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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革黨은 때를 기다리는 主體革命 장교 養成所였다

Joyfule 2012. 5. 26. 08:46

 

“民革黨은 때를 기다리는 主體革命 장교 養成所였다”

92년 ‘주사파 지하당’ 첫 등장

채병건.강나현 기자 mfemc@joongang.co.kr | 제271호 | 2012.05.20 입력

 

‘진짜 종북’의 첫 집결은 20년 전인 1992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다. 주체사상을 전면에 내걸고 전국 단위의 지하당을 조직했다는 점에서 그전과 다르다. 그러나 주체에 대한 꿈으로 시작했던 민혁당은 주체의 ‘생얼’이 드러나며 깨졌고, 일부 참여 인사들은 전향해 북한 민주화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민혁당은 종북의 결집이면서 반종북의 시작이기도 하다. 20년 전으로 돌아가 민혁당을 해부하는 이유다.
엄익준 국가정보원 2차장이 1999년 9월 9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증거 물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92년 3월 16일 오전 10시. 서울대 공대 뒤의 관악산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4ㆍ19 기념탑. 이곳에 김영환ㆍ하영옥과 박모씨 등 법대 출신 세 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세 사람은 ‘인간 중심의 주체사상을 지도 사상으로 한다’는 강령을 선언한다. 남한에서 처음으로 주체사상에 기반한 ‘혁명 지하당’이 등장하는 민혁당 창당식이었다.

창당은 치밀하게 준비됐다. 김영환은 총책, 하영옥은 조직책, 박씨는 선전책으로 역할 분담했다. 민혁당의 전신인 반제청년동맹의 기관지였던 ‘주체기치’도 창당을 앞두고 온 세상에 빛을 준다는 의미에서 ‘빛’으로 개명했다. 창당을 한 달 앞두고 세 명은 다시 관악산에서 모인다.

 

김영환=“구체적인 (준비) 사항은 혁명의 이념에 따르자. 이제 창당식으로 온 세계에 우리의 의지를 알리는 일만 남았다.”
하영옥=“당원 성원과 조직도 모두 준비됐다. 당 지도부는 우리 세 명으로 하자.”


전에도 좌파 지하 조직이 있었지만 민혁당은 달랐다. 이전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지하당이었다면 이젠 처음부터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며 주체사상을 당헌ㆍ강령에 내걸었다.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ㆍ영남위원회ㆍ전북위원회 등 도당을 구축해 전국적 단위로 결성된 점도 과거와 달랐다. 이를 주도한 핵심 인물이 김일성 주석도 “눈이 나빠 글자를 확대해서 봤다”며 감탄했다는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이다.

 

86년 운동권은 지하 문건 한 장으로 충격에 빠진다. “일대 센세이션이었다. 강철서신은 파격적으로 김구를 높게 평가하며 이념적으론 오류가 있지만 인민 대중에게 헌신한 인물로 표현했다. 이게 주체사상에서 얘기하는 품성론이었다.”(신지호 새누리당 의원) 북한의 대남단파방송인 ‘구국의소리’를 듣고 주체사상을 배운 김씨는 ‘솔직ㆍ소박ㆍ겸손’의 품성론과 함께 민족해방ㆍ반미투쟁론으로 자생적 주사파의 불길을 당겼다. 북한이 그를 주목한 이유다. 그런 김영환에게 89년 7월 초 ‘김철수’(남파간첩 윤택림)가 접근했다. 당시 상황을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저서 『진보의 그늘』에서 구체적으로 공개했다.

김철수=“북한에서 왔습니다. 김 선생과 통일사업을 논의하고 싶소.”

오)을 들으면 ‘제가 김 선생에게 메시지를 전했다’는 말이 나올 겁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2년 후인 91년 5월 김영환은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조유식과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 해안에서 북한 반잠수정을 탄다. 이어 평양의 모란 초대소에서 두 사람은 조선노동당에 정식 입당한다. 국정원 수사기록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묘향산 초대소에서 김씨를 만나 “1000명만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면 남조선 혁명은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다음 해 만들어진 민혁당은 주체 혁명을 준비하는 전위대였다. 창당 한 달 후엔 강화군 외포리의 드보크(간첩의 비밀 매설지)에서 40만 달러를 파내 김영환이 민혁당 결성 자금으로 사용했다. 당시 핵심 간부의 얘기다.

