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기 장로
새마을운동의 요람 가나안농군학교 창립
신사참배·창씨개명 거부 옥고도
▲ photo 가나안농군학교 |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기독교 정신으로 우리 농촌을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福地)로 일군 이상촌 운동가 일가(一家) 김용기(金容基). 그는 새마을운동의 요람인 가나안농군학교를 창립한 인물이다. 일제하 창씨개명, 동방요배, 신사참배를 정면으로 거부한 독립지사였다.
일가는 1909년 9월 5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봉안 마을에서 김춘교(金春敎)와 김공윤(金公允) 사이의 다섯 아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유교적 가풍이 엄한 안동 김씨로서 논 15마지기와 밭 1800평을 지닌 중농이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 뒤에는 도내에서도 제일 높은 예봉산이 좌우로 작은 연봉들을 거느리고 우뚝 솟아있으며, 앞으로는 푸른 한강이 흐르는 산자수명한 고장이다.
김용기는 세 살 때 심하게 앓아 아버지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때 기독교 전도사가 찾아와 작은 책자를 주었는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한복음 3장 16절) 한학자인 아버지는 이 말씀을 ‘순천자흥 역천자망(順天者興 逆天者亡·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흥하고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내가 철들 무렵, 아버지가 어린 나에게 때때로 들려주신 말씀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이 일 않고 앉아서 먹는 일이며, 땀을 흘려서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떳떳한 일이다’라고.”(‘가나안으로 가는 길’ 김용기)
1915년 마을 서당에서 명심보감, 통감, 소학 등을 배웠다. 1919년 마을의 3·1운동을 아버지가 주도하여 수백 명의 행렬을 이끄는 모습을 일가는 목격했다. 그후 그는 여운형이 설립한 광동학교에 입학하여 성경, 지리, 역사 등을 배운다. 뛰어난 성적과 통솔력으로 반장에 선출되었고 여운형의 독립정신에 많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1926년 김봉희와 결혼하며, 그해 8월에는 일제와 싸우겠다는 생각으로 마적단에 들어가기 위해 만주로 간다. 그곳에서 봉천의 서탑교회 이성락 목사를 만나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현실적으로 가당치 않다는 설득에 두 달 만에 귀향했다. 1934년 ‘너는 꼭 농사꾼이 돼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게 된다.
일가는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동네에서 제일 농사를 잘 짓는 일꾼’이라는 칭호를 듣게 된다. 그의 근면과 기술을 동네 선배 농사꾼들이 따르게 되었으며 마침내 어린 나이이면서도 동네 두레패에서 부령좌(副領座)를 맡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무렵 외지에 있던 그의 형이 돌아와 집을 맡게 되자 일가는 무일푼으로 분가하게 된다.
그는 이상촌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철도공사판에 가서 장사를 했다. 200원을 이잣돈으로 빌려 잡화상과 이발소를 겸한 가게를 차렸다. 철도공사가 끝날 때까지 만 2년 동안 장사를 했다. 5000원이란 목표액 중 3500원이 마련되었으니, 그의 꿈은 이미 반 이상 실현된 셈이었다. 그러나 단 1석이 부족해 천석꾼이 되지 못한 사람의 한과 비슷한 심리 때문에 그는 이상촌 건설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돈벌이가 과히 어렵지 않다는 자만심으로 그까짓 1500원쯤은 곧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확천금의 욕심까지 생겨 금광에 손을 대 다시 무일푼의 신세로 전락한다.
“희망에 부푼 나는 매일 광부들과 똑같이 일어나 손에 못이 박이도록 산을 파들어갔다. 조금도 고생스러운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1년을 넘게 팠지만 합금률이 높은 광맥은 어느 줄기로 뻗어 들어갔는지 나타나지 않았고… 그런 식으로 반년 동안이나 더 산을 판 후에야 나는 비로소 당초에 들고 왔던 표품석이 다른 광산에서 채굴된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물론 장사해서 벌어들인 3500원이 다 날아가 버리고 난 후였다.”(‘가나안으로 가는 길’)
장사 기간 2년까지 합하여 3년 반이 완전히 헛수고로 끝난 셈이었다. 부친의 유언이 다시 떠올라 일생을 농사에 종사할 것을 거듭 다짐한다.
“유휴지 얼마라도 구하기 위해 당시 이웃에 돈놀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 돈 400원만 꾸어줄 것을 요청하자, 그는 빤히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대체 담보물 없는 당신을 어떻게 믿겠소?’ 그 말에 일가는 이렇게 말했다. ‘담보물이 먼저요? 사람이 먼저요? 나의 이 젊은 몸뚱이 이상의 담보물이 어디에 있단 말이오? 내가 사업에 실패한다면 당신은 단지 나에게 빌린 돈만 떼일 뿐이지만, 나는 그대로 망하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자 주인은 한참 바라보다가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소. 당신이 말한 돈을 줄 테니 아무쪼록 성공하도록 하시오’ 하고는 400원을 내주었다.”(‘가나안으로 가는 길’)
일가는 90원으로 마을 너머의 산 3000평을 샀다. 나머지 돈을 과목과 간작(間作)용 종자, 비료대, 식량대 등으로 남기고 우선 부인과 함께 개간에 착수한다.
