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주위를 보면 부자집 아들이 참 많았다. 같은 반의 앞자리에는 두산그룹회장이자 전경련 회장인 박용만이 앉아 있었다. 그 외에도 쌍용그룹, 삼양사그룹, 녹십자 그룹, 환화 그룹등 부유한 집 아들들이 많았다. 부유한 집 아이들은 대체로 성품이 온유하고 착했다. 부모의 교육도 철저한 것 같았다.
그시절 박정희대통령과 사범학교 동기이고 정계와 재계를 주름잡고 있던 분의 외아들이 같은 반이었다. 부자집 아들 답지 않게 검정교복의 색이 바래고 옷 솔기가 헤진 옷을 입고 양철도시락에 싸온 점심도 소박했다. 남의 눈에 띄게 하지 않고 더욱 낮게 처신하도록 교육을 받은 것 같았다.
물론 일부 예외도 있었다. 국민 대부분 가난하던 그 시절 고교생이 빨간 스포츠카에 예쁜 여학생을 태우고 서울 거리를 폭주하기도 했다. 그런데 부자집 아들에게 기생충처럼 따라붙는 아이들도 있었다. 겉으로는 친구지만 실제로는 부하였다. 그 인연을 발판으로 대기업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기서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사장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런 성공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오십대 초쯤일 때였다. 중고등학교 동창인 한 친구가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왔다. 그가 기운없는 얼굴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김 회장 그 친구 말이야, 중학교 때부터 평생 우리들 몇 명이 그렇게 모시면서 도와줬는데도 너무 인색해.”
그가 안타까웠다. 부자는 사람보다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게 아니었을까. 그들이 친구였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부자 친구를 평생 따라다니던 또 다른 친구가 나의 사무실을 찾아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강 회장 걔와 내가 뭐가 달라? 그런데 그 친구는 평생 놀고 먹어도 돈이 썩어 넘치도록 있는데 왜 나는 그 친구의 쫄병을 하다가 쫒겨나서 월세방에서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느냔 말이야?”
그에게는 섭섭함만 남아 있었다. 그는 중학시절부터 재벌가 아들의 주먹을 쓰는 부하 역할을 하는 바람에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친구인 회장심복이 되어 룸쌀롱을 드나들고 여자관계에 문란하다가 공금을 건드려 파면당했다. 그 자신의 책임이 더 큰 것 같았다.
친구가 회장을 하는 재벌그룹에서 임원을 한 친구들이 나중에 하는 말을 들어보면 모두 친구인 재벌 회장이 얼음같이 차다고 얘기했다. 그들은 과연 친구였을까? 변호사를 하다 보면 진짜 친구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
한 조폭 두목이 감옥에 갇혔다. 그렇게 질이 좋은 친구가 아니었다. 그의 조직원은 물론 그와 관계를 가졌던 모든 사람들이 면회를 가지 않았다. 그를 접촉한 사람은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일하게 한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조폭두목을 도왔다. 그는 건달출신이 아니었다.
조폭두목과 어려서 가난한 동네에서 한 시절을 같이 살았던 인연일 뿐이었다.
한사람은 조폭두목이 됐고 다른 한 사람은 시인이 되어 강원도 산 속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혼자 조폭두목을 돕는 그 시인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이 모두 욕하고 등을 돌려도 나는 그 친구를 도울거예요. 남들은 그 친구가 살인을 하고 조폭 두목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돌을 던져도 나는 친구라고 생각해요. 함께 욕을 먹고 돌을 맞아 줄 겁니다.”
가난한 시인이 갑자기 눈이 안 보여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 조폭 두목이 남몰래 돈을 보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살인을 하고 감옥에 간 영화감독이 있었다. 죄를 진 순간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다. 유일하게 감옥에 있는 그를 이해하고 돕는 한 친구가 있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물어보았다. 감옥에 간 영화감독의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아들의 친구인 그에게 도시락도 싸주고 부모같이 잘해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원히 아들의 친구가 되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었다고 얘기했다. 죽은 어머니의 공덕이 깊었다.
나의 친구가 아닌 사람은 내가 그 뒤를 늘 쫓아다녀도 그는 마침내 나를 떠나고 만다.
진짜 친구는 내가 붙들지 않고 평소에 떨어져 있어도 필요할 때면 다가온다.
자주 만나서도 아니고 이유도 다양하다. 그런 것을 보면 친구란 미리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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