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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기술의 발달에 대한 인도철학적 반성

Joyfule 2006. 10. 5. 01:15

과학 기술의 발달에 대한 인도철학적 반성 -  동국대 정 승석

 

 


우리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이로 인한 혜택과 폐단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 과학 기술은 우리에게 빛을 주는 동시에 그늘을 드리운다. 전기의 발명으로 우리는 밤에도 빛을 누리며 살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점증하는 전력의 소비와 충당이 야기한 공해와 자연 파괴로 인해, 한낮에도 햇빛을 보지 못하거나 기상 이변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빛으로 그늘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명분과 기대를 앞세우며, 과학 기술의 개발은 더욱 촉진되고 가속화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 기술이 발달한 그만큼 심화되어 온 폐단을 아울러 감수하면서 살아 온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 그 기술이 오히려 더욱 짙은 또 다른 그늘을 양성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은 결코 기우가 아니다.

과학 기술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물질적 육체적 편리는 인간의 끝없는 욕구에 비해 항상 미미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이 편리는 인간계와 자연계의 질서 파괴라는 심각한 폐단을 동반하고 있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반성이 결여된 채 과학 기술이 기존의 길을 고수하는 한, 그 같은 사태는 갈수록 악화될 것이다.

빛과 그늘의 공존은 인간 세계의 실상이다. 그리고 이 빛과 그늘은 인간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과학 기술은 이 내부의 빛과 그늘을 간과하고 주로 외부의 그것에 치중해 왔다. 이로 인해 그것은 인류의 종말을 자초할 폐단을 양산하고 있다. 현대의 과학 기술이 이 사실을 감지하면서도 자기의 길을 더욱 치달아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학 기술의 문명에 대한 다각도의 반성은 절실히 필요하다.

반성의 시각으로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인도의 철학과 종교이다. 인도의 사상은 과학 기술이 간과해 온 존재의 실상에 대한 탐구인 동시에 그것에 대처하는 방도로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1. 과학 기술의 빛과 그늘

과학 기술의 발달은 21세기의 인류의 생존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생명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진보라는 측면 이외에도, 인간의 영생과 부활의 가능성, 불치의 유전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 유전자 검식을 통한 수사를 비롯하여 인류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과 숙원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1] 이 점에서 과학 기술은 인류를 영생으로 이끄는 구원의 빛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학 기술이 생태계를 교란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인류를 파멸로 내모는 재앙의 그늘일 수도 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예견되는 양면 중에서 영생의 빛은 허구에 가깝고, 파멸의 그늘은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로 인해, 고통의 감내를 요구하는 진실보다는 달콤함으로 위장된 허구에 쉽게 편승하여, 과학 기술을 맹종하고 있다.갈수록 심각한 환경 파괴는 그간의 과학 기술이 주도한 인류의 업(karma)이다. 이 업의 과보가 인류와 지구에게 전체적으로 미치고 있으므로, 인류는 이 과보를 극복하는 일만으로도 벅차다. 이런 터에 인류는 새로운 업을 짓고 있다는 데서 과학 기술의 재앙을 예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업이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생명 질서의 파괴이다.

지금 인류는 환경 조작의 시대를 거쳐 본격적인 생명 조작의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다. 인간 복제의 합법화를 전제로 하여, 인간 복제를 사업으로 표방하는 회사가 이미 출현하였다. 또 환경 유해 물질로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다이옥신은 인간의 편의를 위한 인조 환경의 부산물이다. 환경 개선이라는 명분의 환경 조작이 예기치 않은 재앙을 초래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생명 개선이라는 명분의 생명 조작 역시 예기치 않은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은 인과론의 기본 지식으로써 예감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진즉 유전자 조작으로 메기만큼 큰 미꾸라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외국에서는 머리 없는 올챙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머리 없는 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전자 조작이 전망하는 환상적인 미래에는 3∼4 미터가 넘는 거인이나 머리가 없는 인간과 같은 괴물이 출현할 수도 있다. 우리의 식탁에는 이미 유전자 조작에 의한 식품이 올라와 있다. 우리가 먹고 있는 콩의 30% 정도는 유전자 조작으로 생산된 것이다. 이 같은 식품이 인간의 생명에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검증된 바 없다. 그래서 더욱 재앙의 가능성은 큰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의 모습이 무분별한 개발, 인구의 과밀 현상, 환경 훼손 등으로 망가져 가는 세계라면, 이 같은 폐단을 낳지 않고 자연의 원초적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과학 기술이 있다. 그것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컴퓨터의 디지털 기술이다.우리는 지금 디지털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이 디지털 기술의 지배력이 앞으로 더욱 확산되고 강화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디지털 세계의 또 다른 이름, 더 유명한 이름은 이른바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VR)이다.[2] 가상 현실 즉 VR은 인간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서 가상의 경험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기술이다. 그리고 “위험으로 가득 찬 실재 세계에서 위험 수당을 지불하지 않고도 경험을 즐길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이 기술의 매력이 있다.[3]

