도 처녀 시절의 아리따운 장미빛이 감돌았다
이 목장에는 다른 일꾼들과 달리 기품이 있고 상당한 교육을 받은 청년 하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에민스터의 유명한 목사의 막내 아들인 에인젤로
학교를 나온 후 목장의 견습생으로 여기 와서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특이한 존재였으므로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청년이었으나
그는 여자들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목장 주인도 이 청년에게는 젊은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경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