-민혁당은 어떤 목적이었나.
“혁명의 준비대다.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이 노출되지 않은 채 유지시키는 게 최대 과제였다. 둘째가 ‘핵심 대열’의 훈련과 확대다. 혁명성의 함양과 혁명 대오의 확장이다. 셋째가 각자의 사업장에서 영향력 확대였다. 선거 등에서 우리가 100명이라면 현실에선 1만 명에게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세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민혁당은 때가 되면 사병을 모아 거사를 일으키기 위한 ‘혁명 장교 양성소’였다.”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
“당원은 100명 규모였고, 예비대인 준당원이 400명 정도였다. 평소 당원 1명이 예비대 서너 명을 관리한다. 관리 대상을 놓고 ‘1년 후 정도면 당원이 가능하다’는 식으로 수시로 보고서를 올렸다.”

-점조직은 어떻게 운영됐나.
“‘단선연계 복선포치(單線連繫 複線布置, 수직적 단선으로만 알게 해 적발돼도 조직 전체의 노출을 막고 라인을 복수로 만들어 하나가 무너져도 다른 라인은 가동되도록 하는 지하당 조직 방식)’라고 한다. 횡적 연결은 절대 금지했고, 서너 명의 세포 단위에서만 서로 알았다. 세포 모임을 할 때도 참석자 중 한 명이 5분 이상 늦으면 곧바로 해산했다. 적발될 경우에 대비해 항상 ‘추모회 준비’ ‘노동 집회 준비’ 등으로 미리 알리바이를 만들어 입을 맞췄다.”

그에 따르면 민혁당은 ‘동창회’로, 민혁당의 전신인 반제청년동맹은 ‘동문회’로 불렸다. 세포 내부에서조차 서로를 ‘김 동지’나 ‘김 형’ 등 가명으로 불렀다. 세포에서 관리하는 인물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 때도 특정 프로그램을 통해 암호화했다. 공안기관의 압수에 대비해 보고서는 늘 PC가 아닌 플로피 디스크에만 저장했다.

이 인사는 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땐 민혁당 지도부로부터 추모식을 지시받았다. 그는 위치는 얘기하지 않은 채 “산에서 세포 모임을 갖고 묵념한 뒤 서로 추모사를 나눴다”며 “다른 세포들에도 같은 지시가 내려갔을 것”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중앙(당 지도부)’에서 ‘김 주석에게 보내는 글’을 쓰라고 해 세포원 모두가 쓴 적도 있었다. “진짜 북으로 보냈는지 아니면 사상 강화 교육이었는지는 지금도 확인되지는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북한을 모델로 삼겠다며 만들어진 민혁당은 주체의 대부 김영환이 북한의 실체를 느끼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91년 그가 경험한 북한은 기대했던 ‘이상 사회’가 아니었다. 김영환과 함께 북한민주화운동에 뛰어든 허현준 ‘시대정신’ 사무국장은 김영환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주체사상에 많은 관심을 갖고 평양에서 토론도 하리라 마음먹고 올라갔지만 막상 현지에선 자유롭게 대답도 못하는 분위기였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답하고, 오히려 서로 감시하는 분위기만 느껴졌다. 주체의 핵심인 인간의 창의성은 없고 관료주의만 가득했다. 북한식 사회주의는 문제가 있었다.”


고민하던 김영환은 97년 2월 서울 종로의 한 레스토랑으로 하영옥과 박씨를 모았다. 당시는 이미 민혁당을 떠나 변호사로 활동 중이던 박씨까지 동원, 민혁당 해산에 반대하던 하영옥을 누르고 2대 1로 당의 해체를 결정했다. 그러곤 다음 해 “북한의 수령론은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선언하며 파문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민혁당이 완전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98년 12월 18일 새벽 거제도 남쪽 100㎞ 해상에서 북한 반잠수정(5t)이 함포 3발을 맞고 침몰했다. 국방부는 함구했지만 대간첩 작전엔 한미연합사 정보참모부가 참여했다. 다음 해 3월 인양된 침몰선에선 ‘원진우’라는 신분증과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에서 구입한 제과점 포장지 등이 나왔다. 수사당국은 관악구 고시촌을 이 잡듯 뒤졌고 봉천동의 한 고시원에서 말레이시아인 진운방으로 위장했던 남파간첩 원진우의 입실 기록을 발견했다.

 

원진우와 하영옥이 같은 승용차를 탔다가 과속 카메라에 잡힌 사진도 찾아냈다. 수사당국은 민혁당 해체를 거부한 하영옥이 당의 재건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원진우를 만나 밀입북하려 했고 그러다 문제가 생겨 원진우만 귀환하다 침몰한 것으로 판단했다. 하씨 등은 99년 당국의 ‘민혁당 사건’ 발표 뒤 기소된다. 민혁당 연루자엔 현재 통합진보당 갈등의 핵심인 이석기 당선인도 포함됐다.