가상 현실의 황홀한 미래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사이버섹스(cybersex)이다. 사이버섹스는 육체적 접촉이 없는 섹스이며 따라서 도덕적 책임도 뒤따를 필요 없는 섹스이며 결국 가장 안전한 섹스로 부각된다. 육체는 디지털 정보로 전환되고 피부 접촉은 실리콘 칩으로 대체되었지만 에로틱한 상상력과 감각을 마음껏 만족시켜 줄 수 있다고 사이버섹스 예찬론자들은 목소리를 높인다.[4]

그러나 새로운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이 초래할 여러 가지 문제들도 이미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이것들 중의 하나로 흔히 지적되는 것은 전통적 자아의 상실과 복합 자아의 출현이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가상 공간(cyberspace)에서는 자기를 표시하는 다양한 이름(id)으로써 복합적 인격을 구현하는 것이 수월해진다.[5] 이로 인해 야기되는 현상은 자아의 분열이다. 뿐만 아니라 가상 공간과 가상 현실은 개인주의를 극대화시킬 위험도 안고 있음이 다음과 같이 지적된다.

컴퓨터 산업은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적 실체는 개인뿐이라는 자유주의적 신념에 기초하였고, 어떤 이들에 의해 가상 현실은 이 원칙의 최상의 구현이라고 권장되었다. 당신 자신의 개인적 실재를 창조하는 것보다 더욱 당신의 개인주의를 잘 표현할 방법이 있는가? 개인 컴퓨터로 증강되고 가상 현실로 해방된 개인은 그 자신의 우주의 신이 된다. 머리에 수신 장치를 쓰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그의 움직임과 몸짓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유아독존적 개인 탐닉의 최종적인 전형이다.[6]

이처럼 컴퓨터 기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사는 미래의 신인류는 기존의 생물학적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구분되어야 할지 모른다. 이 신인류에게 적용할 만한 이름이 소위 ‘후기 인간’(posthuman)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류가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과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져 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7]

결국 컴퓨터 기술은 가상 현실에 의한 해방이라는 빛과 인간의 기계화라는 그늘을 동시에 예고하고 있다. 인류에게 이 그늘은 또 다른 종류의 재앙이다. 컴퓨터 기술은 가상 현실이라는 환상을 보편화하면서 생물학적 인간을 기계적 인간으로 변환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 산업이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생물학적 인간은 점점 더 생물학, 기술, 컴퓨터 코드, 실리콘 칩의 복합체인 사이보그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8] “어쩌면 인간은 이미 사이보그가 되었는데 우리는 아직 그것을 인정하기 꺼려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9]라고 말하듯이, 이 재앙은 이미 우리에게 도래해 있다.



2. 과학적 접근의 한계

과연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환상적인 빛으로 충만한 미래를 맞을 수 있을까? 과학 기술이 물질적 변화로써 도모하는 인간의 행복과 기쁨과 자유 등은 인간이 바라는 그대로 실현될 수 있을까?