“개간은 노동 중에도 중노동에 속하는 일인데 아내는 그 노동을 감당하기가 몹시 힘에 겨워 곁에서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그러니 자연 나의 분담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일의 진전은 더뎠다. 게다가 또 주변 사람들의 비난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그것은 우리들 특히 아내의 사기에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똑똑한 사람이 오죽 할 일이 없어 황무지를 파고 있는냐?’는 것이었고, 5촌 당숙은 ‘너 같은 놈이 우리 집안에 태어난 것이 유감’이라고 힐난했다. 처가에서도 장인어른이 당신의 딸을 나 같은 사람한테 시집보낸 것이 못내 원통하다고 했다.…남들이야 뭐라고 하든 우리 부부는 내일에 실현할 큰 꿈을 안고 오늘의 괴로움을 달래며 꾸준히 일을 해나갔다.… 우리는 그 일에 차츰 익숙해지고 틀이 잡혀가게 되어 남모르는 기쁨까지 누리게 되었다.”(‘가나안으로 가는 길’)
일가는 개간한 자리에 차례로 과목을 심고 고구마를 간작한다. 고구마는 개간 첫해부터 대풍이 들어 무려 40가마니를 생산했다. 이는 이웃 마을을 통틀어서도 큰 수확이어서 그를 비난하고 비웃던 모든 사람들까지도 선망하게 되었다. 황무지였던 그 산야는 3년 만에 비옥한 옥토로 변했으며 그 값도 10배가 넘는 1200원이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이 땅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800원으로 마을 앞의 산야 4100평을 우선 사서 개간에 착수한다. 형제들과 그를 비난하던 마을 사람들이 이제는 그를 칭찬하게 되었다. 그는 이들을 동지로 끌어모았다. 희망자가 운집했으나 마을의 이상적인 호구수를 10가호로 정하고 그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필요없는 외관의 사치는 금지시켰다. 창(窓)을 많이 내어 채광과 환기가 잘 되도록 하고, 울타리는 담장 대신 집 둘레에 무궁화나무를 비롯한 여러 꽃나무를 심게 하였다.
그리고 집집마다 산양을 한 마리 이상씩 기르게 하여 그 젖을 짜 먹게 함으로써 건강과 영양을 도모하였다. 또 닭을 비롯한 토끼, 돼지 등 가축을 기르게 하여 소득을 높이도록 하였다. 생산성이 낮은 논농사를 피하고 선진국의 농사 방식에 따라 밭농사와 과수 재배 위주로 하였다.
과목들 사이에 고구마를 간작했다. 고구마는 토박한 땅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구마의 장기저장이 곤란하여 1년 내내 두고 식량으로 삼을 수가 없었다. 일가는 3년간 무려 120가마니의 고구마를 썩힌 뒤에야 드디어 만 1년 동안의 지하저장법에 성공했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연구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1년간 저장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먹는 것도 쌀 주식에서 잡곡·고구마 등으로 대치했으며, 옷도 일절 사치를 금하고 생활과 활동에 편리한 의복으로 모두 개조해 나갔다. 농기구도 가래·쟁기 등 자주 사용하지 않는 농구는 부락 공동으로 돌려가며 쓰고, 부락 공동자금을 만들어 부락공공의 일에 사용하고, 부락민이 저축한 돈을 무이자로 필요할 때 5~10년의 연부상환제로 대부해 주었다. ‘봉안 이상촌’은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40명이던 주민이 5년 후에는 64명이 되었고, 밭 6500평이 1만3700평으로, 과수원 4000평이 1만2000평으로 각각 늘어났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 선풍은 봉안마을에도 휘몰아쳤다.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해 맏아들이 퇴학을 당하고, 일가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거부로 경찰서에 불려가 발길로 차이고 얻어맞곤 하였다. 마침내 일인 고등계 주임까지 나서 한바탕 족친 후, 다른 사람은 다 하는데 유독 그만이 하지 않는 이유를 대라는 것이었다.
“‘묵념하면서 속으로 천황폐하를 욕하는지 어쩌는지를 누가 알겠소? 사람의 마음속을 측정하는 기계가 있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천황폐하도 욕을 먹지 않고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니 서로 좋은 것 아니오?’라는 아버지 말씀에 형사는 ‘네 말이 옳다’면서 ‘그런 따위로 하는 국민의례라면 당연히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수긍했다는 것이지요.”(셋째 아들 평일씨의 말)
1943년 일가는 미치광이로 가장한 독립투사들을 비롯한 학병 탈주자들을 봉안 이상촌에 숨어 살게 한다. 여운형도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광복을 맞는다. 일가도 광복 후 ‘이상촌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상경한다. 이해 12월 28일에는 신탁통치 반대선언문 수천 장을 살포한 혐의로 체포된다.
