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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뒤에 있는 것 - 이어령

Joyfule 2015. 8. 24. 09:51
시골 노인....

 

 풍경 뒤에 있는 것 - 이어령

 

 

그것은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이었다. 국동서 조금만 들어가면, 한국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황토와 자갈과 그리고 이따금 하얀 질경이 꽃들이 피어 있었다. 붉은 산모퉁이를 끼고 굽이 돌아가는 그 길목은 인적도 없이 그렇게 슬픈 고향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보통 그러한 길을 '마차 길'이라고 부른다. 그때 나는 그 길을 지프로 달리고 있었다.

 

 두 뺨 남짓한 운전대의 유리창 너머로 내다본 나의 조국은, 그리고 그 고향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좁고 쓸쓸하고 가난한 것이었다. 많은 해를 망각의 여백 속에서 그냥 묻어 두었던 풍경들이다.

 

 이지러진 초가집의 지붕, 돌담과 깨어진 비석, 미루나무가 서 있는 냇가, 서낭당, 버려진 무덤들, 그리고 잔디, 아카시아, 말풀, 보리밭, 정직하고 단조한 풍경이다. 거기에는 백로의 날갯짓과도 같고, 웅덩이의 잔물결과도 같고, 서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 같고, 그늘진 골짜기와도 같은 그런 고요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폐허의 고요에 가까운 것이다. 향수만으로는 깊이 이해할 수도 또 설명될 수도 없는 정적함이다. 아름답기보다는 어떤 고통이, 나태한 슬픔이, 졸린 정체(停滯)가 크나큰 상처처럼, 공동(空洞)처럼 여려져 있었다.

 

 지프가 사태진 언덕길을 꺾어 내리받이 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사건이라고 부를 수 없는 사소한 일, 또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은 늙은 부부였다. 경적소리에 놀란 그들은 다시 잡으려고 뒷걸음친다. 하마터면 그때 차는 그들을 칠 뻔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때 일어났던 이야기의 전부다.

 

 불과 수십 초 동안의 광경이었고, 차는 다시 아무 일도 없이, 그들을 뒤에 두고 달리고 있었다. 운전수는 그들의 거동에 처음엔 웃었고, 다음에는 화를 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이제는 아무 표정도 없이 차를 몰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잔영(殘影)이 좀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누렇게 들뜬 검버섯의 얼굴, 공포와 당혹의 표정, 마치 가축처럼 무딘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쫓겨 가던 그 뒷모습, 그리고 그 위급 속에서도 서로 놓지 않으려고 꼭 부여잡은 메마른 두 손, 북어 대가리가 꿰져 나온 남루한 봇짐을 틀어잡은 또 하나의 손, 고무신짝을 집으려던 그 하나의 손, 떨리던 손.

 

 나는 한국인을 보았다. 천 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다.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그렇게 여유 있게 차를 비키는 이방인처럼 세련되어 있지 않다. 운전수가 뜻 없이 웃었던 것처럼. 그들의 도망치는 모습은, 꼭 길가에서 놀던 닭이나 오리 떼들이 차가 달려왔을 때, 날개를 퍼덕거리며 앞으로 달려가는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악운과 가난과 횡포와 그 많은 불의의 재난들이 소리 없이 엄습해 왔을 때에, 그들은 언제나 가축과도 같은 몸짓으로 쫓겨 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러한 표정으로, 그러한 손길로,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가?

 

 위의 피부 빛과 똑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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