과학 기술은 삶의 편리를 도모한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류의 삶이 더욱 편리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활이 편리해졌다고 하여 생존의 고통이 그만큼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생활의 편리가 곧 생존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아래와 같이 그간의 과학 기술의 공과를 반성해 보면, 우리는 과학 기술의 발달이 전망하는 환상적인 미래에 대해서도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과 과학 기술은 인간의 마음이 고안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인류가 인간의 삶을 원활하게 하고 번영하게 하는 데 최대로 보조한다. 그것들은 지상에 낙원을 창조해 왔다. 그러나 번영은 모멸을 조성한다. 발전한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과학과 기술을 오용하고 있으며, 한순간에 수천의 나가사키(Nagasaki)와 히로시마(Hiroshima)를 파괴할 수 있을 그러한 치명적인 무기들로 병기고를 채우고 있다. 세계 전체가 어느 순간에 터질지 모르는 화산 위에 앉아 있다. 물과 공기, 그리고 우주 전체가 오늘날처럼 오염된 적이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 우주적 오염이 이제는 사람들의 심장 속으로 파고드는 지경에 이르렀다.[10]

과학 기술은 이처럼 인류에게 스스로 재앙의 그늘을 남기면서도 여전히 환상의 빛만을 추구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빛의 실체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없거나 그것을 외면한 데에 있다. 그리고 그 일반적인 이유는 “과학적 접근은 모두 옳다.”라는 과학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에 있을 것이다. 이 전폭적인 신뢰는 과학적 접근이 그 자신의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결국 맹신이며, 이 맹신은 무지이다.

인간의 삶에는 과학적 탐구를 넘어선 다른 양상들이 있다. 과학적 탐구의 주요 도구인 이성은 유한하고 분리되고 한정된 것만을 취급함으로써 무한한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이러한 이성으로는 사물의 근본을 얻을 수 없고 그 비밀의 총체를 포착할 수도 없다. 과학적 탐구는 철학적 종교적 진리, 인간 정신의 위대한 창조물들에 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과 기쁨, 슬픔과 고통을 평가해야 할 경우에, 과학적 기질은 벙어리가 된다. 인간 세계는 물질 세계와 전혀 다르다. 물질 세계를 분석하는 과학의 방법으로 연꽃을 분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연꽃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11]

과학적 탐구의 또 다른 위험은 그것이 우리의 경이감을 파괴한다는 점이라고 지적된다.[12] 여기서 경이감이란 생명 자체의 질서, 포괄적으로는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세계 자체의 질서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인도 철학의 개념에 의하면 그것은 카르마(karma, 業)와 다르마(dharma, 法)이다. 카르마와 다르마는 인간과 세계가 존속해 가는 실상의 법칙이다. 이 법칙을 자각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신의 마음이 지어 낸 허상을 실체로 맹종하면서 끊임없이 빛과 그늘을 전전한다.

앞의 인용에서 잘 지적하고 있듯이, “과학과 과학 기술은 인간의 마음이 고안한 것들”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인간의 생존에서 유령과 같은 것이다. 인도 철학은 이 유령의 실체를 자각하는 지혜를 추구해 왔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 특유의 정신 세계를 탐구하는 전통은 그 주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 기술이 남기는 암울한 그늘은 우리에게 회의론을 만연시킨다. 이때 인류에게 도움이 되고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철학이다. 특히 인도 철학의 전통에 의하면, 그 철학은 ‘자아에 대한 지혜’(aatma vidyaa), ‘최고 실재에 대한 지혜’(paraa vidyaa), ‘최고 정신에 대한 지혜’(adhyaatma vidyaa) 등으로 불리는 지혜이다.[13]

인도 철학의 전통을 이루는 이러한 지혜는 반성적 지혜이다. 그러나 이것이 비과학적인 것으로 일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각 현상을 세밀히 조사하고 그것의 온갖 부분을 검토하여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밝히는 분석에 바탕을 둔다면, 예를 들어 붓다가 했던 것도 정확히 그와 같다고 지적된다. 고통, 슬픔, 불행이 있다는 가정과 무엇이든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진다는 가정이 바로 붓다가 세웠던 두 가지 가정이다. 하나는 반성과 內省과 인간 경험으로부터의 보편화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바로 과학에 활력을 주는 근원이다.[14]

여기서 ‘과학에 활력을 주는 근원’은 ‘무엇이든 모든 것은 원인을 가진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을 인간의 삶에서 분석해 낸 것이 업의 법칙이며, 이것을 보편화한 진리가 불교의 緣起法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여 거기에는 고통, 슬픔, 불행이 있다는 가정을 분석한 데서 출발한다. 이 같은 분석에 의해 발견한 이 법칙을 인간과 자연에 적용할 때, 이것은 결코 과학 기술이 수반하는 것과 같은 그늘을 생성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과 과학 기술의 시대에 윤리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현대의 생활과 사회에 의미 심장하게 공헌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있다.”[15]라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윤리적 기반도 그러한 법칙에 대한 자각과 실천이다.

