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가장 강력한 힘.
이집트의 테벤니시에 있는 한 수도원에 나이 많은 노인이 와서 자기를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젊은 수도사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노인이 들어온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배고픔과 가난 때문에 입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때로는 멸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인은 묵묵히 자기가 맡은 채소밭을 부지런히 돌보았고, 천한 일들까지 스스로 떠맡으며 살았다.
겸손은 하나님께 이르는 문
3년이 흐른 즈음, 어느 수도원에서 갑자기 사라진 원장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니던 수도사들이 그 수도원에 왔다.
한 수도사가 채소밭에서 호미를 들고 일하던 그 노인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이 찾던 원장임을 확인하자 즉시 그
발아래 엎드렸다.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받았던 피누피우스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그 유명한 원로를 몰라보고 초보자로
대했던 수도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용서를 구하는 수도사들 앞에서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찾다가 드디어
얻게 된 겸손한 생활 방식을 마귀의 시기로 빼앗겼고, 이 낮은 자리에서 여생을 마치지 못하게 되었다고 슬퍼했다.
다시 도망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당했던 피누피우스는 야밤에 또 도주했다. 이번에는 배를 타고 해외로 건너갔다.
베들레헴에 있는 한 수도원에 다시 초보자로 입회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지순례를 간 이집트 수도사들에게 들켜 원상복귀하게 되었다.
원장 자리를 버리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갈망했던 것은 겸손이었다. 대수도원의 원장으로 명령만 내리다가는 겸손을
이룰 수 없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해결책은 초보자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잊어버린 겸손이 한 시대 사막에서는 최대 관심거리였다.
초기 수도원 기록들은 겸손을 묻고 그 길을 찾는 이야기들로 넘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
(마 11:29)하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요, 또 ‘온전하고자’(마 19:21) 시작한 수도생활을 완성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겸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는 핵심적 속성이다. 출생부터 자신을 비우신 그리스도는 성부를 완전히 의존하며 겸손하게 평생을 사셨다(눅 22:27).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주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기도하시며 최후까지 겸손을 보여주셨다.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는 말씀을 생애를 통해 직접 보여주셨다.
이토록 겸손하신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겸손밖에 없다. 겸손은 하나님께 이르는 문과 같다.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평생을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의 길로 가야 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이 가신 길, ‘내려가신 길’이다.
사람이 겸손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막에는 그것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마카리우스가 습지에서 야자 잎을 베어 수실로 돌아오는 도중에 큰 낫을 든 마귀를 만났다.
마귀는 힘껏 그를 내려쳤으나 헛수고였다. 마귀는 “마카리우스야, 네 힘이 대단하다. 내가 너를 대적해서 어떤 것도 할 수가 없구나! 보아라. 나는 네가 하는 일은 모조리 할 수 있다. 너는 금식한다. 나도 전혀 먹지 않고 산다.
너는 잠을 자지 않고 철야를 한다. 내게도 잠이란 없다. 그런데 네가 나보다 나은 것이 단 한 가지 있다.”
마카리우스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귀는 “그것은 너의 겸손이다. 그것 때문에 나는 도저히 네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겸손은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마귀는 겸손 앞에서 맥을 못 추었다.
겸손을 이루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길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업적과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의 정도에 있다.
타인 아닌 자신의 죄에 관심을
태생적으로 교만한 인간이 어떻게 하면 겸손을 이룰 수 있을까. “겸손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수도사에게 다음의
답을 준 한 원로에게서 배울 수 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간주하며, 다른 모든 사람 밑에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스스로를 모든 사람 밑에 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원로는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죄에 관심을 갖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항상 자신의 죄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겸손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으로서 이루어진다.
울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나 자신 말이다. 자신을 책망하고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는 일, 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김진하 교수 <백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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