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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이승만과 대한민국

Joyfule 2020. 8. 15. 07:41



기독교와 이승만과 대한민국


"공산주의는 콜레라이다. 인간은 콜레라와 함께 살 수 없다"고 그 악마성을 통찰한 이승만이 있었기에 우리가 행복하다.

 

프리덤뉴스 webmaster@freedomnews.co.kr

 

 

건국대통령 李承晩 박사를 생각한다 
  
유럽에 가면 거대한 성당건물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이것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인간의 손을 빌어 지은 걸작이다. 성베드로 성당, 톨레도 성당, 노테르담 성당, 쾰른 성당, 바르셀로나의 미완성인 聖가족성당(가우디 설계), 스트라스부르흐 성당 등은 최단 200년, 최장 800년이 걸려 지은 성당들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성당에는 여러 건축양식이 다 들어 있다. 고딕,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바로크 등등 여러 양식의 부분 부분들이 하나의 종합된 예술품으로 서 있으니 더 감동적인 것이다. 역사의 기복과 문화의 나이테를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오랜 성당들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골동품이나 구경거리로 거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예배당으로 쓰인다. 유럽사람들은 역사속에서 그 역사를 호흡하면서 오늘을 살고 있다.
 
  민주주의를 그러한 성당건물에 비교해본다.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그런 성당을 짓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더 많은 세월과 더 많은 시행착오와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 시대까지 거슬러오른다면 오늘의 서구식 민주주의 역사는 약2500년이나 된다. 1215년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까지 올라가도 약800년이다. 이 오랜 기간에 민주주의는 갈之를 그리면서 서서히 발전해왔다.
 
  민주주의는 특권층의 것으로 출발했다. 귀족과 시민만이 누리던 민주주의가 평민과 여성, 그리고 흑인 등 소수민족에까지 확산된 것은 최근 100년 사이이다. 유럽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이 확립된 것도 최근이다. 영국의 경우는 17세기말 명예혁명 이후이고 프랑스는 1871년 제3 공화국 이후이며, 독일은 1945년 이후이고, 前 동구공산권 나라들은 1989년 이후이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시간을 더 많이 먹고 자란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는 1948년8월15일 건국으로부터 출발한다. 민주주의는 국가라는 그릇이 없으면 담길 수 없는 보물이다. 국가 없는 민주주의란 종이위에 쓰여진 학설일 뿐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의 지원을 끌어내어 대한민국을 세우고 반역공산집단의 기습으로부터 이 신생아 같은 어린 나라를 구했다. 건국과 호국을 주도한 李承晩 대통령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의 첫장을 연 분이다. 우리가 그를 건국 대통령이라고 부를 때 그 의미는 국민국가를 세운 분, 즉 민주주의 건설 대통령이라는 뜻이다. 국민이 자유민주주의의 기치 아래서 정권을 선택하고 국회의원을 뽑는 국민국가를 출범시켰기 때문에 그 뒤 수많은 기복이 있었지만 우리는 민주주의 원칙이란 운전대를 놓지 않고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같은 시기 북한의 金日成은 소련이 써주는 시나리오대로 반역집단을 세워 남쪽의 정통국가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전통이 전무한 가장 척박한 토양에서, 그것도 생존의 위협속에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키워내야 하는, 아니 살려내어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것이다.
 
  李承晩, 이 분의 어느 시기 행태를 과장하여 그를 독재자로 모는 것만큼 가혹하고 배은망덕한 일은 없을 것이다. 李承晩 대통령을 독재자로 모는 이들의 논리적 근거는 그가 서구식의 완벽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聖베드로 성당을 왜 10년만에 다 짓지 않고 수백년이 걸렸느냐고 욕하는 것과 같은 망발이다. 聖베드로 사원의 주춧돌을 놓는 역할을 맡은 건축가에게 왜 건물을 다 짓고 돔까지 올리지 않았느냐고 채찍질을 한다면 이는 이 건축가가 하나님이 못되었다고 욕하는 격이다. 李承晩 대통령이 하나님이 되지 못했다고 욕하는 자들은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참칭한 金日成에 대해선 욕 한 마디 하지 않는다.
 
