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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츨라프와 고대도교회

Joyfule 2008. 6. 13. 00:31

귀츨라프와 고대도교회

                                                                                                                                                             초고 이진수목사

오늘과 미래의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국경을 넘는 사랑과 선교의 열정을 배우기 위해 마땅히 세워야 했으나 17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세우지 못한 우리의 길갈과 우리의 열두 돌이 있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선교지와 한국 최초의 선교사를 기념한 교회로서 선교사훈련 센터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마땅한 행동을 모색하기 위하여 본 글을 쓴다.

2.한국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미국 북 장로교 한국선교사이면서 교회사가이기도한 로드(Harry Andrew Rhodes 1875-1965) 박사는 한국 선교와 관련하여 귀츨라프를 이렇게 소개했다. 의사 귀츨라프는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이며, 임진왜란 당시(1594년 봄)에 두 달 동안 한국에 와서 고니시 유끼나가 장군 휘하의 18만 군인을 선교한 예수회 신부 세스뻬데스를 제외하고는 서양 땅에서 한국에 온 최초의 선교사다.
귀츨라프는 1832년 7월 17일부터 한 달간 조선 서해안을 1개월간 방문하면서 25일 가까이 고대도에 머무르며 전도를 했다. 이는 시기적으로 보아 토마스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대동강변에서 주민들에게 성경을 나눠주다 순교한 1866년보다 34년 앞선 일이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인천에 상륙한 1884년보다 52년 앞선 일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카톨릭 선교사인 불란서 신부 모방이 내한한 1836년보다 4년이나 앞선다.

1)귀츨라프의 생애
독일 교회를 대표하는 선교의 사자로 불리우는 귀츨라프(1803-1851)는 독일 북부지방인 폼머(Pommer)의 평범한 경건주의 가정 태생으로 어학에 재질을 가진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그의 국적은 독일이지만 폴란드계 유대인 혼혈아였다. 그는 소년시절에 공부하려는 열성이 대단히 높았고 선교사가 되려고 갈망하였다. 그러나 부모들은 너무 가난하여 가르칠 수가 없어 스텐틴시에 있는 혁대제조공장의 공원으로 들어갔다. 17세 때에 선교사를 지망하는 간절한 사연을 시로 읊어 프러시아 왕에게 드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베르린에 있는 선교사 양성소에서 국비로 공부하게 되었다.
1826년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정식 선교사로 말래카를 거쳐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로 파송을 받았다. 이곳에서 중국 주민과 함께 철저한 공부와 교제를 하여 중국어 연구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1828년 네덜란드 선교회와 관계를 끊고 런던 선교회의 톰린 목사와 함께 사이암에 최초의 선교사로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복음서와 로마서를 사이암어로 번역하였다.
1831년부터 1833년 사이에 귀츨라프는 세 차례의 선교여행을 떠난다. 1차는 방콕을 떠나 텐진까지의 여행이고, 2차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상 교역지 탐사선에 동승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한국을 방문했다. 3차는 무장한 영국국적의 아편 밀수선을 타고 수행했다.
그는 1834년 마카오에 정착하여 주중 영국대사의 비서겸 통역관으로 있으면서, 그의 선교활동에 관한 기사와 논저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성경을 개역하고 중국어 문법책과 韓英사전을 발간하였다.
1837년에는 마카오에 표류한 일본인을 통해 일본어를 배워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표류 어부 7인을 송환하는 기회를 일본 선교의 계기로 삼으려고 오키나와를 방문하나 상륙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1839년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정부의 통역관으로 종사하고, 43년부터 1851년 8월 9일 죽을 때까지 홍콩정청에 근무하면서 목회자 양성학교를 개교하여 4년 동안 47명의 중국인 목회자를 배출하고, 중국인 협회를 결성하여 약 천 명의 권서인과 백 명의 설교자를 파송하여 중국 오지 선교를 지원하였다. 그의 선교 방법은 영국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 채택되어 중국 내지선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2)귀츨라프가 조선에 오게 된 배경
1832년 동인도회사에서는 극동의 새로운 통상 지를 개척 탐사하려는 목적으로 타이완을 거쳐 조선 서해안과 제주도 그리고 일본 오키나와에 이르는 항해를 계획하고 그 책임자로 린제이를 임명하였다.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는 중국 선교사 모리슨(R. Morrison)의 추천으로 중국어에 능통한 의사요, 선교사인 귀츨라프 목사를 선의(船醫) 겸 통역관(通譯官)으로 동승시켰다. 동인도회사가 준비한 ‘암허스트경호’는 1천 톤 급의 군함으로 이 항해의 목적은 통상 개시에 관한 관심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츨라프는 이를 조선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절호의 선교기회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3.한국 최초의 선교지 ‘고대도’
1)귀츨라프가 조선에 도착하여 고대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그들은 1832년 7월17일 조선에 도착하여 황해도 장현 조이진에 닻을 내렸다. 귀츨라프는 전도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이틀 만에 그 곳을 떠났다.
7월23일 남쪽으로 계속 항해한 끝에 암반과 여러 섬이 있는 사이에 정박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Teng-no'(텡노/행노)라는 한문에 능한 조선인의 방문을 받고 필담을 통해 그들의 방문 목적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들이 정박한 곳이 ’Lok-tao'(鹿島) 동쪽의 조그만 불모도(不毛島)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인 24일에 ‘Teng-no'가 다시 찾아와 지금 정박한 곳은 대단히 위험하므로, ’Gan-Keang'이라는 항만으로 가면 안전한 닻을 내릴 수 있고 고관을 만나 무역상담을 하고 식량도 구할 수 있다고 권고하였다.

