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스타일’ 싸이에 세상은 왜 열광하나
배설의 통로이자 나를 잊게 하는 위로
암울한 시대 대중이 원하는 바로 그 스타일
-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
▲ ‘강남스타일’로 세계적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싸이가 지난 8월 14일 오후 7시 강남역 사거리에서
‘게릴라콘서트’를 열었다. 약 1700명(경찰 추산)이 이날 콘서트에 참석했다.
‘오렌지족’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신세대 담론의 출현 이후 ‘강남’은 대한민국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신세대 문화가 등장한 지 20여년이 흐른 지금, 어쩌면 비주얼적으로는 ‘강남’과 가장 거리가 멀다면 먼, 그리고 연령적으로도 이른바 ‘K팝’ 세대라기보단 ‘가요’ 세대에 가까운 30대 중반의 유부남 뮤지션이 발표한 ‘강남스타일’의 선풍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세계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말춤’으로 알려진 단순하고도 독특한 안무를 앞세운 이 노래는 12월을 겨냥한 연말 음반시장과 더불어 가장 뜨거운 시장인 2012년 여름 시장을 완전 석권해 버렸다. 한류의 대표적 아이돌 스타의 신곡도 온라인 음원차트의 1위를 3일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춘추전국의 판도에서 ‘강남스타일’은 거의 한 달째 압도적 1위를 달리며 10년 이상 어린 수많은 경쟁자들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본명 박재상(35), 예명을 ‘싸이’로 쓰는 남자. 한국과 해외에서 거의 동시에 일기 시작한 싸이 신드롬은 2012년 한국 대중음악계, 나아가 사회문화 현상으로도 놀라운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싸이 바람은 증시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1년 국내 음반시장 점유율은 1위를 기록했지만 빅3 중 상대적으로 해외 시장 영향력은 떨어진다고 평가되었던 그의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와, 지분 관계는 전혀 없지만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반도체 검사장비 회사 ‘디아이’의 주가가 싸이 테마주로 거론되면서 한 달 동안 15% 동반 상승하는 이른바 ‘싸이 효과’를 누렸다.
상반기 신인 밴드 버스커버스커의 놀라운 돌풍에 이어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11년차 베테랑이 펼치고 있는 욱일승천의 기세는 도대체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거의 동시에 출시되며 초반엔 박빙의 모습을 보였던 원조 한류스타 보아의 일곱 번째 앨범을 따돌리고 독주를 거듭하고 있는 싸이 혹은 싸이 음악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인가?
보아를 제치다
‘강남스타일’을 앞세운 싸이의 6집 ‘part 1’이 역시 2년 만에 ‘Only one’을 들고나온 보아를 가볍게 제친 것은 어쩌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이 남녀 뮤지션은 사실 체급 자체가 다르다. 게다가 보아는 이번 앨범 출시 전 화제를 몰고 온 오디션 프로그램 ‘K팝 스타’에서 SM엔터테인먼트 군단의 대표자로 나와 양현석 및 박진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킨 사전 마케팅까지 탄탄하게 다져진 상태였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음악시장을 평정하며 탄탄대로를 걸어온 보아와는 달리 2001년 데뷔한 싸이의 지난 11년은 롤러코스터와 같은 우여곡절로 점철된,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언제 사라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수많은 ‘연예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미국 버클리음악학교를 마친 그는 동창이었던 래퍼 조PD의 앨범에 게스트로 참여하며 운을 뗀 후 2001년 랩음악 ‘새’를 통해 엽기 코드 바람을 일으키며 화려하게 데뷔한다.
랩과 댄스의 시대를 몰고 온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지 9년이 지난 시점, 새로운 밀레니엄의 벽두에 싸이는 진지하고 공격적인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찰나적 유흥의 댄스홀 광란이라는 극단적 두 꼭짓점을 오가고 있었던 한국 랩음악의 지평에서 화해하기 어려웠던 이 두 꼭짓점을 ‘통속성의 유머’라는 하나의 몸통 안으로 통합시켰다.
‘싸이코’에서 앞부분을 따온 이름부터 수상한 함의를 드러내는 이 랩 청년의 전략적 기조를 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그는 거침없이 솔직하다. 중의적인 전술을 구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서태지와 다르고 비속어를 구사하긴 하지만 자신을 은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PD와 다르다. 그에게 모든 신비화는 위선으로 보인다. 음악인에게는 운명과도 같은 천형인 음악적 재능에 대해서도 그는 “나는 음악에 별로 재능이 없는 것 같으며 앨범 두 장 내면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공공연히 얘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그 자신과 렉시, 이승기, DJ DOC 같은 다른 음악인을 위해 놀라운 곡들을 지속적으로 썼다.
그는 엽기가 아니다
1972년생인 서태지와 꼭 5년 아래인 싸이 사이에는 묘한 시대의 간극이 자리하고 있다. 서태지는 ‘음악 이외의 삶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헤비메탈 키드로 성장했고 1980년대 흑인음악의 키워드인 랩을 수용하며 음악적이고 사회적 의제들을 진지하게 표명하는 1980년대 한국의 시대적 감수성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 이에 비해 싸이는 댄스뮤직과 산문적 감수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주얼 이미지가 모든 것을 지배하기 시작한 1990년대 초에 민감한 10대 중반에 들어섰고 향락을 개성적으로 수용하는 본능에 온몸을 맡겼다.