  李承晩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朴正熙 대통령과 함께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이분이 민주주의 건설에 악영향을 끼친 부분은 공에 비교하면 작다. 민주주의 건설은, 대성당을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인데 李대통령은 그 기초공사를 한 분이다.
  그는 우선 자유진영 편에 이 나라를 줄세웠다. 李박사와 미국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공산주의 세상이 되어 1990년대엔 북한처럼 수백만 명이 굶어죽었을 것이다. 자유진영은 선진국이다. 후진국이었던 한국은 선진국으로부터 민주주의 하는 방법과 시장경제 하는 방법과 군대를 운영하는 방법과 과학기술을 배웠다. 반면, 북한의 김일성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무능한 나라의 정권들과 친구가 되어 거짓말하고 학살하며 독재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이 남북한의 오늘날 차이를 불렀다.
 
  후진국이 민주주의를 하려면 우선 농사짓지 않는 특권계급으로서의 地主를 없애는 농지개혁을 해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하면 地主는 수구기득권세력이 되고 농민들은 불만세력이 된다. 여기에 공산주의나 이슬람 원리주의가 파고들어가면 항구적인 체제갈등이 생긴다. 南美의 대부분, 필리핀, 그리고 파키스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지주출신 정치세력의 반발을 꺾고서 6.25 남침 직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만약 6.25 남침 때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군이 지주로부터 농토를 빼앗아 소작농에게 나눠주었다면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때 이들은 농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북한군 편에 서서 국군에 대항해 싸웠을 것이다. 농지개혁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놓았을 뿐 아니라 민주한국을 지켜냈다.
 
  李承晩 대통령은 6.25 휴전과정에서 미국을 협박하다시피해가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이에 근거한 한미군사동맹은 지금까지도 한반도의 평화, 한국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해준 울타리요 우산 역할을 하고 있다. 韓美동맹은 또 미국이 깔아놓은 세계의 무대에 한국인이 등장하여 수출도 하고 투자도 하며 이민도 갈 수 있는 활동공간을 제공했다. 한국인은 자유진영의 지도국인 미국의 血盟이란 보증하에서 세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안보가 불안하면 절대로 필 수 없는 꽃이다. 한미동맹을 만든 李대통령은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그 울타리와 우산을 만든 것이다. 이런 분을 독재자라고 부르고 한미동맹을 와해시키려는 戰犯세력을 평화, 민족세력이라고 부르는 작금의 한국내 좌파세력이야말로 민주주의 파괴세력이다.
 
  민주주의는 교육받고 먹고 살 재산이 있는 중산층이 적어도 국민의 반 이상이 될 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李대통령은 전쟁중에도 교육을 중단하지 않았고 대학생에게는 현역복무를 면제해주면서까지 人材육성에 주력했다. 더구나 그가 가르친 것은 독재에 순응하라는 가짜 주체사상이 아니라 독재에 항거하라는 민주주의 윤리였다. 이 교육을 李정권 때 받았던 학생들이 1960년 4.19 학생의거의 주력이 되었다. 이 세상에 자신을 타도하라고 가르치는 독재자도 있는가.
  더구나 李대통령은 학생들이 시위진압에 희생되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물러났다. 4.19 때 학생들은 선거를 다시 하자고 했지 "이승만 물러나라"는 구호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퇴진요구도 없는데 스스로 평화적으로 물러난 사람은 독재자가 아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발췌개헌, 3선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집권 시절 경찰과 특무대가 야당을 탄압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李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의 자유, 선거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파괴, 봉쇄하려 하지는 않았다. 6.25 남침을 당해서 전쟁중인 나라에서도 국회는 활동했고 대통령을 몰아내려고 했으며 언론은 군대와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고 선거도 중단되지 않았다.
 