2)귀츨라프의 고대도에서의 활동
7월25일 ‘Gan-Keang'이라는 항에 도착하여 정박하기 알맞고 바람막이가 잘된 곳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Teng-no'와 함께 온 홍주목사의 서생(書生) ‘Yang-chih'라는 이의 방문을 받는다. 그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돌아갔다.
26일에는 나이가 지긋하고 위엄이 있는 Kin이라는 성의 군관과 Le라는 성의 문관의 방문을 받는다. 귀츨라프 일행은 그들이 조선을 방문한 목적이 국왕에게 통상을 정식으로 청원하는 서한과 함께 선물을 전하려는 것임을 밝히고, 조선 관리들이 어느 정도 호의를 보이자 한나절 넘게 선물을 포장하였다. 또한 귀츨라프는 갑판 위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눠주었고 그들이 기쁘게 받는 것을 보고 아주 만족해 하며, 조선 국왕도 성경을 받아 읽고 유익을 얻을 수 있기를 갈망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마을에 상륙하여 서한과 헌상품을 두 고관에게 전달하였다. 그들은 위탁받은 물품을 빨리 진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일에 관한 한국측의 최초의 기록은 순조 32년 7월 8일(양력 8월 4일)자의 보고이다.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 김형수의 장계를 올려 이양선의 출현을 비변사에 보고하였고, 그 내용은 같은 날짜의 ‘비변사등록’과 ‘일성록’에 기록되었다. 이 보고서를 받은 비변사는 다음 날인 7월 9일(양력 8월 5일)에 이를 승정원에 보고한 것이다. 승정원의 지침에 따라 이 사건을 처리한 후 공충감사 홍희근으로 하여금 이 사건 전모를 정리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순조 실록은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6월 25일(양력 7월 22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 竹船) 1척이 홍주(洪州) 고대도(古代島) 뒷바다(後洋)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 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螢綏)로 하여금 달려가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그리고 이 사건을 정리하여 예부(禮部)에 발송한 자문(咨文)은 다음과 같다.