인도 철학이 추구하는 지혜는 그러한 자각과 실천을 위한 반성적 지혜이며, 현대의 과학 기술이 고려하고 겸비해야 할 지혜도 바로 이것이다. 인도 철학도 과학처럼 명료한 빛을 추구한다. 그래서 인도 철학에서는 ‘실재를 밝히는 빛’을 지혜(vidyaa, 明)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빛은 그늘을 수반하지 않는 빛이라는 점에서 과학의 빛과는 다르다. 인도 철학의 빛은 인간과 세계의 질서를 자각하고 실천하는 빛이다.



3. 인간과 세계의 질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개량된 인간을 창조할 수 있다는 기대로 추진되고 있다. 유전자 조작으로 식물과 동물을 개량할 수 있듯이, 인간도 그렇게 개량할 수 있다는 것이 과학 기술의 논리이다. 어쨌든 이 프로젝트는 복제 인간을 실현시킬 것이며, 아기를 제조하여 판매하는 기업을 출현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예상에 따라 인간의 정체성과 윤리의 문제를 비롯하여 제기되는 온갖 쟁점들은 인간과 세계에 미칠 총체적 재앙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며, 이 우려의 핵심은 생존의 질서가 파괴됨으로써 초래되는 혼돈이다. 식물이나 동물의 경우처럼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조작하여 인간을 개량할 수 있다는 과학 기술의 논리는 완전한 사이보그를 추구하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완성하여 그것을 실용화하는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자율적 인격체가 아니라 인위적 도구로서 취급되고 기계적 조작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와 아울러 끊임없이 생물학적 인간을 기계적 인간으로 전환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인도 철학에서 탐구한 진리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과학 기술로는 조작할 수 없는 질서가 있다. 이 질서는 업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복합적인 의지이며, 이 의지의 인과율이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눈앞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데 전념하는 과학 기술은 조작하고자 하는 질서와 조작될 수 없는 질서의 충돌로 인해 自中之亂의 혼돈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과학 기술의 미래를 우려하는 비판의 소리들도 인도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조작자의 업과 피조작자의 업, 또는 원본 인간의 업과 복제 인간의 업이 일치할 수 없다는 데서 예기치 못할 사태가 발생하고 생존의 질서가 파괴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업이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의식이고, 이 의식을 발동시키는 의지이며, 그 결과를 자신에게 미치게 하는 자율적인 힘이다. 그리고 이 힘은 자기 이외의 존재와도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자기의 미래를 형성해 나간다. 이것이 업의 법칙이며, 인간과 세계가 공존해 가는 자율적 질서이다. 이 자율적 질서가 인간의 생존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양상, 즉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궁극의 진리로 파악될 때, 불교에서는 그것을 緣起(pratiitya-samutpaada)라고 표현한다.

“업의 이론은 세계를 엄격히 합리적이고 윤리적으로 결정된 우주로 전환시켰다.”[16]라고 평가된 바 있듯이, 일반적으로 업은 ‘행위로부터 생기는 우주적 인과율의 원리’[17]라는 보편적 법칙으로 해석된다. 이 같은 업을 중시하는 사상은 ‘善行 善果, 惡行 惡果’라는 기본적 도덕률에서 출발하여 ‘모든 현상 세계의 생멸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전개되었다.[18]

유전자 조작과 같은 과학 기술을 반성하는 데서는 특히 불교의 업 개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 본래의 전제로 말하면, 세간이라든가 세계라고 말하는 것도 결코 개인의 생존을 초월하여 처음부터 별개의 것으로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개인의 생존을 구성하고 있는 內外 主客의 모든 요소를 곧 5蘊이라거나 12處라거나 세간이라거나 일체법이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세계는 그대로 각 개인의 업을 원동력 또는 추진력으로 삼아 성립해 있다고 간주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의 업에 의해 나의 세계가 성립된다.”라고 말할 수 있다.[19]

각 개인의 업은 기본적으로 그 결과를 행위자 자신에게 초래하는 힘으로서 작용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대상에게도 영향을 주는 餘勢를 지닌다. 또 업은 다른 힘의 보조를 받으며 작용한다. 따라서 개인의 업은 타인이 아닌 자기에게 결과를 초래하는 不共業인 동시에, 타인의 업과 협력하고 他者에게 영향을 주는 共業이다. 자기와 타자와의 이 같은 관계는 연기에 속한다.

