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닭 - 김은주
내가 이곳에 있고 싶어 앉은 것이 아니다. 콩밭 논두렁도있고 옆집 빈 공터도 있는데 하필이면 이런 위태로운 곳에 둥지를 틀고 싶었겠는가. 아마 늦은 봄날이지 싶다. 주인장이 살짝 썩어 물러진 내 어미를 거름으로 쓸 요량으로 배롱나무 아래 던지고 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꿈틀거리며 움을 틔운 것이 까닭이라면 까닭이다. 애초에 담장 위는 생각도 없었고, 옆집 플라타너스 아래로 뻗어 갈 참이었다. 담만 살짝 넘으면 너른 곳이 있으니 그곳이 안성맞춤이다 싶었는데 감나무 가지가 길을 막는 바람에 잠시 길을 잃었다.
포도 넝굴도 제법 실 더듬이를 뻗어 담장을 기어오르고 뒷산 대밭에서 뻐꾸기는 바람 따라 얄밉게 울어 쌌더니만 그새 알 까러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대신 함초롬 비 맞은 산나리가 더덕 줄기 새로 그 뭐랄까 기막히게 고고한 자태로 제 발치에 있는 고추 모종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다. 집 뒤 홍두깨산은 무섭도록 조용하고 간간이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 어디 먼 산속에서 늦고사리 올라오는 소리 은밀히 들리기도 한다.
새벽부터 긴 챙 모자를 눌러쓰고 산으로 갔던 주인장이 앞섶 긴 앞치마에 불룩 나물을 채우고 마당에 들어선다. 마당을 나설 때는 부스스하더니 산 기운을 얼마나 먹었는지 발걸음에 물이 올랐다. 해는 벌써 마당 반을 지났고 수련은 그새 열었던 꽃잎을 오므렸다. 잠시 마루로 가 앞치마를 벗어 놓고 수건으로 탁탁 먼지를 털어내고 수돗가로? 온다.
감나무를 피해 마구 기어가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마당에 던져 놓았던 고고갱이 자루로 내 몸을 걷어올려 쇠로 된 담장 위에 걸쳐 놓는다. 감나무 때문에 잠시 길을 잃긴 했지만, 쇠 담장으로 올라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살살 쇠 담장 사이로 기어나가 옆 공터로 자유롭게 뻗어 나갈 작정이었다. 좁은 마당보다는 넓고 환한 그곳이 나는 좋았다. 그런데 예정에도 없던 곳으로 내 몸 반이 척 걸쳐져 버렸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허리를 비틀어 흔들어 봐도 몸은 이미 쇠 담장 사이에 끼여 요지부동이다.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인 줄은 알았지만 이런 불상사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생각 없이 나를 담장으로 걷어올린 주인장이 야속하기 그지없다.
엉거주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담장을 타고 기어가다 우체통 앞에서 몸이 자꾸 근질거린다. 중간 마디 아래 쪽이 근질거리는 걸 보니 아마도 꽃 피울 모양이다. 꽃 지고 난 자리에 며칠 후 신비롭게도 열매가 맺혔다. 참말로 이렇게 위태로운 난간에서 생명을 키울 생각은 없었는데, 처음에는 왕구슬만 해서 대문 쇠기둥과 우체통 사이에 그저 매달려 있었기만 해도 견딜 만했다.
그런데 칠월의 뜨거운 볕과 긴 장마를 지나자 점점 몸이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하듯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냥 매달려 있다가는 땅으로 떨어질 것이 뻔하다. 할 수 없이 덩굴손을 뻗어 우체통과 쇠기둥 사이로 몸을 피신시킨다. 앉은 곳은 위태로워도 양쪽으로 내 몸을 감싸주는 우체통과 쇠기둥이 있어 얼추 견딜 만하다. 더는 몸피가 불어나지 않게 뿌리에서 물 길어 올리는 일을 조금식 자제해야겠다.
살아가는 법을 따로 배운 바 없지만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는 어렴풋이 안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면 죽기 살기로 그곳에 적응해야 새 생명을 잉태할 수 있고 이듬해를 기약할 수 있다. 오로지 비치는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만 맞고 주어진 것 이외에 탐심을 내지 않는 것,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 이것이 저절로 알고 있는 내 삶 전부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라는 말처럼 주체할 수 없이 몸이 자라면 주인장이 짚방석이라도 하나 만들어 주겠거니 내심 기다렸다. 하루가 위태로운 가운데도 괜찮아 괜찮아 하며 나를 달래는 사이 점점 몸이 불어나 엉덩이가 조여오기 시작했다.
참다가 태평양에서 올라온 태풍을 만난 것은 팔월 한밤중이었다. 밤새 얼마나 몰아치던지 안간힘으로 칠흑의 어둠을 긁어모아 견디는데 목숨을 건다는 말이 퍼뜩 떠올랐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담장에 덩굴손을 말아 쥐고 얼마나 매달렸는지 묵은 간장 같은 깜깜한 밤을 보내고 나니 엉덩이에 깊은 생채기가 생겼다. 진물이 나고 다시 아물다 보니 그새 초록은 어디 가고 덥석 가을이 왔다.
주인장은 고두밥 쪄 말리느라 분주히 마당을 오가고 길 건너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이 올랐다. 가을 꽃차를 장만하느라 어찌나 바쁜지 누렇게 변한 내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더니 감나무에 몇 달리지 않은 감을 따러 왔다가 그제야 나를 툭툭 치며 아는 체를 한다. 무심한 주인장 같으니라고, 잠시 어찌 섭섭하던지 꿈쩍 않고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주인장이 엉덩이 아래의 상처를 발견하고는 혼자 중얼거린다.
"대견도 하지. 이리 위태로운 곳에서 비바람을 견디다니."
시난고난한 그간의 세월을 알아주는 이 있어 와락 목이 멘다. 배꼽을 자르고 주인장이 내 몸을 흔든다. 꿈쩍 않고 있다가 못 이기는 척 주인장의 손으로 고단하 몸을 내려놓는다. 땅에서 올랐던 그곳에서 두 계절 만에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주인장은 마당 가운데 따 놓은 조롱박 사이에 나를 눕힌다. 밤톨 같은 조롱박 사이에 나는 조금 삐뚜름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감과 조롱박은 마루로 올리고 나는 방으로 모시고 간다. 주인장이 어머니 사진틀 앞에 동그랗게 똬리 방석을 만들어 그곳에 나를 앉힌다. 못생긴 내 등도 쓰다듬어 주고 찌그러진 엉덩이를 추스러 바로 앉혀준다.
방안은 따습다. 훈훈한 꽃차 향기와 달달한 조청 냄새 가득하다. 비바람을 견딘 대가로 분에 넘치는 호사다. 견딜 만한 일을 견디는 것은 견디는 것이 아니다. 견딜 수 없는 일을 견뎌 냈을 때 비로소 견뎠다 말할 수 있다. 달달하고 훈훈한 차향과 따뜻한 겨울밤을 상으로 받았으니 비바람을 견딘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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