“본년 6월 26일 유시(酉時) 경에 이양선 1척이 본주(本州) 고대도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는데,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라서 역학(譯學) 오계순(吳繼淳)을 차송하고 본 지방관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우후 김형수로 하여금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달려가서 합동으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따라서 귀츨라프의 조선 방문에 대한 1차 사료인 린제이 보고서와 귀츨라프 항해기 그리고 비변사등록 등 조정의 여러 기록을 비교해 보면 다음의 내용들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고 허호익 교수는 밝혔다.
첫째로 이양선이 서해안에 나타난 순조 32년 음력 6월 25일(충청도 감사 홍희근의 보고) 또는 26일(예부에 보낸 咨文)은 암허스트경호가 서해안에 도착한 서기 1832년 7월 22일(린제이 보고서) 또는 23일(귀츨라프 항해기)과 일치한다.
둘째로 귀츨라프와 린제이가 정박지로 기록한 ‘Gan-Keang’이라는 항구 이름은 홍주목사 이민회 등의 보고서에 의해 충청도 홍주(洪州) ‘古代島 後洋 또는 安港’이라고 밝혀졌다.
셋째로 귀츨라프가 만난 “Kin이라는 성의 군관과 Le라는 성의 문관”은 순조실록에 의해 수군우후 김형수와 홍주목사 이민회로 확인되었다.
27일 귀츨라프 일행은 고대도에 상륙하여 섬 전체를 돌아보았다. 단골 조사관인 ‘Yang Chih’와 ‘Teng-no’의 방문을 받고 그들에게 처음으로 필담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다. 귀츨라프는 또한 사람들에게 전도문서와 복음서를 나눠주었다. 그는 이러한 한국 땅 최초의 선교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나는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전도 문서를 곁들여 복음서를 주었는데 그들은 관심을 가지고 보겠으며 잘 간수하겠다고 하였다. 나를 슬프게 한 것은 그 후 관리들이 책이나 그 외에 무엇이든지 받으면 안 된다고 금지시킨 것이다. 그래서 단추 하나도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명령이 내리기 전에 이미 많은 관리와 서민들이 생명의 말씀을 받았다…….(중략)…….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에 푸짐한 열매를 맺으시리라. 가장 낮은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을 알 때 아주 재미있었다. 그들은 다른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질투하리만치 편협한 것 같지 아니하였다. 이 나라에는 종교가 거의 없는 것이 명백하여 우리는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파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린제이의 항해기에는 이날 양이(Yang-yih)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고 번역하도록 시도한 기록이 있다.

“27일 오랜 설득 끝에 우리는 양이에게 한글 자모 일체를 쓰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귀츨라프가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쓰자, 그는 그것을 한글로 읽는 동시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그의 손으로 목 자르는 표시를 반복하면서, 만약 고관들이 알면 목이 달아날 것이라는 경고를 하였다. 그는 그 종이를 없애버리기를 애걸하였다. 그의 염려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그가 보는 앞에서 그 종이를 상자 속에 넣어 잠그고 누구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켰다.”