  李대통령은 좌익들까지 지도자로 모시려고 했던 위대한 독립투사였다. 그는 초대내각에서 친일파를 한 명도 쓰지 않았다(반면 김일성은 자신의 편에 선 친일파를 비호했다. 그의 동생 金英柱는 日軍의 통역을 한 사람인데도 제2인자가 되었다). 李대통령이 일제 때의 경찰관과 공무원들을 중용한 것은 일본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일제 때 국가운영에 참여하여 배운 기술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쓰도록 했던 것이다. 일제 경찰관 출신들이 李정권의 수사기관에 들어가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만드는 고문수사를 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한국 수사관들의 과잉충성과 법치무시 체질 때문이지 李박사에게 모든 책임을 씌울 수는 없을 것이다. 관리가 백성들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 전통처럼 되었던 조선조 관료의 체질과 일제의 탄압체질을 지도자 한 사람의 책임으로써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순진하고 낭만적으로 보는 분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李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간판을 걸고 북한과 생존투쟁을 하면서도 그 원칙을 고수해가려고 苦鬪한 데 우선 감사를 드리고 그분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일한 부분이 90%라면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한 부분은 10%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80%의 긍정이 남지 않은가. 그런 분을 독재자라고 불러 그분의 모든 업적을 말 한 마디로 무효화시키려 드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 전체에 대한 모독이자 역사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건국, 호국의 시대가 독재자의 시대였단 말인가. 그 시대의 국민들은 독재자에게 모두 굴종하였단 말인가. 아니면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망할 지경에 처했던 나라를 국민들이 다 잘해서 이렇게 발전시켰단 말인가. 李대통령 시대는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그 뒤 朴대통령이 성공적으로 나라를 근대화시킬 수 있는 울타리와 바탕과 우산을 마련했던 고난의 시절이자 영광의 시대였다. 이 시대의 功過는 대통령과 국민들이 나눠가져야 한다. 功의 가장 큰 부분과 過의 가장 큰 부분은 물론 李박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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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柳永益 교수, '神이 내린 사람 李承晩' 
  
 미래한국
 
  카리스마, ‘神이 부여한 권능’의 이승만
  근대화, 이승만의 업적 위에서 가능
 
  22일 신반포중앙교회에서는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대가인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를 초빙해 이승만 박사의 건국에 대한 강연과 토론이 진행됐다. 아래는 이날 강연요지이다.
 
  <이승만 폄하는 ‘연구부족’탓...국내 근현대사 연구 부족으로 외국학설이 석권
 
  이승만에 대한 폄하(貶下)는 근본적으로 ‘연구부족’에 기인한다. 한국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다보니 외국 학설이 학계를 석권했다. 브루스 커밍스 류(類)의 수정주의 사관이 그것이다.
 
  이 같은 외국 학설들은 원숙한 안목으로 이루어진 연구업적이 아니다. 외국인이 젊은 나이에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도출한 결론들이 대부분이다.
 
  이승만 비판을 위해 가장 많이 원용되는 자료인 리처드 알렌(Richard Allen)의 이승만 전기를 예로 들어보자. 리처드 알렌(본명: John M. Taylor)은 6. 25전쟁 중 ‘이승만 제거계획’을 작성했던 미8군 사령관 테일러(Maxwell Tayor) 장군의 아들로서 이 책을 쓸 때 30세였다.
 
  미국의 정보*외교 관련부서에서 근무했던 그는 한국에 약 2년간 머물면서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이 책을 썼다. 특히 이 책은 4`19 직후에 나온 것으로서 이승만 하야에 개입했던 미국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출판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 한국 사람들은 20여 권의 책을 쓴 ‘제대로 된’ 미국인 학자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의 이승만 전기를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이승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해놓았다는 게 그 이유이다.
 
