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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박사와 제2차대전

Joyfule 2020. 3. 30. 00:50



李承晩 박사와 제2차대전

 

장석윤

 

1919년 3월, 우리 민족의 독립을 외치는 3 · 1운동이 요원의 불길 같이 퍼지고 있을 때 나는 강원도 횡성에서 보통학교의 같은 졸업반 학우 몇몇을 규합해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다가 그 비밀이 발각되어 서울로 피신을 하였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이때는 내가 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중고등학교)의 입학전형을 위해 서류를 준비해 둔 것이 있어서 나의 상경은 곧 합격과 진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서울에서 목격하게 된 것은 매일 만세운동관계로 일본헌병들의 오라줄에 묶여서 수감을 당하는 수백명씩 되는 우리 동포들의 처참하고 가련한 모습이었으며 나는 일본의 압제에 대해 민족적인 의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나는 당시에 발행되던「매일신문」에서 우리 임시정부의 소식과 李承晩 박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으로 국외의 독립운동을 짐작하게된 나는 이 운동에 참여할 뜻에서 고보재학시절부터 미국유학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당시 한국인에게는 여간해서 내주지 않던 여권을 신청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침내 졸업후에 총독부의 다나까라는 외사과장을 만나 담판끝에 극적으로 여권을 받아내는데 성공을 하였었다.

 

내가 李박사를 처음으로 뵙게된 것은 1924년 3 · 1절날 안씨가 후원하는 뉴욕의 감리교회에서 이었다. 이때 李박사께서는 기념사에서 우리는 나라 없이 살수가 없는 것이니 이렇게 외국에 나와있는 교포들이 작은 힘이라도 하나로 뭉쳐서 나라의 독립을 찾아야 한다고 동석자들을 계발하고 격동하여 우리는 많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李박사는 3 · 1운동이 일어난 후 4월 23일 13도대표들이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李承晩박사를 수반(집정관총재)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선포되었다는 통지를 받게되자 5월에 총재부를 워싱턴에 설치하고 6월 14일에는 영 · 미 · 불 · 伊 등 여러나라에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정부가 수립된 것을 정식으로 통고하였으며 6월 27일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외교활동중인 김규식박사에게 훈령을 보내는 한편 끌레망소 평화회의의장에게 일본에 대한 우리 임시정부의 정책을 간명하였었다.

 

그리고 8월 25일에는 행정령으로 미국과 구주지역에서 임시정부를 대표할 상설기구로 대한민국특파 구미주찰위원부(The Korea Commission) 를 설치하여 김규식박사 외 2명을 위원으로 임명하고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위원부는 이후에 구미위원부라 부르게 되고 해방후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통할하고 외교활동을 주관하였다. 이와 같이 李박사는 시종일관하게 우리 임시정부의 합법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마침내 민족의 독립을 회복하고 우리를 나라있는 국민되게 하신 어른이다.

 

우리의 독립이 단시일내에 회복될 수 없다고 판단한 李박사는 이미 1913년에 하와이에서 한국인학교를 설립하여 교포청소년에게 민족교육을 시작했었고 1918년 12월 23일에는 종파를 초월한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며 1921년 7월 7일에는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이박사가 미국에서 이룩한 교포사회의 교육과 종파및 독립운동의 세 가지를 연결시킨 3대사업은 우리 민족 지상의 과업인 조국광복을 달성하기 위한 장기적 대방략이었을 뿐만아니라 일본의 엄청난 선전으로 우리나라가 지도상에서 말살당해 세계가 전혀 한국(Korea)을 모르던 당시에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크나큰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李박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남모를 형극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한번은 구미위원부의 재정난으로 몇달동안 사무실의 임대료를 내지 못하게 되자 건물주인 스테거스 변호사는 드디어 그 명도를 요구하기에 이르었다. 그리하여 이박사를 만나게된 스테거스씨는 그분의 고결한 인뭄과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려는 거룩한 일념에 감동되어 오히려 사과를 하고 그 후에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열령히 돕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박사는 만나본 사람이면 모두가 그분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 수가 있었고 인격적으로 감화를 받게된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박사는 미주각지를 순회하며 영어강연에서나 신문 · 잡지에 기고하여 이미 일본군국주의자들은 미국에 대해 전쟁준비를 완료하고 있는데 미국은 잠자고 있다고 경고를 하고 조선왕조말에 미국이 한국과의 수호조약을 배신한 일을 들어 한국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하였다.

