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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기 장로

Joyfule 2018. 9. 7. 09:56

 

김용기 장로

 

김용기|한국인물연구  

 김용기 장로는 생각보다 동키호테 같은 면도 있고, 굉장히 한국사회와 국가에 큰 기여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농장식의 공동체를 우리 파이어니어가 시작할 수 있을까 새생각해 보게 된다. 김용기 장로의 삶을 통해 적합한 공동체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김용기는 1966년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당시 한국은 일인당 국민소득 65불이었다. 삼베옷에 고무신을 신고 필리핀에 가서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다들 예복을 입으라고 권했지만 옹고집의 모습이 그런데서도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이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했다. 사회나 정치 참여도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 아닐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까?

김용기는 부모가 예수를 잘 믿는 독실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벼농사를 지으면서 이웃의 논이 말랐으면 그 논에도 물을 대주는 그런 분이었다. 그렇게 이웃을 위하는 마음이 남다른 아버지였다. 어머니도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쌀을 즐겨 나눠주는 분이었다. 김용기는 그런 부모 밑에서 컸다.

그의 부모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김용기가 죽을 병이 들었다가 나았기 때문이다. 안동 김씨 문중의 아들이라고 그토록 위하던 아들이 죽게 되니, 굿도 하고 소경까지 불러서 경을 읽기도 하고 의사란 의사는 다 보고 갔는데 가망이 없었다. 그 아들이 예수를 믿고 살아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예수를 믿은 후 절대 제사를 안 지내는 바람에 안동 김씨 문중에서 대단한 핍박을 받았다.

김용기는 어려서부터 지도력이 있었다. 꿈도 컸다. 배운대로 실천하는 아이였다. 소학교는 안 다녔지만 한학을 했고, 중학교는 양주에 여운형 선생이 세운 광동 중학교에 다녔다. 여기서 그는 신학문을 했다. 반장을 하면서 아이들을 많이 때려서 어머니가 김용기를 회초리로 때리면서 훈계를 한 일이 있었다. 그 바람에 폭군이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된다. 점심 안 싸 온 아이가 있으면 나눠 먹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다쳤으면 업어서 데려다 주고, 짚신이 떨어졌으면 자기 짚신을 신고 가게 하니 아이들도 이 모습에 감동을 받아 각자 자기 일은 자기가 척척하여 문제가 없어졌다.

중학교를 다닐 때 김용기는 선생님을 통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는 넓은 세계에 미처 눈을 뜨기 못하고 힘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특히 만주에서 온 조선생이라는 분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는다. 또 그는 학교 다닐 때 뚝심 좋고, 통솔력이 대단하다고 선생님들에게 평가를 받는다. 또 조국의 현실에 대해 걱정하며 우리나라 역사책을 열심히 읽었다. 특히 열하일기에서 고구려와 발해가 만주를 지배했었다는 내용을 읽고 가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결국 가출하여 만주로 간다. 그러면서 그는 20세기의 동명성왕, 20세기의 대조영을 꿈꾸었다.

만주에 가서는 마적단원이 되어 만주를 회복하고 일본군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말하며 다니다 헛된 용기에 부끄러워진 용기는 다시 고향을 찾았다. 돌아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뜻을 찾기 위해 강화도 마니산에 들어가 40일 기도를 한다. 강화도 마니산은 옛날 세종대왕이 사흘동안 기도한 곳이다. 세종대왕이 마니산을 흔들었듯이 자기도 힘을 주셔서 산을 흔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때가 19세였다. 그후 21살에 김봉희와 결혼했고, 그후 당분간 집안의 농사를 도왔다. 아버지가 소천하면서 농사꾼이 되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는 가장 부지런한 농사꾼이요 한가할 때는 꼭 책을 보며 당시 농촌 현실과 농사법을 연구했다. 못 배운 사람만 농사를 짓는다는 생각을 깨고자 했다.