 

2002년 서울고법 판결문은 그가 “93년 8월 하영옥을 만나 ‘경기남부위 상반기 사업총화’를 보고했고… 경기남부위원장으로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다”고 적시했다. 그러나 이석기 당선인은 방송에서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북한과 아무런 연계가 없다”며 이를 부인한다. 하영옥씨는 일부 언론이 그를 놓고 민혁당 재건설을 제기하자 “함부로 소설을 쓴다”며 반발했다.

민혁당으로 나타난 주사파의 등장과 확산은 80·90년대 사회주의 퇴조라는 전 세계적 조류를 거꾸로 올라갔던 대한민국만의 현상이었다. 지금도 종북을 놓고 논란은 계속된다. 전향한 운동권 출신 인사는 “과거 종북 인사들은 이제 교육ㆍ노동ㆍ문화예술 등에서 일자리와 돈이 제공되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며 “자기들만의 물적 기반이 만들어졌으니 종북적 사고에서 벗어났더라도 종북의 허상을 고백하기를 꺼린다”고 주장했다.

 

신지호 의원은 “지금 군부독재로 돌아가자는 우파가 있는가”라며 “우파가 권위주의 군부
독재와 단절한 것처럼 좌파도 종북과 절연해야 진보가 발전한다”고 지적했다.                          [중앙선데이-제270호]

 

 

 

 

주사파 고백 "영장 나오면 팔을 쇠파이프로…"

입력 2012.05.20

'종북혁명' 꿈꾸던 주사파 이광백의 고백 “나를 수령님·장군님 전사로 여겼고 남한을 북한처럼 만들고 싶었다”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주사파(主思派)-. 북한 김일성이 창시했다는 이른바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남한 내 운동권 집단이다. 1980년대 말부터 약 10년간 주사파는 대학 운동권을 장악했다. 일부 핵심 인사들은 간첩선을 타고 북한에 가 밀봉 교육을 받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일탈행위는 민주화라는 거대한 흐름에 파묻혀 주목받지 못했다. 명백한 간첩행위에 대해서도 ‘양심범’ 칭호가 부여됐다. 공안사범에 대한 감형과 사면, 복권도 다반사로 이뤄졌다. 2000년 이후 주사파는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 북한의 실체가 공개되면서 대학가에서도 운동권은 힘을 잃어갔다.

그러나 80년대와 90년대에 ‘주체의 세례’를 받았던 일부는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진보’를 앞세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최근 터져 나온 통합진보당 폭력사태는 대한민국이 과연 주사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대한민국 사회가 처음으로 주사파, 그들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묻기 시작한 것이다. 중앙SUNDAY는 대학시절 ‘김일성의 전사(戰士)’를 자처하는 주사파가 됐다가 뒤늦게 미망에서 벗어나 북한 민주화 운동을 펴고 있는 대북방송협회 이광백(42) 회장을 4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그의 증언은 주사파, 그러니까 이른바 ‘종북(從北)인간’의 탄생과 성장과 소멸에 대한, 여태껏 언론에 공개된 적이 거의 없는 소중한 기록이다.

천천히 걷던 사복 경찰과 전경 20여 명이 10m 앞쯤에서 갑자기 달려왔다. 1991년 12월 6일 낮, 전북 군산 법원 정문 앞. 원광대 법대 학생회장 이광백(21·당시 3학년)을 비롯해 10여 명의 학생회 간부는 동행하던 차기 총학생회장 후보를 에워쌌다. 그를 잡으러 온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달랑 이씨만 연행했다. 이씨는 영문을 몰랐지만 “혁명가는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이겨내야 하니 차라리 좋은 경험이다”라면서 마음을 다졌다. 차는 익산경찰서로 향했다.

4개월 전쯤인 8월, 법대 학생회는 통일자료집에 반제청년동맹의 지하 유인물 ‘주체기치’를 발췌해 실었다. 북한의 무상의료와 교육제도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내용이었다. 민혁당 전신인 반제청년동맹은 89년 김일성의 생일 축하 유인물을 배포한 친북 지하 조직이었다. 이씨는 국가보안법상의 이적 표현물 제작·배포, 집시법 위반, 폭력행위 혐의로 구속됐다. 군산교도소 생활은 괜찮았다. 공안사범이라 독방에서 책을 실컷 읽었다.