  역사라는 것은 지나간 사람과 사건에 대해 엄정하게 심판하는 것이다. 한국역사를 보는 안목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미국사람들의 책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학문적 사대주의’이다. 우리 스스로 애정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이승만 박사
 
  한미동맹 후 평화 정착과 경제성장 기반
 
  이승만은 1인당 GNP 50달러, 문맹률 80%에 달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중국만 해도 20여 년간의 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는데 한국은 3년 만에 이를 이뤄냈다.
 
  이승만이 해낸 업적을 개괄해보자.
  이승만은 우선 건국의 주역이었다. 헌법 제정 당시 그는 한민당 세력을 대변하던 유진오의 초안(草案)에 불만을 품고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바꿔놓았다. 이것은 ‘정권욕’때문이 아니라 오랜 신념의 결과였다. 새로운 나라에는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며 내각책임제가 되면 조선조의 당쟁이 재현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승만은 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냈다. “안 해 주겠다.”는 미국의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져 간신히 얻어낸 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조약 체결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는 전쟁이 사라졌다. 19세기 말~20세기 초 14년에 한번씩 일어났던 전쟁이 60년 이상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민족생성 이래 가장 큰 경제발전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외교적 바탕위에 가능한 것이었다.
 
  5만 군사, 70만 강군(强軍)으로
 
  군사적으로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건국 초 5만 명 수준에서 이승만 집권 말기에 70만 명으로 증강됐다.
  이승만은 미국에 거듭 군사원조를 요구해서 건국 당시 5만의 군대를 갖췄고, 6.25사변 당시 이를 10만으로, 종전 후에는 70만으로 증강시켰다. 조선조가 망할 때 상비군이 겨우 8,500명이었다. 명성황후 시해도 못 막아내던 우리 민족이 역사상 최초로 군사강국 대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80%의 문맹률 10% 이하로 떨어져
 
  교육 측면에서는 더 큰 업적을 이뤄냈다. 6년의 의무교육제를 도입해 80%의 문맹률을 하야 당시 10% 이하로 떨어뜨렸다. 국민의 90%가 문자 해독(解讀)력을 갖게 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의 비율은 영국을 앞질렀다. 60년 이후 경제기적은 이승만 시절 양성된 고급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경제 측면에서 ‘농지개혁’을 통해 자작농을 만들어냈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이성계의 과전법 이후 최초였다. 농지개혁을 6. 25전쟁 이전에 단행함으로써 남한의 농민들이 북한 인민군에 편들지 않게 됐다.
 
  이승만의 집권을 통해 한국은 기독교국가가 됐다. 1885년 아펜젤러가 한국에 와서 개신교 선교를 시작했는데 1900년대까지 양반계층 중 개종한 사람이 거의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 중인이나 상민,천민들이었다. 양반출신으로서 ‘거의 최초’의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은 젊은 시절부터 한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들겠다는 꿈을 키운 사람이었다. 1919년 3.1운동 후 그는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대통령이 된 후 이승만은 청년시절의 비전을 실현해간다. 12년간 기독교를 음`양으로 지원했고 이러한 후원을 배경으로 한국교회는 1950년대에 급성장했으며 1960년대 이후 지속적 성장을 한 것이다.
 
  미국을 모델로 하는 건국의 꿈은 미국의 제도가 지상에 어떤 나라보다 우수하다는 판단에 기초했다. 일본, 중국, 러시아의 압박을 받지 않는 부강하고 당당한 나라가 되려면 미국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흔히 이승만이 한국을 미국에 예속시켰다고 하는 주장은 ‘세계체제론’을 맹신하는 이들의 얕은 생각에 불과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이 이뤄 낸 기반 위에서 모든 것을 이뤄냈다. 더 어려운 기초 작업은 이승만이 해낸 것이다.
 