심훈 선생의 흙사랑에 감동되었고, 그는 에덴동산 같은 이상촌을 만들고자 했다. 이상촌 건설을 위해 경작지와 열집 정도가 살 수 있는 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5천원이 최소한 필요했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번다고 하다가 금광 얘기에 속아 사기를 당한다. 전 재산을 날렸다. 웬만한 땅문서 값은 할 것이라며 자기 젊은 몸뚱이를 담보로 돈을 빌렸다. 배짱 좋은 젊은이라는 생각에 돈놀이 하는 사람의 마음이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돈으로 못쓰는 땅을 개간하여 고구마 재배를 성공시킨다. 결국 빚을 갚고 농촌운동을 시작한다.

그는 봉안 이상촌을 만들어 고구마를 재배한다. 고구마 저장법을 연구하여 일본인 다케다도 실패한 일에 성공한다. 1년이 지나도 싱싱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고구마 박사라 할만하다. 그의 개척정신으로 황무지였던 야산은 넓고 훌륭한 경작지로 탈바꿈했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한국의 덴마크로 불렀다. 농촌운동에 뜻을 둔 사람이 둘러보러 왔다가 다 혀를 내두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다 김용기가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고난을 당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김용기의 자식들이 창씨 개명을 하지 않는다고 학교에 나오지 못 하게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해 돈을 대었다. 항일 운동가 여운형 선생을 모시고 있던 적도 있었다. 해방후 그는 미군정을 반대하다 5년 형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여운형, 홍순엽 등의 탄원으로 갇힌지 13일만에 풀려났다.

그후 그는 봉안 이상촌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이미 안정되었으므로) 경기도 고양군 삼각산에서 다시 개척을 시작했다. 세상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메이플라워호에 탄 개척자의 마음으로 그는 삼각산을 새로 개척했다. 많은 사람들이 김용기의 개척 활동을 직접 보기 위해 찾아들면서 삼각산 농장은 세상에 알려졌고 각종 회의와 강연장으로 이용되었다. 여기서 김용기 장로의 농장개척방법을 세상에 알렸고, 전국 기독교 청년회 전국대회를 여기서 개최했다. 그는 또한 강연활동을 통하여 농업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넓은 땅을 개척할 때 사람들은 돈이 많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개척사업이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투지와 끈질긴 인내심이 없으면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계획대로 잘 했다 하더라도 4차 연도까지는 큰 결과를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개척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삼각산 농장이 안정되자 다시 새로운 황무지를 찾아 나섰다. 그가 할 일은 버려진 땅을 일구어 농토 한 평이라도 넓히는 일이다. 그는 자기 땅도 아닌 곳에 씨를 뿌리고 다녀서 제 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제 정신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인지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씨를 뿌려 놓으면 누가 거둬 먹든 식량이 되지 않겠나 생각했던 것이다.

6.25가 터지자 봉안 이상촌에 피난을 내려왔다. 그러나 애써 일궈 놓은 이상촌이 폐허가 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1952년 경기도 용인군의 6만평의 땅에 새로 에덴향을 개척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노동이 끝났다. 농장을 일군 후 그는 중학교 과정의 복음 중학교와 성인 농민교육을 위한 용인 고등 농민 학원을 세웠다. "우리는 흙만 파는 농사꾼이 아닙니다. 온 겨레가 요구하는 사람이 되고, 농업으로 나라를 지키는 농군임을 잊지 맙시다!" "음식 한끼 먹으면서 4시간 일하자!"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 영농법 공부 못지 않게 정신 개혁이 중요하다. 그는 노동과 교육에 헌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둘째 아들 김범일이 가출을 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김용기는 말했다. "범일아, 피땀 없이 열리는 열매는 없단다. 모든 걸 잊고, 다시 시작하자꾸나." 그러나 에덴향도 철저한 집단체제와 협업체제가 잘 유지가 되지 않아 다툼이 일어났다.

그는 주저없이 이미 안정되 에덴향을 넘기고 경기도 광주에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하도 황폐하다 해서 '황산', 즉 거친 땅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그는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아무리 거친 땅이라도 농사법만 잘 맞는다면 열매를 맺는다'고 믿었다. 이 곳이 지금도 이름이 알려진 가나안 농장이다. 그는 이제 개간사업 전문가였다.