장편소설 '녹슬은 해방구'(국내작가 권운산의 빨치산 투쟁기), 김정일의 업적을 찬양하는 북한 원전 '정통과 계승' 등이었다. 운동권 풍년 시대라 가혹행위는 없었다. 교도소 안에는 공안사범들이 수두룩해 다함께 ‘즐겁게’ 지냈다. 4개월 뒤인 92년 3월 말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는 자부심에 가득 찼다. “혁명가의 격을 높인 것 같아 뿌듯하더군요.”

이광백은 전북 임실에서 빈농의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장남인 이광백만 대학에 보냈다. 빨리 성공해 동생들을 돌봐야했다. 하지만 입학 3년 만에 이광백은 친북 혁명가로 변했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89년 2월에 원광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면서 비디오를 봤습니다. 군인들이 어린 대학생을 몽둥이로 때리고 있더군요. 체육관 강당에 놓여진 수십 개의 관 앞에서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총 개머리판에 맞아 부서진 얼굴 사진이 뒤를 따랐어요. 오른쪽 두개골, 눈과 귀와 입이 떨어져나가 피 칠갑이 된 사진. 도로 위의 시신들… 5·18 광주 항쟁 현장 사진이었습니다. 죽은 아빠의 영정을 든 어린 아이의 슬픈 눈…. 저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며칠 뒤 그는 학생회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난 선배가 “세상의 주인은 노동자 농민, 민중이다. 잘못된 세상을 갈아엎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중’이란 단어가 가슴을 쳤다. 선배는 “평화의 댐을 짓는다고 성금을 모금해 전두환이 착복했다”고도 했다. 광백은 분노감에 치가 떨렸다.

이광백은 원광대 법대 학생회 홍보부 차장이 됐다. 학교에선 등록금, 학내 민주화 투쟁과 통일 청년 운동이 맹렬히 벌어지고 있었다. 3월 시작된 등록금 투쟁은 동맹 휴업으로 번졌다. 광백은 본관 점거대와 함께 거기서 3개월간 먹고 잤다.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익산 시내로의 진출도 시도했다. 처음에 화염병을 던질 땐 죄책감이 들었지만 나중엔 하루 수십 개씩 던졌다.

동맹 휴업을 하고 고향에 갔다. TV에 학생 시위가 나오자 아버지가 욕을 했다. 광백은 “아버지 같은 기성세대의 잘못된 세계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대들었다. 아버지는 온순했던 아들의 변해버린 모습에 분노하며 따귀를 때렸다. 동생들도 대학에 가더니 그런 형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길로 집을 뛰쳐나오는데 어머니가 “앞장서지만 말라”며 애원했다.

선배들은 광백에게 의식화 교육을 시켰다.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노동자의 철학, 사람 되는 철학』 『역사적 유물론』 같은 걸 읽었다. 『주체사상에 대하여』에선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이른바 민족해방(NL) 계열이란 걸 알았다. 2학년이 된 그는 ‘동그라미’라는 지하조직에 들어갔다. 조직원은 많을 땐 6명, 적을 땐 3~4명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2~3시간씩 선배들이 지도했다. 선배들은 물었다.

 

“왜 너희 부모는 등골이 휘어지게 일해도 가난한가”라고 물었다. 광백은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선배들은 잘해줬다. 등록금을 걱정하면 도와는 못 줘도 고민은 나눴다. 밥과 술도 종종 사줬다. 그들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 같이 일하자”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혁명을 하려면 애정을 주고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품성론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어쨌든 광백은 그런 선배들에게 감동했다.

북한에 대한 거부감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선배가 “우리는 NL”이라고 했을 때 얼떨떨했다. 김일성ㆍ김정일 수령론도 “이건 좀 심한 게 아닌가” 했다. 그러나 곧 타협했다. ‘수령론은 문제지만 다른 것은 다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리들은 북한을 잘 몰랐어요. 북한은 수령과 당, 대중이 일심단결해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만든다는 정도로만 여겼죠. 수령론 아래 사회적 생명체로서 자아를 실현한다는 사회 생명체 이론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습이다.” 이씨의 회고다. 역사의 법칙을 알게 되니 미래가 보였고 신념도 생겼다.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변신하겠다고 결심했다. 조직생활에 더 충실하기로 했다. 조를 짜서 학교 앞 패밀리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버는 돈은 그대로 조직에 올렸다. 그런 그를 조직은 높이 평가했다. 90년 10월 법대에서 NL그룹 20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이씨를 차기 법대 학생회장 후보로 내정했다.