7월 30일 오후 귀츨라프는 해변에 감자를 심으러 갔으며 감자를 성공적으로 재배하는 법을 글로 써서 주었다.
7월 31일에는 며칠 전에 섬을 돌아보면서 야생 포도를 발견한 것을 기억하고 주민들에게 포도주와 포도즙 재배법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8월 2일 이 날 귀츨라프는 감기 환자 노인 60명분의 약을 처방하여 나눠주었다.
8월 4일 홍주목사 등으로부터 영길리 선박의 고대도 인박(引舶)에 관한 최초의 보고가 올라갔다. 이후 더 조사한 후 우의정 김이교(金履喬)와 승정원은 이 사건을 조정의 사전 허락도 없이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와 사적으로 통상한 부당한 처사라 단정하였다. 그리고 통상 청원서와 진상품(奏文과 禮物)을 귀츨라프 일행에게 환급 조치할 것을 지시했다.
8월 7일 오계순의 지시로 김대인(水軍虞候 金螢綏)이 서한과 진상품을 도로 가져오자, 귀츨라프는 그것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김 노인은 이 선물을 임금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한 일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근심하였다. 이 날 귀츨라프 일행은 작은 배로 큰 항만을 탐사하기 위해 서북쪽의 어느 섬에 상륙하여 주민들에게 책을 전해주고 그 이튿날 새벽에 돌아왔다.
8월 11일 귀츨라프는 25일 동안 체류했던 조선을 떠나면서 조선의 복음화를 이렇게 기원하였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큰 섭리로 자비로운 방문의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진리를 전파하도록 서둘러야겠다. 조선 국왕이 처음에는 거절하였던 성서를 지금 갖고 있는지 또한 읽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강경의 관리와 주민들은 성서를 받았다. 이 첫 전도는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실 것을 확신한다. 조선에 어둠이 가고 속히 새벽이 와서 밝은 날이 오기를 다 같이 바랄 뿐이다.”

4.원산도에 세워진 귀츨라프 기념비
이상과 같은 한국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의 한국 선교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원산도에 세워져 있으며 비문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선교사 카알 귀츨라프(M. D) 기념비
(화란 선교협의회 소속, 독일신교 선교사)
1803년 피릿즈 / 포다라니 에서 출생
1851년 홍콩에서 소천
카알 귀츨라프(의사) 선교사는 1832년 7월 17일 이곳에 도착하여 한문으로 된 전도지와 주기도문 그리고 감자 종자를 이곳 도민에게 전함. 그의 전기에는 그는 확신을 가지고 “보다 훌륭한 여명의 날이 한국에 빨리 오기를 바람”이라고 언급함.
-그가 오셨던 150주년을 기념하여 1982년 7월 17일 이를 세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의회(KCMEA)
주한서독대사관
주한 화란대사관
학교법인 송죽학원
지역사회개발위원회
뒷면에는 영문과 독문으로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에 화란선교회에서 파송을 받았지만 선교방침이 미온적인데 불만을 품은 귀츨라프는 1830년 영국선교회로 소속을 옮겼다. 그래서 중국을 포함한 동양선교회 전 기간을 영국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일하였다. 그런데 이 비문에는 독일과 화란 대사관 이름이 들어가고 정말 들어가야 할 영국 대사관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데 있어서 문제점이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귀츨라프 선교사의 기념비가 원산도에 세워진 점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고증을 통해 볼 때 귀츨라프가 비문에 적힌 활동을 한 곳은 원산도가 아니라 고대도이기 때문이다. 귀츨라프가 원산도에 상륙하였다는 것은 프랑스 신부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1874년)에 기록되어 있고 이를 백낙준 박사가 그의 저서 “한국개신교사”에 소개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귀츨라프 일행은 고대도에 체류하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 한하여 달레의 기록은 신빙성이 적다. 그는 조선에 한 번도 온 일이 없으며 귀츨라프가 서해안에 온 연대인 1832년 보다 40 년이 지난 후에 저술하였다. 그리고 홍주 목사가 자기 관할구역의 도서명을 어련히 알아서 보고하였겠느냐 하는 것이다. 귀츨라프의 항해 일지에 보면 8월 10일에 정박지 근처의 큰 섬에 상륙하여 둘러보았는데 이 섬은 인구가 조밀하고 지금까지 둘러본 섬 중에서 경작지가 제일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섬이 원산도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큰 섬에서 잠시 둘러보았다고만 했지 감자를 재배하였다거나 주기도문을 번역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더구나 7월 17일은 귀츨라프의 항해일지에 장산도에 도착하였다고 하니 분명히 아니다.