  北공산화 이후 ‘정읍 발언’
 
  이승만의 건국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흔히 46년 6월 3일 정읍발언에서 나온‘남한 單政論’에 근거해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이라 비난한다. 그러나 이미 45년 9월 20일 소련의 스탈린은 북조선에 ‘親蘇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려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드는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에 따라 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실질적 단독정부가 들어섰고 그 이름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토지개혁’이란 보통 정부가 갖는 것 이상의 막강한 권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승만은 북한의 공산화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소(美蘇)공동위원회에서 통일된 독립정부를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성과 없이 무기 휴회되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보았다. 단독정부 발언은 그렇게 나온 것이다.
 
  ‘인공’은 대표성 없는 박헌영派의 조직
 
  브루스 커밍스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관련 하에 미군정이 해방직후 서울에 선포된 인민공화국(人共)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비난한다. 그러나 ‘인공’은 좌익인 박헌영 계 사람들이 서울 경기여고 자리에서 하루 동안 회의를 거쳐 선포한 조직이다. 모인 사람들의 대표성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절차도 무시됐다. 커밍스는 이러한 ‘인공’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의 앞잡이’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해방 전 이승만은 미국정부에 ‘골칫거리’였다. 미국은 국무성에 찾아가 항상 임정승인을 요구하는 이승만을 껄끄러워했다.
 
  실제 미국은 47년까지 이승만 대신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원했다. 조종하기 쉬운 사람을 선호했던 것이다. 미국이 이승만 지지로 선회한 것은 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으로 대소봉쇄정책이 확정되고, 같은 해 5월 8일에 열린 미소공위가 또 다시 유산된 이후였다. 미국이 확실하게 반공(反共)노선을 채택하면서 한반도에서도 꾸준히 반공(反共)주의 입장에 섰던 이승만을 밀게 된 것이다.
 
  경찰, 군대 친일파 등용은 여순 반란 탓
 
  이승만의 친일파 등용은 근본적으로 인재부족 때문이었다. 나치 치하 프랑스의 비시정권에서는 고급인력이 30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통치 이후 한국의 교육받은 인력은 3천여 명에 불과했다. 프랑스는 親獨派 5만을 숙청해도 상관없었지만 한국은 달랐다. 당장 외무장관을 시키려고 해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일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초대 내각을 만들 때 단 한명의 친일파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경찰에 친일파가 많이 남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여수순천반란사건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세워진지 2개월 만에 남로당 지령에 따라 여순반란이 일어났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 앞에서 좌익들을 소탕하기 위해 ‘반공법’이 제정됐고 같은 이유로 일제시대 공산당을 잡던 전문가들이 다시 경찰에 등용된 것이다.
 
  UN통해 명예로운 건국
 
  이승만의 건국은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명예로웠다. 새로운 왕조나 독립국가의 탄생은 대개 내전을 거쳐 달성된다. 그러나 이승만은 UN을 통해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이는 이승만이 처음으로 고안한 것이다.‘미국의 괴뢰국가가 되서는 안 된다’는 판단 아래 이승만은 미국에서 로비를 벌여 세계기구인 유엔의 축복 속에서 건국을 이뤄냈다.
 
  95.5%의 투표율을 보인 총선거(제헌국회선거)는 남로당과 남북협상파의 방해 내지 비협조 속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과였다. 이 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에서 이승만은 196표 가운데 180표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을 뿐 아니라 세계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명예로웠던 대한민국의 탄생이었다.
  카리스마란 ‘神이 부여한 권능’ 혹은 그러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이승만은 카리스마였다.
 
  이승만은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등 군웅(群雄) 가운데 가장 탁월했던 인물이다.‘카리스마’란 모세와 같이 초인적인 권능을 가진 인물을 가리킨다.
  ‘카리스마’는 역사에 돌연 나타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낸다. 개인적 욕심 때문이 아니라 신이 내린 명령이라는 소명의식으로 그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한국사에 나타난 이승만 역시 그와 같은 ‘카리스마’적 인물로 볼 수 있다.
 
  정리 김성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