전형적인 강북 중산층 가정 출신인 서태지와는 달리 싸이는 강남 신흥 부르주아의 아들인 것도 특이하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강남의 무도장들을 섭렵했고, 뮤지션으로서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댄스홀의 무대에선 유별나게 튀는 존재였다. 그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클럽의 주방에 들어가 요리사의 유니폼과 국자를 빌려 플로어에서 춤을 추며 자신에게 집중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싸이의 본령은 결코 ‘엽기’가 아니다. 그는 단 한번도 ‘엽기’를 주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세상의 시선이 너무나 쉽게 그를 엽기로 몰아간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랩의 주절거리는 산문성이 집중적으로 구현되어 있는, 예상밖으로(?) 탄탄한 그의 데뷔 앨범과 성공적인 데뷔 직후에 얻어맞은 대마초 파동 뒤에 온갖 ‘19금’ 딱지를 더덕더덕 붙이고 등장한 두 번째 앨범 ‘성인용’(2002)을 꼼꼼히 들어 보면 랩에 대한 그의 진지하고도 순정적인 신뢰와 헌신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클럽댄스 뮤직의 장식물로 전락해 버린 이 땅의 랩 풍토에 대해 그는 20개 트랙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앨범으로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다. DJ DOC가 숱한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랩 정신의 구현이 이 뒤죽박죽인 ‘싸나이’의 머리와 입에선 마치 누에가 실타래를 치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새’는 다시 언급하지 않더라도 영화 ‘친구’의 싸이 버전인 ‘동거동락’이나 혹은 ‘쇼킹! 양가집 규수’에서, 그리고 ‘신고식’이나 ‘나쁜 년’ ‘처녀논쟁’ 같이 세태를 호방하게 혹은 더티하게 뒤집는 그의 도도한 변설에서 중세시대 저잣거리의 능청스러운 이야기꾼을 연상케 한다.
금기를 넘나드는 예능 본능
그는 주류의 브라운관에 겹치기 출연을 불사하면서도 립싱크를 수치로 여기며 라이브를 고집했고 아이돌 스타가 되기에는 조금 나온 배를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도 않았다. 그는 엽기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반짝쇼의 주재자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곡을 스스로 만들고 프로듀싱하는 주목할 만한 싱어송라이터이며 랩의 명예를 오랜만에 되살린 훌륭한 래퍼의 한 명일 뿐이다. 그런 그를 엽기의 상징으로 몰고 갔던 상황과 논리가 정말이지 엽기적이었다.
그는 서태지나 신해철과는 또 다른 방면에서 금기의 문턱을 무너뜨렸다. 그의 언어는 정제되지 않았고, 순간순간 위태로운 마초적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것들이 악마적이거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의외로 치밀하게 계산된 유머의 힘과 걷잡을 수 없이 질주하는 유흥 혹은 예능 본능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이 즐거움으로 수렴되는 세계, 낄낄거리고 키득대는 지금 이 순간의 완전연소가 싸이만의 공간을 창출했다. 그가 데뷔 초의 대마초 파동이나 세 번째 앨범의 곡 ‘챔피언’으로 정점에 오른 후 터진 공익근무 파동과 소송, 그리고 군 재입대라는 결정적 타격을 받고서도 재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여기서 나온다.(유승준과 이회창의 경우를 상기하라.)
그는 데뷔 3년 만에 스타덤에 올랐지만 아무도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이상한 스타였다. 그에겐 모든 것을 무장해제하고 순간을 불타오르게 집결시키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것을 발전시켜 싸이는 자신만의 독보적 비즈니스 모델이자 킬러 콘텐츠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콘서트였다.
▲ 싸이 게릴라콘서트가 열린 지난 8월 14일 오후 강남역 주변은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나는 라이브 아티스트”
힙합이 언더그라운드의 변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하는 2000년대 초반에 그는 때 이른 기로에 섰다. 오프라인 음반시장은 붕괴 직전이었고 댄스뮤직은 콘서트 시장에서 환영받는 콘텐츠가 아니었다. 이것은 2002년 월드컵의 거리공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수천에서 수만 명이 운집한 거리의 무대에서 댄스뮤지션들은 기를 펴지 못했고 그때까지 결코 주류라고 할 수 없었던 록밴드들이 펄펄 날았다. 데뷔 이후 8년 가까이 스타덤에 오르지 못했던 윤도현밴드(지금의 YB)가 국민밴드로 부상한 것도 바로 이 시점이다.
2002년 월드컵은 윤도현에게 비약의 계기를 제공했지만 싸이에게 전환의 모멘트가 되었다. 싸이는 명민한 더듬이로 자신의 아슬아슬한 출구를 감지한다. 그는 래퍼이자 댄스뮤지션이면서도 록밴드 편성의 반주로 라이브콘서트를 수행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1990년대 유일의 주류 록밴드였던 넥스트의 수장 신해철과 음악적 교류를 가지며 라이브의 노하우를 쌓았다. 2004년 박노해 시인의 트리뷰트 앨범에서 넥스트와 같이 ‘하늘’을 녹음한 것은 그런 방향전환의 작은 결과물이다.