이 점에서 불교의 연기설은 중생의 생존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모든 생존, 예를 들면 사회나 환경과의 상호 의존 관계도 고려하고 있었다.[20] 화엄경에서 “마술사가 주술로써 여러 가지 일을 보여 줄 수 있듯이, 중생의 업력으로 인해 그 국토는 불가사의하다.”라고 설한 것은, 개인의 업들이 환경 세계에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을 포함한 이 세계는 업이라는 거대한 축에 의해 회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21]

업이라는 거대한 축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인간과 세계가 자체적으로 존속해 가는 질서이다. 이 질서의 근원은 인간의 의식에 있으며, 이 의식은 각 인간이 임의로 지어 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세계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상응하여 존속한다. 과학 기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자유 의지이다.

자유 의지는 과학 기술로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제 인간의 우수한 능력은 그 복제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해, 또 연기적 관계에 있는 환경 세계에 의해 어떻게 발휘될지 예측할 수 없다. 업이라는 질서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혼돈이라는 업보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은 예측할 수 있다.

제삼자인 조작자가 인간 생존의 양상을 변경할 수는 있을지언정 인간의 자유 의지인 업을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조작되거나 복제된 인간은 원본이 되는 인간의 의지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냉철하게 명심할 필요가 있다.



4.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컴퓨터에 의한 과학 기술은 구성자의 의도에 따라 거의 무한한 가상 세계를 창출할 수 있다. 또 이것은 정보의 공유화를 표방하면서 정보화 시대의 사람들에게 정보를 일방적으로 주입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주어진 정보를 모으려고만 함으로써, 정보의 창조성은 상실되어 간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은 컴퓨터 기술의 조작자나 구성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종속되고, 독재 정부의 우민화 정책, 유토피아론의 사회적 악용, 매스컴의 상업주의, 탈인간화 현상 등과 같은 폐단이 속출할 수 있다.[22] 가상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세계에 대한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일방적인 종속과 이로 인한 폐단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도 수많은 가상 세계들 중의 하나일 수 있다. 컴퓨터에 의한 가상 세계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이 현실로서의 가상 세계에 대한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현실 세계의 존재 근거는 없으며, 세계의 존재는 원래 그러한 것이고 스스로 그러한 것이 된다. 여기서는 나의 참여와 미참여가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내가 참여하고 간섭하는 세계가 현실이 되고, 내가 아직 참여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은 잠재적 세계는 그대로 가상 세계로 남아 있게 된다. 이때 참여하고 간섭하는 ‘나’는 他者인 ‘너’와 서로 이끌리며 동화하기 때문에, 너와 분리될 수 없는 그런 나이다.[23]

불교의 화엄경에 의하면, 이 같은 현실 세계는 法界緣起의 세계이다. 세계의 존재 방식인 연기는 서로 동화하고 드나들며(相卽相入), 끝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重重無盡) 성격을 지닌다. 이처럼 모든 것이 서로 걸림이 없는(事事無碍) 세계가 법계이며, 이러한 존재 방식이 법계연기이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저마다 개체로서 존재하면서 서로를 내포하여 상통하고, 하나와 일체가 끊임없이 거듭 일치해 간다. 그래서 법계연기는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一卽多 多卽一)라는 등으로 표현된다.

가상 세계의 하나일 수 있는 현실 세계를 ‘동등적 多世界’라고 부르자.[24] 이 세계에서 정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정보는 정보 그 자체보다 만들려는 의도와 만들어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의도와 과정은 특정한 주체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分有되어 있을 뿐이다. 또 여기서 참여와 간섭이 없는 모든 것은 가상성이며, 내가 참여하고 간섭할 때 비로소 세계는 가상의 붕괴와 함께 가상에서 현실로 전환된다. 참여되고 간섭된 세계와 그 반대의 세계는 이분법적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많은 미참여와 비간섭의 세계 중에서 내가 참여하고 간섭하면서 하나의 현실 세계가 채택될 뿐이다. 그러므로 동등적 다세계는 불연속의 이원 논리가 아닌 연속의 다중 논리 혹은 다원 논리의 세계이다.[25]