법대 학생회장이던 91년, 정국은 뜨거워졌다. 명지대생 강경대, 성균관대생 김귀정 등의 학생들이 시위 도중 숨졌다. 전국적으로 분신 사태도 이어졌다. 이름하여 ‘열사정국’이었다. 더 많은 반독재 투쟁과 더 많은 화염병을 위해 학생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법대 학생회 내에서 혁신투쟁도 벌였다. 한 선배가 법대 학생회에서 바둑을 두는 걸 보고 후배들과 함께 몰려가 “생활혁신투쟁 기간이어서 죄송합니다”라며 바둑판에 불을 질렀다. 바둑판이 탄 재 위에다 ‘생활혁신투쟁’이라고 썼다. 당시 총학생회는 비주사 계열이 장악하고 있었다. 어느 날 법대 조직원들과 총학생회를 급습해 바둑판 같은 것을 다 꺼내 불태웠다. 학교 비품창고를 비우게 해 주사파 동아리 방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조직원은 20~3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헌신적이고 강철 같은 조직은 무적이었다. 원광대 총학생회를 장악했던 새벽파(NL계이지만 비주사파)는 물러났다.

법대 학생회장 이광백은 대중 활동가 조직인 동그라미의 책임자가 됐다. 그는 조직 이름을 ‘1995’로 바꿨다. 김일성이 “1995년은 통일의 원년”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조직의 기풍을 잡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조직원들의 용돈을 모두 거둬 필요에 따라 재분배했다. 공산주의식이었다. 조직 규율도 정했다. 아침엔 혁명가의 체력 관리를 위해 공도 차게 했다. 학교 수업은 안 했지만 혁명 이론은 꾸준히 공부했다. 누구나 조직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연애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헤어지라고 종용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막노동 몇 회, 운동장 청소, 집중 교육 같은 징계도 하고 제명도 했다. 군 입대 영장이 나온 조직원의 팔을 쇠파이프로 내리쳐 부러뜨리는 것도 거들었다. “나 스스로를 수령님과 장군님의 전사로 여겼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었어요. 남한을 북한처럼 만들기 위해 지하 혁명조직에 몸담는다고 믿었습니다.” 옛 소련과 동구권 등 사회주의권이 붕괴해 놀랐지만 북한이 당당히 버티는 걸 보고 자부심을 느꼈다. 주체사상의 우수성이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북한의 요덕 수용소에 대해선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 알았어도 ‘반동분자 수용시설’이라고 받아들였을 겁니다. 6·25도 남조선 혁명이 중요하지 누가 침략하고 말고는 본질이 아니라고 여겼죠.”

92년 4월 말 민혁당 중앙위 산하 전북위원회 소속인 반미구국청년학생 동맹이 그에게 교육사업을 요청했다. 그는 민혁당 중앙위원 김영환으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았다. 그는 민혁당 하부조직원으로 96년까지 교육팀장, 한총련 정책위원, 전북 한총련 정책실장을 했다.

지하 교육팀에서 그는 전북위원회 한모 위원장과 또 한 사람의 지도를 받았다. 전주 시내 주공 아파트와 일반 주택에서 많으면 6~7명, 적으면 3명씩 살았다. 외부와는 단절해 민혁당의 투쟁 자료를 만들었다. 김일성 우상화 영화를 복제해 대학에 뿌리고 김일성 회고록을 전파시켰다. 가끔 전북 지역 대학교에 은밀히 찾아가 주체사상을 교육했다. 청년 김일성의 사회주의 운동을 담은 ‘조선의 별’이나 ‘민족의 태양’ 복사판을 틀었다. 한여름에도 소리가 안 새게 문을 닫았다. 숨이 막히고 땀이 흐르고 몸이 뒤틀렸지만 “혁명위업을 지도하는 장군님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닻은 올랐다’ ‘봄우뢰’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같은 교재를 지속적으로 대학교에 퍼뜨렸다. 생활비나 주거비는 조직 책임자가 주로 댔지만 모 신문 지국을 인수해 자금을 만들기도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을 돌리고 오후에 수금했다. 조직은 철저한 점 조직이었다. 자기 아래위 한 명 정도씩만 알았다. 당시 조직 보고를 보니 당원 100명, 핵심 성원 400명, 행동파 3000명쯤이라고 돼 있었다.

94년 7월 김일성이 죽었다. 모두 불안해했다. 이씨도 “김일성 장군님이 없으니 혁명은 어떻게 하나, 그래도 김정일 장군님이 있으니 낫겠지”라며 마음을 달랬다. 김정일 정권이 들어선 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북한동포 돕기에 참여했다. 전세를 빼고 월급을 추렴해 지역별로 몇 천만원씩 모인 돈 7억원을 재야단체인 전국연합이 북한에 보냈다.

