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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 장영희

Joyfule 2015. 8. 27. 11:03

남태평양 타이티 

 

꿈 - 장영희

 

나이가 들어 슬픈 일 중 하나가 이제는 사람들이 내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꿈을 가지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꿈이 있어도 이룰 시간이 별로 없다고 여기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갖추었으니 더 이상 꿈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이유야 분명치 않지만 아무도 내게 꿈을 물어 봐 주는 이가 없다.

 그렇지만 나에게도 꿈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잠적,태평양 어딘가에 있는 아름다운 무인도에서

<서강학보>에 ‘영문과 장영희 교수 행방불명, 2000년 2학기 세 강좌 폐강’이라는 기사가 난 것을 회심의 미소를 머금으며 읽는 꿈, 갑자기 미친 듯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어 ‘앉으나 서나 그대 생각‘ 하면서 가슴을 에는 그리움을
배우고 싶은 꿈(간혹 학생들이 내게 물어 보는 일이 있어도 “선생님은 왜 결혼을 안 하셨나요?” “예전에 사랑했었던 남자가 있나요?” 라고 과거 시제를 쓰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나요?” 라고 물어 보는 예는 거의 없다.) 또는 언젠가 코미디 프로에서 봤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벼락을 맞아 내가 천재가 되어 이제껏 읽은 수많은 명작들에 버
금가는 작품들을 쓰는 꿈, 다시 대학에 들어가 우주학을 공부해 우주 비행사가 되어 은하계를 여행하고 싶은 꿈 등 무수히 많은 꿈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어릴 때는 꿈이 별로 없거나, 있더라도 단순했다. 보통 꿈을 말할 땐 ‘무엇이 되고 싶다’가 많았다. 초등학교 때의 꿈은 창경원에 한번 가보는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서울에는 마땅하게 갈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1년에 한 번 학교에서 가는 소풍의 행선지는 언제나 창경원이었다. 소풍에 따라갈 수 없었던 나는 친구들이 다녀와서 묘사하는 ‘창경원’이라는 세계가 무척 궁금했고, 내 마음 속의 창경원은 동화 속에 나오는 그 어느 궁전보다 훨씬 더 신비로웠다. 지금도 다락 어딘가에 있을, 내가 어렸을 때 그린 ‘꿈속에서 본 창경원’은 미국의 디즈니랜드보다 더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중학교 때의 꿈은 영화관에 가 보는 것이었고, 고등학교 때의 꿈은 친구들이 가는 ‘학원’ 이라는 한 번 가보는 것, 그리고 대학교 때의 꿈은 다방에 가 보는 것이었다. (당시의 다방은 대부분 아주 좁은 층계를 올라가야 하는 2층이나 3층에 있었다) 자라면서 나의 ‘꿈’의 행선지는 이렇게 변했다. 그런데 막상 ‘꿈’이라는 단어를 그런 행선지에 갖다 붙이는 것은 억지일지도 모른다. 그곳에 가 보고 싶은 내 욕망이 아무리 컸어도 영화관, 학원, 다방 같은 곳과 ‘꿈’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꿈’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 그리고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변함없이 가고 싶었던 곳, 그곳은 바다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양쪽 다리를 수술하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그때 침대 발치의 입원실 벽에 걸려 있던 달력에는 바다 그림이 있었다. 우리나라였는지 외국이었는지 모르지만 옅은 안개가 낀 듯 보랏빛이 감도는 하늘에 부드러운 연녹색 바다, 멀리 보이는 등대 하나, 작은 점처럼 보이는 배들, 바다 가장자리에 두른 흰색 레이스 같은 파도....

 지금도 눈에 선한 그 바다 사진은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의 사진기에 영원히찍혀 있다. 한 달 정도 양 다리에 깁스를 한 채 꼼짝 못하고 누워서 바라보는 그 바다는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말 그대로 꿈의 세계였다.  다리의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맞고 어설픈 잠을 자다가 아침에 눈을 뜨면 , 그 바다가 엄마 얼굴보다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내가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왔다는 증거였고, 이 세상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본보기였으며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꼭 그곳에 가고 싶다는 꿈과 의지의 표징이었다. 그 후에 많은 문학 작품들 - 어렸을 때 읽은 [보물섬] [해저 이만리] 에서부터 대학교 때 읽은 [노인과 바다] [백경]에 이르기까지 - 속에서도 바다를 만났다. 책에서 본 바다는
달력 사진 속의 바다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가장’ 평화로운 곳일 뿐만 아니라 내가 상상조차 할 수없는 ‘가장’ 거대한 곳, 그러면서도 ‘가장’ 무서운 곳, 무조건 모든 형용사의 ‘최상급’을 적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내가 가고 싶지만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어쩌면 못 가는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로 꿈속에서만 간직해야 하는 신비의 세계였다.  그 신비의 세계. 내가 읽은 소설의 작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바다를 ‘도전과 시험을통해 다시 태어 나는 곳’의 상징으로 그리고 있었다. 허먼 멜빌이 쓴 <백경>의 제일 첫 문단에서 화자 이슈마엘은 자기가 바다로  가는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자신이 뭍에서 느끼는 자살 충동을 치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내 입 주위에 우울한 빛이 떠돌 때, 관을 쌓아두는 창고 앞에서 저절로 발길이 멈춰질 때, 내 영혼에 축축하게 가랑비 오는 11월이 올 때 , 그런  때면 나는 빨리 바다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슈마엘은 포경선 피쿼드 호를 타고 바다로 나감으로써 육지에서 상처받았던 그의 ‘11월 영혼‘ 은 완전히 치유된다. 조셉 콘래드의 <은밀한 동거자>에서는 경험 없는 풋내기 선장이 자기 배에 몰래 숨어 들어온 탈주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자신만만하고 용감한 선장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가하면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캔버스에 옅은 녹색과 푸른색을 섞어 바다를 그리던 릴리가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고 붓을 놓으며 ‘삶의  비전’을찾는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스티븐 디달러스는 바닷가에서 하늘색 스커트를 입은 소녀를 보고 그에게서 흰색 비둘기의 모습을 떠올리며 예술가로서의 소명을 깨닫는다.

