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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毛택동이 제일 두려워한 인물

Joyfule 2020. 8. 15. 07:38





李承晩은 毛택동이 제일 두려워한 인물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 (2) 프란체스카 도너 리 著 / 도서출판 촛불 刊 (2006)

 

 
◇프린스턴대 신학부 학생들과 함께(1909년). 셋째줄 맨 왼쪽 앉아 있는 이가 이승만. 이승만은 신학부의 기숙사인 하지홀(Hodge Hall)에 머물면서 신학과 정치학 강의를 듣고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은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1900~1992)가 1985년부터 ‘일요건강’에 연재한 글을 모아 간행한 회고록이다.

1933년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결혼한 후 1965년 이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할 때까지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에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 6·25전쟁 등 현대사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다. 주요 내용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6월 27일 서울 떠나며 “내 평생 처음 잘못 판단”
李 대통령의 장수 비결은 自由통일에 대한 의지와 신념

6·25 전쟁 때 나는 대통령의 구술을 받아 매일 매일 겪었던 일들을 타이프해 놓았다.

수많은 탱크를 앞세우고 불법남침했던 공산군을 맨 손으로 막아야 했던 긴박한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을 전화로 불러내어 호통 치던 대통령을 만류하던 일, 6월 27일 새벽 남하하는 기차 안에서 침통한 얼굴로 “내 평생 처음 잘못 판단했다”고 괴로워하던 대통령의 모습, 단돈 5만 원을 가지고 떠났던 피난길, 회고하기 조차 끔찍한 고통과 슬픔 속에서 1·4후퇴를 했던 1951년 설날은 경황 중에서도 서울 경무대에서 안남미(길고 맛 없는 수입쌀)로 떡국을 끓여 먹던 일로 기억이 된다.

대통령이 “설날인 오늘 우리 국민 모두가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순간, 나는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났다.

6·25 전쟁 때는 일선장병 위문을 가거나 피난민 수용소에 갔다가 끼니를 놓쳐서 종종 굶는 경우가 있었다. 1950년 여름 우리가 경북지사 관저에 있을 때, 대통령은 이기붕 씨네 어린 두 아들에게 갖다 주도록 참외를 사기 위해 대구 거리로 나갔다.

대통령은 1,000원 어치 참외를 산 후 참외장수에게 “덤으로 하나만 더 주시오”하며 한 개를 집으려 하자 참외장수는 “할아버지라 싸게 드렸는데 덤까지 가져가면 순사가 잡아가요”하며 대통령의 손에서 참외를 뺏더라는 것이다.

파장이 된 저자거리에서 시골참외장수에게 덤 한 개 얻으려다 뺏기고 온 대통령이었지만, 바로 그 대통령을 중공의 모택동 주석이 가장 무서워했다고 한다.

우리와 개인적인 친분이 깊었던 미국 국회의 프레드릭 부라운 해리스 목사(미국 상원 원목)는 “이승만 대통령은 가장 선량하고 성실한 한국신사”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백발의 대통령을 ‘무서운 할아버지’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마크 클라크 대장은 한국전쟁을 회고하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도 한국의 애국자 이승만 대통령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지도자로 존경하고 있다”고 증언하는 모습을 보고 감개가 무량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의 후임자로 와서 대통령이 반대했던 휴전회담을 추진하느라고 애꿎게 대통령으로부터 시달림을 받고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날벼락을 맞았던 사람이었다.

한국의 老대통령에게 그토록 혼이 났던 미국의 장군들이 그렇게 당당하게 증언한 데 대해 마음속으로 고마웠고, 또한 그들의 훌륭한 인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일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던 워커 중장이 의정부 근방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한 뒤 후임으로 온 릿지웨이 장군이 대통령에게 첫 인사를 왔을 때였다. 대통령은 중공군을 맞아 싸우기보다는 후퇴만 하는 유엔군의 전략을 의심하고 있던 때였다.

릿지웨이 장군은 “대통령 각하, 저는 한국에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주둔하려고 온 것입니다. 기어이 적을 박살내고야 말겠습니다”하고 군인답게 말했다.

릿지웨이 장군은 전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8군을 재정비 하여 공세를 취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후 곧바로 중공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때문에 대통령은 그를 아들처럼 사랑하며 믿었다.

72세 때(1948) 대통령직을 맡았던 남편이었지만, 대통령의 주치의는 따로 없었다. 정의의 하나님을 믿고 조국을 구하겠다는 강한 투지와 집념 그리고 고통 받는 동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남편은 언제나 자신의 건강을 돌보거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의 장수 비결은 우리민족의 소원인 남북통일을 기어이 이룩하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불철주야 쉬지 않고 노력한 데 있었다.

통일만 되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서, 한가한 ‘시인 우남’ 선생으로 죽장에 삿갓 쓰고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삼천리 방방곡곡을 유람하겠다고 하던 남편의 음성이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그리고 국제정치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나라가 흔들리게 되면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고 늘 걱정하던 남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리/김정은 기자  hyciel@

김정은기자  2006-08-31 오후 5:5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