그러다 청천벽력 같은 ‘말’지 사건이 터졌다. 주사파의 전설인 ‘강철서신’의 주인공 김영환이 북한 체제를 비판한 것이다. 반미구국청년학생동맹 내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씨도 ‘북한의 주체사상으로 세계 혁명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김영환을 만났을 때 김은 이씨에게 “사실 89년부터 회의가 시작됐다. 91년 북에 다녀온 뒤 훨씬 강해졌다. 민혁당을 돌려세워야 할지 고민했지만 관성이 너무 셌다”고 고백했다.

95년엔 ‘북한 이탈’ 현상이 더 강해졌다. 한민전이 방송을 통해 “김영삼 정부 타도 투쟁을 하라”는 지침을 보냈다. 하지만 조직원들 사이에서 이걸 무조건 따르는 대신 토론을 하자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96년 8월 13일 연세대 사태는 루비콘 강이었다. 한총련은 연세대에서 제6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강행했다. 3000여 명의 학생은 6일간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했다. 폭력이 난무했고 경찰은 8월 20일 강경진압을 강행했다. 이 사태를 놓고 내부 투쟁이 벌어졌다. 민혁당이 주축인 혁신계는 “운동이 고립된다”며 폭력을 비판했다. 그러나 주사파이지만 비민혁당계인 자주계는 “끝까지 밀어붙여야 한다”고 했다.

  

3개월간 지도부에서 논쟁이 지속되다 대학 총학생회장들로 구성된 비민혁당계(자주계) 의장단이 민혁당계 집행 간부단을 밀어냈다. 민혁당의 패배였다. 혁신파는 민혁당 경기동부그룹의 거점인 수원 경희대에서 모였다. 이광백도 참석했다. 프로그램 중엔 ‘한민전과 김정일의 지도노선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전북위원회의 누군가가 “한민전의 지도노선은 부적절하다. 김정일이 전 세계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경기동부의 지도급 인사의 얼굴이 굳어지며 밖으로 나가 전화로 지도지침을 구했다. 내려온 지침은 “한총련 혁신을 전북과 같이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김정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전북위원회는 제거가 된 것이다. 전북위원회는 공개 해체를 결정했다. 전북지역 1000명의 활동가 중 일부가 희망공동체 전북연대를 만들었다. 21세기 진보운동이 목표였다.

이광백씨는 97년 4월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5월 1일자로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제적됐다. 희망공동체 소속인 단체 ‘시민행동 21’에서 일하며 전북도ㆍ전주시의 예산을 감시했다. 2001년 상경해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 연구위원과 시대정신 계간지 편집장을 했다. 2006년 7월 자유조선방송 대표가 됐고 2012년 4월엔 자유조선방송ㆍ북한개혁방송ㆍ열린북한방송ㆍ자유북한방송 등 민간 4사의 연합체인 대북방송협회 회장이 됐다.

-주사파 활동을 접은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

"내가 몸담았던 민혁당 산하 조직이 없어졌다. 기존의 절대가치가 무너지면서 두려움이 컸다. 외부엔 안 알려졌지만 95년부터 운동권 내부적으론 북한의 실체를 보자, 새로운 노선을 모색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96년엔 김정일을 부인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민혁당은 이미 더 이상 운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해체를 결정했을 것이다. 내가 운동을 그만둔 것은 북한의 실체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진보고 여전히 세계 변화를 위해 혁명 중이다."

-당신은 극좌에서 극우로 진폭이 너무 크지 않나.

“95년부터 북한 민주화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98년까지 모색기였고 그 뒤 점차 본격화된 것이다. 대북 방송을 하는 것도 북한 주민의 의식을 바꾸고 이를 지렛대로 북한 민주화를 하기 위해서다.”

-민혁당에 속했던 과거를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모두가 과거를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공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공개하고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중앙SUNDAY] 안성규 기자

 

海軍에 격침된 北잠수정 間諜 屍身 뒤졌더니

기사입력 2012-05-19


ㅡ'종북의 뿌리' 민혁당 출신, 김영환·이석기의 엇갈린 운명, ㅡ통합진보당 사태로 본 대한민국 지하당

대한민국 정당사엔 공당(公黨)만 있는 게 아니다. 지하당(地下黨). 당비를 내는 '당원'이나 당사, 선거를 통해 확보한 '영토' 따위는 애초에 있을 수 없는 비밀조직이다. 북한의 지령과 이념, 조직원만 있을 뿐이다. 이런 비밀조직이 엄연히 실재했던 게 사실이다.