그는 겨울에는 악단을 만들어 농촌을 돌며 강연활동을 했다. 내용은 다각농법교육, 농촌을 지키자. 허례허식과 미신을 타파하자.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생활을 꾸려가자. 실생활에 맞게 의식주를 개선하자. 간편하고 행복한 농촌생활이 되게 하자. 이런 주장을 했다. 그래서 회사 다니다 사표 쓰고 농사를 짓겠다는 사람이 나왔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식량으로 고구마만을 먹으며 살 때가 많았다. 바깥 나들이 할 때도 땀에 절은 노동복에 고무신, 거친 손... 자식들은 창피하고 고통스러워 했다. 그의 청교도적 생활규범은 대단했다. 땅은 한 치라도 놀리지 말고 고구마를 심도록 했다. 고구마로는 술, 떡, 잼, 엿 등을 만들 수 있고, 영양가도 좋다. 그런데 비타민A가 없으니 사과나무를 함께 재배해 영양을 보충하게 했다.

김용기의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은 일본에서 농업 경영과 과수 재배법, 축산기술 등을 배워와 가나안 농장을 살찌게 가꾸어 나갔다. 앙골라 토끼를 사육했는데 토종 토끼가 앙골라 새끼를 자꾸 물어 죽여서 고민을 한 일이 있었다. 재래종 토끼가 앙고라 새끼가 제 새끼가 아닌 것을 냄새로 알아 내기 때문이다. 앙골라 토끼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험 사육하는 종이라 성공을 해야 했다. 결국 재래종 토끼에게 포마드 기름을 발라 문제를 해결했다. 결국 한국 최초로 앙골라 토끼 보급에 성공한 것이다.

이래 저래 가나안꿀, 가나안 달걀, 빵과 딸기잼 등 가나안 산물은 최상품이 되었다. 가나안 농장은 집, 음식, 뭐든 새로웠다. 그러다 보니 버스가 들어오지도 않던 곳에 버스가 들어오고 정류장 이름도 가나안이 되었다. 그게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 그러나 이곳에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우게 된다. 철저히 가르쳐서 농촌 지도자를 키우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다. 그는 농민은 가난을 몰아내는 국민군대라고 말했다. 새로운 정신으로 무장하여 조국과 농촌의 앞길을 밝히는 선봉이 됩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강의실은 그의 집, 교사는 그의 자녀들이었으며, 그의 가족생활이 곧 산 교재였다.

5.16혁명 후 박정희 대통령이 가나안 농장을 방문해서 전국 읍·면장을 모두 견학시키고 공무원들도 여기서 교육하라고 지시했다. 새마을 운동도 김용기 장로에게 배워 온 것이라고 한다. 마을 길 보수니, 지붕 개량이니 하지만 겉모습만 뜯어 고친다고 살기 좋은 농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참 새마을 운동은 국민 스스로가 참여하는 자발적인 운동이어야 한다. 정부에서 강요한다고 되는 사업은 아니다. 더구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새마을 운동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1988년 8월 80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직 개척자의 삶을 살았기데 그의 삶을 생각해 보고 싶다.

 

‘가나안’의 이상을 실현코자 헌신한 일가(一家) 김용기 장로

 

김용기 장로 (1909.9.5-1988.8.1) / 1930 광동학교 졸업

1962 제1가나안농군학교설립 (경기 광주) / 1966 필리핀 막사이사이상 (사회공익부문)

1973 제2가나안농군학교설립(강원 원주 신림) / 1982 가나안농군사관학교 설립

 

 

 

 

한국장로신문 6회 연재 (2009.11.21 - 12.26) : 둘째아들 김평일 장로 씀 <가나안농군학교 교장>

http://www.jangro.kr/Jmissions/right.php?page=10

 

제1가나안농군학교(하남) http://www.kor-canaan.or.kr

 

제2가나안농군학교(원주) http://www.wc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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