위와 같은 동등적 다세계는 법계연기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는 동등적 다세계, 즉 법계연기의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계의 진실을 인지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수시로 가상이 되고, 가상이 현실이 될 수 있는 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대체로 ‘눈앞의 것은 현실’이라는 고정 관념에 의존하여 살고 있다. 이 때문에 컴퓨터에 의한 가상 세계도 현실 세계인 양 우리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진실에 안주할 수 있는 관건은 참여하고 간섭하는 ‘나’가 他者와 분리될 수 없는 그런 나임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이 점을 우파니샤드에서는 “너는 그것이다.”(tat tvam asi)라는 표현으로 제시했다. 이 인식의 궁국에는 해탈이라고 불리는 절대적 자유의 자기 실현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도달하는 인식을 지혜라고 한다. 이 인식을 방해하고 왜곡하는 것은 인식 자체의 또 다른 측면인 가상성이다. 이 가상성을 베단타 철학의 거장인 샹카라($aNGkara)는 假託(adhyaasa)이라고 표현했다.

가탁이란 진실을 허위로 덧씌우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대상이 실제로는 갖고 있지 않은 속성을 그것이 갖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 가탁이다. 이것은 현실 세계의 실체를 가리고 다른 모습을 비춰 주는 영사막과 같은 것이다. 샹카라에 의하면, 지각은 물론이고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험적인 것이든 권위적인(vedic) 것이든 假託이라는 토양 위에 서 있다.[26] 결국 가탁은 마야(maayaa)라는 가상 세계를 연출하는 무지(ajNYaana)이다. 각 개인(jiivaatman)의 경험적 삶은 오직 가탁에서 기인하며, 이 무지의 장애가 바른 인식(jNYaana)에 의해 제거될 때, 개인은 그 자신의 본원적 진실인 브라만(Brahman)과의 동일성을 실현한다.[27] 바꾸어 말하면 이때 세계의 가상은 현실로 전환된다.

현실 세계가 가상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은 현실 세계가 대체로 가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체를 직시하고 경험하며 살고 있다고 믿는 이 현실도 하나의 가상 세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도 철학은 통렬하게 지적해 왔다. 그렇다면 컴퓨터 과학에 의한 가상 세계는 우리를 가상 속에서 또 하나의 가상으로 끌고 가는 세계인 셈이다. 이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이성의 교란이나 마비가 아니겠는가?

현대의 과학 기술에 대해 우리는 가탁의 무지를 경계하고 반성해야 한다. 감각적 경험을 고취하고 이것에 편승하여 발달해 가는 과학 기술의 시대에 우리가 겸비해야 할 것은 가탁의 무지를 경계하고 제거하려는 노력이다. 이 노력을 통해 진실을 보는 지혜가 발현될 수 있다. 과학은 인간의 정신성을 계발하고 실천하는 종교와 철학을 동반자로 삼아 기술의 발달을 추구해야 한다. 이 점에서 과학 기술의 신봉자들은 직접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을 강조하는 아래의 발언을 특히 경청할 필요가 있다.

대승 철학이라는 이 과학은 우리가 서양에서 볼 수 있는 어떠한 것보다 훨씬 심원하며, 현대 과학을 탁월하게 만들 수 있다. 궁극적인 진리는 단지 감각적 경험이 아니라 총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개념은 감각적인 경험에 의거할 뿐만 아니라 빈약한 경험 자체이다. 개념도 경험이다. 과학이라는 개념적 건물 전체가 그러하듯이, 물질의 기본 요소, 생명의 진화, 星雲의 盛衰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현실상의 경험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총체적 경험이 궁극적 진리라는] 이러한 관점은 납득하기 어렵게 보일 수도 있고, 탁월함보다는 오히려 혼동을 초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호하거나 난해하지 않다. 그것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오직 그것이 너무 명백하고 시야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일 뿐이다. 사려 분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학과 불교 양쪽의 첫째 규칙인 注視에 의해 그것은 이해되며, 탁월함이 실감된다. 그리고 우리는 명상에서 주시하는 법을 배운다.[28]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직관적이고 총체적인 인식이며, 이 인식은 정신적 수련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 기질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였던 네루(Pt. Nehru)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중에 ‘마음의 엄격한 수련’을 열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29] 과학 기술이 발전할수록 그만큼 정신적 수련의 필요성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물질적 진화에 병행하는 정신적 진화로써 과학 발전의 폐단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진화를 도모해 온 인도 철학의 수행적 전통은 과학 기술의 시대에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정희, 「생명 세계와 가상 세계」,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문화 변동』(2000년도 연례 학술세미나 자료집, 고려대장경연구소, 2000), p. 17.