군정재판에서 5년형을 받았으나 홍순엽 등 변호인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 당시 선언문 요지는 ‘남쪽의 미군도, 북쪽의 소련군도 물러가라’였으며, ‘미군도 물러가라’는 것이 말썽난 대목이었다. 이듬해 일가는 고양군 구기리에 삼각산 농장을 개척한다. 이 무렵 농장으로 김성수, 조병옥, 유영환, 함석헌, 이형필 등이 찾아왔다.
1952년 5월 일가는 용인군 원삼면 사암리에 6만여평의 산판을 구입하여 ‘에덴향’ 건설에 착수한다. 그는 “오랜 개척 생활 중 이때처럼 고생한 시절도 없었다”고 술회했다. “맥주 깡통으로 식기를 만들어 그것을 1호, 2호, 3호의 등급을 매긴 후 노동의 경중에 따라 가족들이 먹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54년 11월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현 하남시)에 황무지 1만여평을 구입하여 ‘가나안농장’ 건설에 착수한다. 이해 겨울에는 세 아들과 함께 4인조 악단을 만들어 농촌계몽 강연을 한다. 의식주 생활 개선과 의식의 간소화, 미신 타파 등 생활혁명에 관한 것이었다. 5년 후 딸기·토마토·양배추 등의 채소와 고구마·감자 등을 재배하면서, 양계 양봉도 하는 다각농을 시도하여 전천후 농장을 만들었다. 그 영농 방법을 배우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울러 ‘가나안 달걀’과 ‘가나안 꿀’이 시중에서 호평을 받았다.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그는 재건국민운동본부 경기도 지부의 위촉으로 3000여명을 교육한다. 이듬해 2월 1일 가나안농군학교를 개교, 32명의 1회 졸업생을 냈다. 2월 9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위원 전원과 장관 전원을 대동하고 가나안농장과 학교를 둘러보고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이 가정, 이 농장은 우리보다 앞서 혁명을 하였습니다. 우리 국민이 모두 이렇게 한다면 우리나라의 후진성이 급속히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1966년 일가는 막사이사이상(사회공익 부문)을 수상하는 아시아 최초의 농민이 되었다. 이때 국내외 언론은 이 같은 대상이 한 농민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했고 이후 일가는 군부대, 정부 부처, 기업체, 대학 등의 초청으로 많은 강연을 하게 된다. 1973년에는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 용암리의 치악산 중턱(해발 500미터)을 개간한다. 이곳에 제2가나안농군학교도 개교한다.
일가는 1988년 8월 1일 하남시 풍산동 산52의2 제1가나안농군학교에서 별세,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 용암리 선영에 안장된다. 일가는 김봉희와 사이에 5남매를 낳았다. 맏아들 종일(82·장로교신학대 졸업)씨는 가나안복지회 이사장이며 윤숙종(79·장로교신학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둘째 아들 범일(75·장로교신학대 졸업)씨는 제2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이며, 홍미혜(67·상지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셋째 아들 평일(68·한양대 공학대학원 졸업·경영학)씨는 이화섭씨와 결혼했다. 이씨는 가나안청소년교육원장이며 외조모가 이화여대 재단이사장을 역임한 김영희씨다. 이씨는 가나안농군학교에 입교하여 일가 집안과 인연을 맺었으며, 일가의 맏딸 활란(72·피어선대 졸업)씨와 결혼한 임연철(75·한양대 경영학 박사)씨 역시 농군학교 출신으로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둘째 딸 찬란(61·이화여대 기독교교육과 졸)씨는 서울여대 교수로, 김기석(62·서울사대 교수·교육학)씨와 결혼했다. 평일씨의 아들 천명(39)씨가 제1가나안 농군학교 기획실장을 맡고 있어 일가의 맥을 잇는 3세대다.
내가 본 일가 김상원 호서학원이사장·전 대법관 나는 1963년 서울지법판사 때 가나안농장으로 가서 일가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그분은 매사 솔선수범하는 농촌지도자여서 나는 교훈도 많이 얻고 깊이 추앙하게 되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하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독실한 신앙인인 데다, 창씨개명, 동방요배도 물리친 꿋꿋한 애국자셨다. 또 빈곤한 우리 농촌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켜 잘사는 농촌으로 가꾸신 분이다. 쓸모없는 황무지를 개간해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로 변모시킨 개척자로 길이 기억될 인물이다. 그분이 1962년에 하남에 세운 제1가나안농군학교와 1973년에 원주에 세운 제2가나안농군학교는 그동안 군·공무원·직장인 심지어 죄수들까지 70만명이나 받아들여 유능한 농촌지도자, 사회지도자로 키워낸 산실이다. 또한 공산권·이슬람권 국가 등 11곳에 해외 가나안농군학교가 진출해 ‘한류 농업’의 본거지로서도 주목받고 있다. 일가의 이런 사업은 그 자체가 희생이 따르고 정신적·육체적으로 어려운 일인데도 자녀들이 유지를 받들어서 계승하는 지극한 효심에 나는 늘 감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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