 지하당의 뿌리는 깊다. 역사도 오래다. 해방 후 우파 민족주의 정당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 김일성에 숙청당한 박헌영의 남로당(남조선노동당)에서 1980년대 이후 북한 주체사상에 심취한 NL(민족해방) 계열이 1992년에 만든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까지 지하당은 반세기가량 명맥을 유지해왔다.

 최후의 지하당 격인 민혁당 사건 연루자들이 요즘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영환, 이석기, 하영옥. 1982학번 동기로 NL의 원조다. '종북 주사파의 뿌리'인 셈이다. 그러나 현재 세 사람의 운명은 엇갈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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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환=서울대 법대 82학번인 그는 북한에 포섭되지 않은 채 스스로 '구국의 소리' 방송과 주체사상 관련 서적을 탐독한 자생적 종북주의자였다. 그러곤 “식민지인 한국은 반미투쟁을 전면화해야 한다”며 NL혁명이론(주체사상)을 주창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수도권 대학에 전파하기 위해 『강철서신』을 썼다. 『강철서신』에 담긴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는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낀 학생들에게 솔깃했다. “어차피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면 사회주의 세력인 북한을 우군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한 민족·통일을 외치는 '토착 전술론'에 매력을 느낀 거다.

 그런 김영환에게 89년 7월 “김 선생과 통일사업을 논하고 싶소”라며 접근한 사람이 있었다. 윤택림이란 남파 간첩이었다.

 김영환은 그와 만난 후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평양으로 가서 91년 정식으로 입당식까지 치렀고, 북한으로부터 '관악산 1호'란 대호(代號·암호명)를 얻었다.

 윤택림으로부터는 평양방송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암호책자, 난수표, 해독표도 받았다. 그해 5월엔 북한 잠수정을 타고 두 번째 밀입북했다. 북한에 17일간 머물면서 급기야 묘향산에 있는 김일성 별장에서 김일성(당시 주석)과 두 차례 면담까지 하기에 이른다.

 국정원 수사기록에는 김일성이 그때 김영환에게 '선생'이란 호칭을 사용하면서 “강철서신은 참 훌륭한 글”이라고 칭찬했다는 대목이 있다.

 수사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이런 말도 했다.

 “이란의 라프 산자니 대통령이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이란은 어떻게 혁명에 성공했느냐'고 물어봤더니 '따로 혁명조직이 있었던 게 아니라 회교조직을 통한 사상의 전파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사령관의 부관을 먼저 끌어들인 뒤 (부관의 상사인) 사령관을 항복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군인 30만 명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남조선 인민 1000명만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면 남조선 혁명은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김영환은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남한에서 조직활동을 열심히 하겠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민혁당'은 그 후 창당됐다. 92년 3월, 김일성을 면담하고 온 뒤 8개월 뒤의 일이다. 김영환은 강화군 외포리의 '드보크'(간첩장비 비밀매설지)를 통해 40만 달러(당시 3억원), 권총 2정, 실탄, 무전기 2대 등을 받았다. 민혁당 출신 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이사는 저서 『지성과 반지성』에서 민혁당의 조직원이 “전국적으로 100명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영향권에 있던 사람을 포함하면 수천 명에 달했을 거라는 추정도 있다.

 그런 김영환이 왜 전향을 한 것일까. 김영환은 훗날 “북한의 주체사상은 황장엽이 만든 주체철학에 민족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수령론을 합친 것인데 김일성은 주체사상에 대해 막상 거의 관심도 없고 잘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북한 학자들과의 토론에서도 주체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람들의 창의성이 발휘되지 않았음을 느꼈다고 했다.

 북한 상급자가 하급자를 고압적으로 대하는 모습에도 회의 하게 됐다. 자생적 종북주의자 김영환을 전향하게 한 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방문 후였던 것이다. 민혁당은 결국 94년 김일성 사망 후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낀 김영환이 97년 7월 해체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당국에 의해 지하당 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난 건 아니었다. 김영환은 민혁당 해체를 선언했지만 이에 불응하고 민혁당을 계속 하려 한 이가 하영옥이다.

