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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 (1) - 안영복

Joyfule 2024. 9. 8. 20:14


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 (1) - 안영복

                
         제 2장 영성발달을 위한 인간 이해와 성령의 역사

 

B.두 종류의 성령 충만 


   영성발달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성령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발달의 주도자는 분명히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충만해지는데 있다.  그러데 이러한 성령 충만에는 내적 충만과 외적 충만이 있다.
  
  1.내적 충만
    내적 충만은 성령의 <영>(=영혼(한글개역))에 대한 사역 즉 생명적인 사역을 말한다. 요한복음 3:6에 의하면 중생시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거듭난다.  성령께서는 그 후 우리 영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의 영을 하나님과 생명적으로 연합하게 하심으로(롬6:5, 요14:20) 성화되고 성장되게 하신다.  우리의 인격이 이렇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충만되어질 때, 이것을 <내적 충만>이라고 하며, 그 결과는 <성령의 9가지 열매>로 나타난다. 즉 갈5:22-23에 기록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9가지 열매를 맺게 된다.

   2.외적 충만
     외적 충만이란 성령의 <육체 σαρξ(혼+몸)>에 대한 사역 곧 성령의 은사적 사역을 말한다.  은사는 주의 신령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신 도구(능력)이다.  성령의 은사적 사역은, 고전 12:7-11에 기록된 대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 등등의 은사들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욜2:28에 약속된 “만민” 곧 “모든 육체”(רשׂב לכ) 위에 오순절부터 부어 주기로 약속하신 성령(오순절 성령 행2:14-17)을 받아(성령세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성령의 능력충만) 주로 나타나는데(행2:1-4, 눅24:49),  이것이 바로 성령의 <외적 충만>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이같이 두 종류의 성령충만을 주시는 목적은, 먼저 거듭나게 함으로 <영>에 생명을 주어 변화시켜 거룩한 인격으로 성장시키고, 그 다음 마귀에게 종노룻해온 <육체>(몸+혼)에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능력을 부어 주어, 자기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귀 곧 사탄>은 악한 왕국의 왕이요, <귀신들>은 그의 통치 아래 활동하는 타락한 천사들이다.  귀신들린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을 향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꾸짖을 때, 처음에는 그 귀신이 <나는 과거에 죽은 누구누구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죽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귀신이 그 사람처럼 행동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을 속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속지 않고 계속 예수님의 이름과 그의 권세로 꾸짖고 추궁하면, 죽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라는 자기의 본 정체를 밝히고 떠난다.
   <윤회설>을 말하는 불교의 경우, 사람이 죽어서 소도 되고 돼지도 된다는 것은,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죽으면, 그 안에 붙어 있던 귀신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거나, 아니면 다른 짐승들에게 들어가 활동하다가, 그 짐승이 죽으면 또 다른 곳을 찾아 계속 떠돌아 다니며 생활하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하느냐 하면, 불과 유황못에 들어갈 영원한 멸망의 때까지 그렇게 한다(마12:43-45 참조).  이렇게 볼 때, 불교인들은 <귀신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꼴이며,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 분명한 영분별을 하게 되면 이러한 사실을 밝히 알 수 있게 된다.  
   성령의 모든 은사를 친히 체험한 박철수 목사님에 의하면, 사람에게 들어가는 귀신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 첫째는 태어날 때 들어가 자기화된 귀신(성격 형성, 개성),  둘째는 죄를 지을 때에 들어가게 되는 귀신,  그리고 셋째는 지나가다 슬쩍 사람에게 들어가는 귀신(거릿 귀신)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 8:20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 당시 목수 일을 하셨으니, 목수간도 있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던 집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는가?  그것은, 당시 백성들 가운데 <영과 혼과 몸>이 신령한 집으로 건축되어 있지 못함으로, 주님이 내주 내재할 <신령한 집>이 없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베드로는, 벧전 2:4-5에서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하였을 것이다.
 

   인간 이해에 있어 두 종류의 성령충만은 대단히 중요하다.  두 종류의 성령충만으로 우리 <영>이 새로워지고 우리 육체(혼+몸)가 성령의 능력을 입게 될 때, 우리의 영성과 삶은 제대로 잘 발달되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내 영에 임함으로 영이 변화되고 성령충만하게 됨으로, 내 영의 지정의(知情意)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바로 깨달아, 선악을 바로 분별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보다 성숙해질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생기는 <윤리 도덕적인 감정>은 <혼적인 감정>으로서 죽고 썩을 것이지만, 영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은 생명적이며 실제적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아무리 <조카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머니로부터 흘러나오는 <모성애>는 아니다.  왜냐하면 모성애는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육신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기 때문에 고마워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육신적인 것, 혼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하나님이 내 영혼의 친아버지가 되었음을 깨닫고 감사해서 사랑하는 것은
<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그 사랑의 농도에 있어서 전혀 차원이 다르다.  두 종류의 성령충만을 통해서, 우리는 <영>에 역사하는 것과 <육체>(혼+몸)에 역사하는 것이 다름을, 사랑의 느낌으로도 이렇게 입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