그는 립싱크나 MR(반주 녹음)가 아닌 순정 라이브콘서트의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그 자신의 본령인 다양한 퍼포먼스를 탑재함으로써 ‘보고 듣고 즐기고 노는’ 하나의 거대한 유흥 공간을 기획한다. 그가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준 엄청난 열정은 그의 음악팬이 아니거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까지 매료시켰고 4시간을 단숨에 질주하는 그의 콘서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최고의 명품 공연으로 떠올랐다. 그가 지금 누리는 명성의 결정적 기반은 다름 아닌 그의 콘서트에서 생성된 것이다.
그가 획득한 승리는 그저 한번 스치고 지나가는 트렌드나 우연의 결과물이 결코 아니었다. 댄스뮤지션으로서는 거의 진입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라이브 아티스트의 월계관을 스스로 만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얹었다. 무대 기획력에 관한 한 그는 김장훈과 함께 당대 최고이다. 싸이의 콘서트 시리즈는 그저 유수한 히트곡에 기대 늘 거기서 거기였던 기존의 콘서트 스타들의 아성을 단숨에 허물어뜨렸다. 그것이 가능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가 군림하는 주인공이기보다 수요자들의 욕망에 충실하게 부응하려는 엔터테이너 정신으로 무대를 만들었던 데 있다. 그의 콘서트에 매료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입소문을 내는 바이럴 마케터(Viral Marketer)가 되어 주었고, 이들에 의해 소리 소문 없이 퍼져 나간 입소문은 봄가을 전국 대학축제의 섭외 1순위로 그를 올려 놓는다.
직구로 승부한다
그는 재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소모하지 않았다. 그의 앨범엔 수많은 피처링 게스트들로 가득하다. 그는 ‘리쌍’이나 ‘다이나믹 듀오’ 등 같은 계열의 래퍼들을 초청하기도 하지만 이선희나 김완선 같은 한 시대 전의 예상밖 인물들을 초청하여 외부로부터 신선함을 공급받는다.
‘6甲’이라고 명명한 이번 6집에서도 성시경이나 윤도현, 그리고 박정현 등 각 장르에서 당대 최고의 보컬리스트로 손꼽히는 이들을 초청하여 다양한 음악적 색깔을 하나의 앨범 안에서 구성한다.
싸이의 멜로디 라인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난해한 리듬을 구사하지 않는다. 그는 머뭇거림 없이 단숨에 노래를 듣는 이들에게 날아가 박히는 직진성을 선택한다. 어설픈 테크닉으로는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강남에서 성장하고 활동하고 있지만 전혀 ‘강남스타일’이 아니면서 ‘강남스타일’을 통해 강남은 물론 강남이 아닌 지역의 대중들과 단숨에 소통하는 그의 텍스트는 쉽고 간결하다.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말춤’ 또한 아크로바틱한 고도의 사위가 아니라 미취학 아동도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다. 뮤직비디오 또한 유재석이나 노홍철, 현아와 같은 수퍼 게스트들이 등장하지만 화면은 결코 비싸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의 미학은 일종의 ‘B급 감수성’이며 그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그것을 일관되게 통일시킨다.
나는 그대의 연예인!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모든 세대들이 당면하고 있는 불안에서 탈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위안과 안도감을 제공하는 요인들이 아닐까? 그의 음악과 춤, 그리고 예능 감각은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내일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대다수 마이너리티들이 요청하는 망아(忘我)의 상상력이다. 그의 텍스트는 딱 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그래서 이들은 싸이의 텍스트를 모방하고 복제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우울한 존재를 확인하고 동시에 망각한다.
‘용감한 녀석들’이나 정형돈 같은 개그맨들의 노래가 올해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싸이는 저 1970년대 전 지구적인 경제 불황에서 서구 대중들의 동반자가 되어준 ‘토요일 밤의 열기’에 나오는 존 트라볼타이며, 그의 콘텐츠는 불안한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디스코이다. 2006년 네 번째 앨범의 ‘연예인’에서 그는 이렇게 읊어댔다.
‘…나의 그대가 원한다면 어디든 무대야/ 유머러스한 남자가 요즘엔 추세야/ 남자다운 남자는 낭자를 기쁘게 할 줄 알아야 해/ 같이 놀고 가지고 놀고 잘 놀 줄 알아야 해/ 오늘부로 너의 연예인이 되기 위해 해 데뷔 무대/ 코믹 멜로 액션 에로 맘에 드는 걸 찍으시죠/ 지금부터 슛 들어갑니다 영화 한 편 찍으시죠/ 엔딩에 키스신 있다 참고하시죠/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항상 즐겁게 해 줄게요/ 연기와 노래 코메디까지 다 해줄게/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평생을 웃게 해줄게요/ 언제나 처음 같은 마음으로…’
[2220호] 2012.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