 ◆하영옥=국정원 수사기록에 따르면 그는 민혁당 '넘버2'였다. 8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하영옥은 89년 '반제청년동맹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김영환('관악산 1호')에 이어 '관악산 2호'가 됐다. 그는 북한에는 가지 않고 서울 도봉산에서 입당식을 했다. 그 자리에서 하영옥은 “조선노동당에 입당해 매우 영광스럽고 당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맹세한다”는 결의를 표명했다고 한다.

 

   그는 97년 민혁당이 해산하자 이에 반발, 영남위원회와 경기남부위원회를 중심으로 당 조직을 수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98년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북한이 직접 파견한 간첩으로부터 북한이 자신을 김영환 대신 민혁당 총책으로 임명한 사실과 입북 제의를 듣게 된다. 그러나 98년 12월 그가 타고 가려던 북한 반잠수정이 군에 발각돼 밀북 계획은 미수에 그친다.

 민혁당의 단서가 포착된 것은 이때였다. 당시 남해상에서 해군에 격침된 북한 간첩 침투용 반잠수정 안에서 발견된 유류품 때문이다. 잠수정 안에 있던 공작원의 시신 등에서 김영환·하영옥 등의 이름과 전화번호 등이 나왔고, 이를 토대로 국정원이 추적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민혁당 하부망의 핵심 인물로 이석기를 찾아낸 것이라고 국정원은 발표했었다.

 국정원은 하영옥이 북한 공작원과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하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북한 공작원만 입북하려다 격침된 것으로 봤다. 김영환은 잠수정 침몰로 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난 줄 모르는 상태에서 99년 8월 귀국했다.

 

    그러나 국정원이 민혁당의 존재를 파악한 것을 뒤늦게 안 김영환은 월간 말지를 통해 '간첩사건이 조작되고 있다'는 인터뷰를 한 뒤 출국을 시도했다. 말지 인터뷰는 김영환이 민혁당 관련자들에게 도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한 것이었다. 당국은 이런 움직임을 알면서도 김영환을 체포하지 않다가 나중에 하영옥 등과 함께 해외로 출국하려던 김영환을 체포했다.

 '진보의 그늘』 저자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에 따르면 '2차 민혁당', 즉 재건된 민혁당은 97년 김영환이 해체한 직후부터 99년 그가 구속될 때까지 조직됐었다고 한다. 그는 99년 9월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8년형을 선고 받아 4년간 복역한 뒤 2003년 4월 30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후 경기도에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

 

그가 민혁당 재건을 꾀하고 있다고 최근 동아일보가 보도하자 하영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무리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해도, 선입견에 (맞춰) 내가 뭐 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식으로 함부로 소설을 쓰는 짓은 너무한 게 아닌가”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지금 (통합진보당) 당원이지만 아무런 활동을 한 바 없다. 민혁당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후 애들을 먹여 살리려고 학원 강사를 한 지 8년이 됐고 아무런 활동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석기=두말할 것 없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현재는 '이석기 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국정원 수사 결과 그는 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장이었다.

 82년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중국어통번역과에 입학한 그는 89년 하영옥 등과 함께 민혁당 전신 격인 '반제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당시 하영옥이 중앙위원장, 이석기 등 4명은 중앙위원을 맡았다. 반제청년동맹엔 89년에 김영환도 중앙위원으로 합류했다.

 최근 하태경 새누리당 당선인은 “비례대표 2번 이석기 당선인은 민혁당의 경기남부위원장 출신으로 서열 5위의 핵심 고위직이었다”고 주장했다. '넘버 5'란 하태경 당선인의 지적은 이석기가 중앙위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석기는 하영옥 등 99년 8월부터 민혁당 사건 연루자들이 줄줄이 검거됐을 때 붙잡히지 않고 2년 넘게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다 2002년 5월 체포된 뒤 징역 2년6개월을 선고 받고 2003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그에게 여전히 '종북'이란 의혹의 시선이 모아지는 이유는 이런 전력 때문이다.

 

 한기홍 대표는 “이석기가 합법 정당으로 진입한 것은 검거 후 신분이 수사기관에 노출되면서 지하활동에 장애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애매모호한 화법으로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82학번 세 명 중 '넘버 1'이었던 주사파의 대부 김영환은 전향 후 북한 주민을 위한 운동을 하다 '국가안전위해죄'라는 죄목으로 52일째 중국에 구금돼 있다. 민혁당 조직 중 김영환의 지휘 하에 있던 수도권의 지하지도부 등은 전향 후 활동을 접거나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다. 반면 이석기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의 이름으로 의회 권력에 다가가고 있다. 10여 일 뒤면 그는 '지하당 출신 국회의원'으로 기록될지 모른다.    

 

                                    
[중앙일보] 이원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