 암울한 11월의 영혼을 치유하는 바다, 용감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바다, 삶의 비전을 주는 바다, 길 잃은 자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는 바다, 그런 바다를 내가 처음 본 것은 유학차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난생 처음 집을 떠나는 충격과 슬픔 속에서도 나는 뉴욕행 비행기가 육지를 벗어나자마자 열심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거대한 뭉게구름과 안개 사이로 보이는 감질나게 보이는 그 바다는 아무런 형태도 색깔도 없었다. 뉴욕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오빠가 제일 가고 싶은 곳을 물었을 때 나는 자유의 여신상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아닌 ‘바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오빠가 날 데리고 간 바다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모른다. 뉴욕에서 한두 시간 가량 차를 몰고 롱 아일랜드 쪽으로 가자 , 하얀 모래사장 건너편으로 바다가 보였다. 하지만 실망했다. 그 바다는 내가 꿈꾸어 오던 상상속의 바다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뜨겁게 빛나는 태양에 반사되어 새파란 색깔을 띠고 있었고 눈부신 백사장 위로는 사람 키만한 시커먼 해초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내 꿈속에 있는 바다가 신비의 옷을 벗어버린 듯, 진청색, 백색, 검은 색으로 선명하게 선이 그어진 그 바다는 너무 적나라하고 너무 강렬하게 빛났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앙드레 지드의<전원 교향악>에 나오는 눈먼 소녀를 생각했다. 앞을 못 볼 때는  아름다운 이 세상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눈을 떠 이 세상을 본 후 . 눈 뜨기 전을 그리워한다는 ....

 그러고나서 20년이 흘렀고, 나는 다시 바다를 보았다. 일 년에 한 두 번씩 미국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것 외에는 롱 아일랜드 바다 이후 한 번도 정식으로 바다에 가 본적이 없었다. 가끔 바다가 나오는 소설을 가르칠 때나 영화에 나오는 바다를 볼 때면 언뜻 언뜻 어린 시절 내 기억의 사진 속에 바닥 떠오르고, 그런 바다를 한 번 찾아 나서고픈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꿈도 오래 가지고 있으면 타성이 생기는지, “꼭 이루고 싶다”는 간절함보다  “이제껏 못 이룬 꿈이 지금이라고 이루어지겠는가”하고 포기 내지는 ‘안 이루어져도 그만이지’하는 오기까지 곁들여 . 그저 바쁜 일상 밑에 깔려 있는 무덤덤한 바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어제 본 동해의  겨울 바다, 그것은 그런 포기도, 오기도 후회하게 만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연녹색 바다, 그 위로 날개를 펴고 앉는 바다새 같은 흰 포말들, 분홍빛 저녁 놀이 번져 가는 수평선 위로 점점이 반짝이는 오징어잡이 배들, 그리고 저 멀리 짧고 가느다란 세로줄 하나, 등대.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 내 꿈의 화랑에 제일 크게  그리고 제일 가운데 자리잡은 바다 풍경 그대로였다. 그것은 스티븐 디달러스가 ‘하나의 세계, 한 줄기 빛 , 한 송이 꽃’의 환영을 보고 새로운 희망을 찾는 바다였고 릴리가 푸른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추상화 중앙에 희고 짧은 선 하나를 긋고는 완벽한 통일과 조화의 비전을 얻는, 바로 그 바다였다.조셉 콘라드의 [로드 짐]에서 현자로 등장하는 스타인은 “꿈에 빠지는 사람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바다는 언제나 크고, 아름답고, 위험하고, 신비하다. 그리고 그것은 꿈의 속성이기도 하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나는 아름답고 위험한 꿈을 꾸고 있다. 꼭 사흘만 아니 꼭 이틀만, 아니 꼭 하루만이라도 학교에 가지 않고,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고, 아무 약속이나 회의도 없고, 읽고 고쳐 줘야할 학생들 페이퍼도 없고, 마감일 다가오는 원고도 없고, 이렇게 그냥 앉아 있을 수 있다면...

 가만히 눈을 감고 어제 본 바다를 떠 올리면서 나도 이슈마엘처럼 자살 충동을 치유하고, 이름  없는 젊은 선장처럼 용감한 사람이 되고, 스티븐 디달러스처럼 남은 인생의 소명을 깨닫고 , 릴리처럼 나의 혼탁한 인생 추상화에 구심점을 찾을 있었으면...

 ‘따르르릉’ 나의 상념을 비웃듯 전화벨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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