[2]) 배국원, 「사이버스페이스의 기독교적 의미」,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문화 변동』(2000년도 연례 학술세미나 자료집, 고려대장경연구소, 2000), p. 116.

[3]) ibid., p. 117.

[4]) ibid. 이들은 “마치 스타킹이나 콘돔을 착용하는 것처럼 특수 옷(bodysuit)을 입으면 수천 개의 자극 단자를 통해 환상으로만 가능했던 섹스를 가상-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5]) “인터넷에서는 어느 누구도 당신이 개라는 사실을 모른다.”라는 묘사가 이 사실을 잘 반영한다.

[6]) Benjamin Wooley, Virtual Worlds: A Journey in Hype and Hypereality(Oxford: Blackwell, 1992), p. 9. 배국원, p. 118 재인용.

[7]) 배국원, pp. 122-3 참조.

[8]) cf. Sherry Turkle, Life on the Screen: Identity in the Age of the Internet(New York: Simon & Schuster, 1995), p. 21. 배국원, p. 123 재인용.

[9]) 배국원, p. 123.

[10]) Rewati Raman Pandey, Scientific Temper and Advaita Vedaanta(Varanasi: Surehonmesh Prakashan, 1991), p. 164.

[11]) cf. Pandey, p. 22.

[12]) ibid., p. 23.

[13]) “우주의 오염과 핵의 지배라는 쌍둥이 유령으로부터 인간의 운명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aatma vidyaa, paraa vidyaa, adhyaatma vidyaa이다.” Pandey, p. 164.

[14]) Buddhadasa P. Kirthisinghe(ed.), Buddhism and Science(Delhi: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Private Limited, 1984), p. 5.

[15]) Kirthisinghe, p. 7.

[16]) Max Weber, The Religion of India, Hans H. Gerth and Don Moctindale tr.(New York : The Free Press, 1967), p. 121.

[17]) Benjamin Walker, Hindu World, Vol. Ⅰ(London : George Allen & Unwin Ltd., 1968), p. 529.

[18]) 다스굽타는 행위의 법칙인 ‘善行 善果, 惡行 惡果’라는 관념은 사물의 불변하는 질서인   ta(天則) 개념과 결합되었을 것으로 본다. S. Dasgupta,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Vol. Ⅰ(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1), p. 72.

[19]) 舟橋一哉, 『業の硏究』(京都: 法藏館, 1954), p. 187.

[20]) 雲井昭善, 「インド思想における業の種種相」, 雲井昭善(編), 『業思想硏究』(京都 : 平樂寺書店, 1979), p. 60.

[21]) ibid.

[22]) 최종덕, 「가상 세계와 다세계의 정보 창출성」,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문화 변동』(2000년도 연례 학술세미나 자료집, 고려대장경연구소, 2000), pp. 42-44 참조.

[23]) 최종덕, p. 44 참조.

[24]) cf. ibid.

[25]) 최종덕, p. 45 참조.

[26]) Pandey, p. ⅹⅹⅱ,

[27]) ibid., p. 166.

[28]) Gerald Du Pr  , “Scientific Buddhism”, Buddhadasa P. Kirthisinghe(ed.), Buddhism and Science(Delhi: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Private Limited, 1984), p. 152.

[29]) “단순히 과학의 적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와 삶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접근, 모험적이면서도 비판적인 과학의 기질, 진리와 새로운 지식에 대한 탐색, 시험과 실험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면 어떠한 것도 수용하지 않는 거부, 새로운 증거에 대처하여 기존의 결론을 바꾸는 수용력, 선입관에 의한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관찰된 사실에 의존함, 마음의 엄격한 수련, 이 모든 것이 필요하다.” Jawaharlal Nehru, The Discovery of India(Asia Publishing House, reprinted 1967), p. 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