5.맺는말-고대도에 귀츨라프 기념교회를 육성하기를 희망한다.
1832년 귀츨라프가 성경과 기독교문서를 서해안에 반포한 이 사건은 굳게 닫힌 조선의 문을 두드려 조야(朝野)에 외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서해안 방문은 토마스의 대동강 순교(1866년), 로스의 성경번역(1882년)으로 맥이 이어졌다. 후에 토마스가 조선인에게 던져준 성경은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성경을 귀츨라프와 브릿지맨 등이 제 1차 개역을 하였으며(1839), 다시 개역한 원리성경이었다. 그 성경을 읽은 사람이 개종하여 선교사 없는 신자가 자생되었다. 또한 로스는 원리역을 대본으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그 성경을 통하여 국경을 넘어 은둔의 나라를 깨고 소래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귀츨라프의 항해기’가 런던의 호머톤 칼리지(Homerton College)에 비치된 것이 1836년이고 조선 등에 대한 기사에 상당한 언더라인 자국이 있었다. 토마스가 열심히 읽었다는 가정을 한다면 토마스의 조선 선교는 이때부터 싹이 텄다고 볼 수 있다. 또 김양선 목사는 로스가 고려문 전도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통해 한국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이 확실하다고 하였다. 귀츨라프는 그의 저서로 로스의 마음까지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비록 귀츨라프가 한국에 짧은 기간 밖에 머무르지 못했고 또 당시에는 눈에 보이는 열매를 맺지 못했을지라도 최초의 한국선교사답게 한국 선교의 길을 닦아놓았던 것이다. 성과의 유무를 떠나서 귀츨라프는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로서 한국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대도 역시 한국 최초의 선교지로 큰 의의가 있다. 이제 고대도는 귀츨라프가 그 땅을 밟은 지 17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신 총회에서는 2001년 86회 총회에서 고대도 교회를 귀츨라프 기념교회로 선포하고, 한국 최초 선교 기념교회(고대도) 건립 추진위를 발족, 전국의 교회들이 약 4억을 헌금하여 기념예배당을 건립하고 2005년 헌당예배를 드렸다. 현재 기념교회 2층에는 귀츨라프 기념실이 마련되어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귀츨라프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고 “귀츨라프와 고대도”라는 책을 저술한 리진호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지인 고대도에 대하여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카톨릭에 비하여 유적지가 적은 개신교에서 고대도를 성역화 하는 운동이 전개되었으면 좋겠다. 귀츨라프 동상을 건립한다든지 현재의 교회를 기념교회로 육성한다든지 기념도서관 설치, 조림, 휴양관 시설 등 사업이 기획될 수 있다. 이 전기를 쓰는 것도 귀츨라프를 기념하고 최초의 선교사의 공로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한 교회역사가의 가슴에만 머무르고 말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가슴과 손에서 활동하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사업 중에 현재의 교회를 기념교회로 육성하는 것을 먼저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고대도는 현재 1개의 교회가 있다. 고대도 교회는 1982년 4월 30일에 설립되었는데 귀츨라프가 고대도에 와서 선교를 하고 돌아간 지 150년 만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고대도에 있는 이 교회가 기념교회로 이와 관련된 모든 사업에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동참하고 있다. 그리고 현지에서 유관기관으로서 모든 수집된 자료라든지 건립된 것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 가운데서, 계속해서 전국 교회의 관심 속에서 성공적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한국 최초의 선교지에 와서 한국 최초의 선교사의 숨결을 힘차게 느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이곳을 둘러보고 가는 모든 이들마다 귀츨라프의 그 불타는 선교열정을 그들의 가슴에도 품은 채 선교사가 선교 지를 향하여 떠나듯 배를 타고 고대도 앞바다의 푸른 물결을 헤치며 떠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참고도서

김영재. 한국교회사.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리진호. 귀츨라프와 고대도. 과천시: 감리교출판사, 1988.
허호익.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와 고대도.” 淸風 창간호 (1998년 10월): 129-163.
조선왕조 신록 순조실록 48집 380-38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