 

드디어 이박사는 1938년 12월에 그의 영문저서인 Japan Inside Out의 초를 잡아 이듬해에 집필을 완료하고 1941년 정월에 초판을 간행하였다. 일제의 전쟁도발을 예언한 이책은 처음에는 일반의 주의를 크게 끌지 못하였으나 이해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그 선견지명에 놀라 모든 서점에서 매진되고 말았다.

 

평소에 미일전쟁이 있을 것을 확신하였던 이박사는 한국독립을 위해 외교상 정책을 세워 그당시 중일전쟁의 와중에 있던 우리 임시정부에 그것을 알려 추진하기로 하였다. 정책 중에는 임정의 대일선전포고와 한국인의 대일참전 및 임정의 국제승인 등이 있어 모두가 우리의 독립전취와 임정의 국내집권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들 이었다. 그 당시 세계의 어느 대정치가들 보다 국제정치를 정확히 분석하고 있던 이박사는 전후에 있을 소련의 팽창정책에 따라 그들이 앞세울 한국인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진영간의 분열과 내란을 막기 위해서는 임시정부가 국제승인을 받고 국내에 들어가 집권을 해야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박사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지 두달후 미국각지의 교포들을 와싱턴에 불러 3 · 1을 기해 한국인 자유대회를 거행하였다. 라파이엩 호텔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이박사와 친분을 가지고 한국독립을 후원하는 각계의 유명인사들과 교포대표들을 합해 약 3백명이 참석하였는데 이 자리에는 고종황제와의 옛일을 회고하며 눈물을 흘리고 앉아있던 헐버트 박사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나는 이 대회에서 3 · 1독립선언문을 읽었는데 당시 주캐나다 미대사 부라운씨는 축사에서 "나는 이 기쁜날 한국이 이미 독립이 된것을 보고 왔습니다"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실은 이날 이른 아침부터 이미 폐쇄된지 오랜 일본대사관의 국기게양대에는 큰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껴서 길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화제가 되었었는데 이것은 이박사의 암시에 따라 비서인 장기영씨와 이문상씨가 전날밤에 가서 달아놓은 것이었다. 이 대회는 우리 교포들의 단결된 행동으로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국민의 굳은 결의와 독립에의 의지를 미국과 국제사회에 보여준 일대쾌거이었으며 언론계에서도 그 성황을 보도하였었다.

 

이 대회후 나는 이박사로부터 임정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하여 영어하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가기로 자원하여 함께 숙의했으나 이때는 태평양지구의 전황이 너무나 나빴고 경비조달도 어려워서 갈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 이박사는 전쟁발발후 루즈벨트대통령직속으로 설치된 정보부와 관계를 맺고 조국해방의 선봉으로 나를 추천하여 중경을 경유 한국에 전진할 계획으로 101부대를 편성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42년 6월에 미국을 출발한 101부대는 인도의 뉴델리에 도착한 후 전황과 중국내의 사정 때문에 우선 버마작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나는 한국에 직행할 신부대편성을 위해 1944년 7월에 다시 와싱톤으로 돌아갔다. 나는 이 기간중 작전수행과 함께 이박사의 지시에 따라 김구주석과 통신연락을 담당하였으며 드디어 1944년 4월에는 미14공군기지가 곤명에 설치됨에 따라 그곳에 가서 중경을 드나들며 임정의 정책수행상 두분 사이의 연락임무를 맡았었다. 그후 한국에 직행할 신부대는 진도, 완도, 인제, 구월산 등을 후투지로 선정하여 훈련을 완료하고 대기중에 있었으나 원자탄의 사용으로 일제는 드디어 항복하고만 것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나 현대사에 있어 이박사의 행적은 참으로 크고도 막중하다. 그 어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그대로 대한민국사이며 우리 민족의 수난과 영광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때 이박사의 웅대하였던 조국광복에 대한 구상과 경륜이 실현되었더라면 분단도 전란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사를 바로 보고 이 어른의 애국애족하신 독립정신을 본받아 지금의 혼란기를 슬기롭게 극복해서 자유민주통일을 이룩하기 바란다.

 

 

장석윤                                    

■ 1904년생

■ 한국구미위원부에서 독립운동

■ 내무부장관

■ 3 · 4대 민의원

■ 한국불교 반공연합회 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