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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경장 두 달째 - 정성화

Joyfule 2015. 8. 2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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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경장 두 달째 - 정성화

 

물 한 모금도 입에 넣으면 안 된다고 한다. 내일 예약된 건강종합검진을 위해 저녁 9시 이후로는 절대 금식이다. 얼음 두어 개 띄운 보리차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승선 열 달 만에 돌아온 남편은 오랜만에 점검할 게 많다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맨 먼저 자식 농사의 올해 작황이 어떤지 살피는 눈치였다. 아이들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아이들이 읽다가 둔 책을 뒤적거리기도하고 아이들 옷장 문을 열어보기도 했다. 마치 들에 서서 자신의 논마지기를 둘러보는 농부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곳간의 쌀가마니 숫자가 궁금했던지 내게 우리 집 경제 상황을 브리핑briefing하라고 했다. 하기야 등기부등본 상 이 집의 주인이고, 내 아이들 생부生父인 동시에 나에 대한 일차관리자이니 이 모두 당연하다 하겠다.

 

 이번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얼굴이 왜 이모양이냐고 했다. 누렇게 떴다고 했다. 내가 뭐 메준가, 누렇게 뜨게. 나의 경쟁력이 요즘 들어 더욱 형편없어진 건 알지만 기분이 나빴다.

 

 내일이면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종합검진을 받으러 가게 되어 있다. 의사는 내시경이란 기계로 나의 위胃를 들여다보고, 나의 간과 허파에 초음파기계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을 것이다. 밥하고 빨래하는데 있어 내 팔다리가 아직도 쓸 만한지, 아이 둘을 길러낸 자궁 상태는 어떤지 요리조리 다 살펴본 다음, 나의 주인에게 본 대로 느낀 대로 귀띔할 것이다.

"아직은 더 쓰셔도 되겠습니다." 아니면 "요새는 이런 것 안 씁니다. 웬만하면 신형으로 바꾸시지요."

 어느 쪽이 될지는 내일이 되어봐야 안다.

 

 남편은 바다 위에서 모진 바람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내게 올 때도 바람처럼 온다. 산들바람처럼 살며시 왔다가는 동지섣달 바람같이 휑하니 떠나간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 몰고 온 바람은 심상치 않았다.

 

 그날 낮의 메뉴는 삼겹살 구이로 순전히 내 식성에 따른 것이었다. 손바닥에 깻잎 한 장을 사뿐히 올리고 그 위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삼겹살 한 점과 저민 마늘 한 쪽, 파절이를 얹어 싸먹을 때 그 맛이란, 음식이 아니라 돼지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아트art'다, 남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다른 반찬만 집어먹었다. 잘 익은 삼겹살을 골라 가위로 숭덩숭덩 자르고 있는데 그가 느닷없이 말했다. 내일부터는 식탁 메뉴를 채식 위주로 바꾸라고. 단호한 말투였다.

 "왜요?"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인간이 분비하는 소화액 산도酸度는 육식동물의 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거니와, 인간의 장腸은 육식동물 그것보다 세 배나 길기 때문에, 우리가 육식을 하게 되면 적어도 이틀간은 반쯤 부패한 음식을 장腸에 담고 있는 거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가 몰고 온 바람이 차츰 더 거세어졌다. 남편은 아침 6시에 온 식구를 깨워서 시민공원으로 줄줄이 끌고 나갔다. 적어도 4km정도는 뛰어야 한다며 뒤에서 돼지몰이를 해댔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에게 이 집 주방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커피 대신에 녹차를, 육류 대신에 생선을, 그리고 쌀밥 대신에 잡곡밥을 식탁에 올리라고 명령했다.

 

 조선 개국이래 오백 년 동안이나 이어온 구제도를 근대적으로 과감히 바꾸어 놓은 갑오경장, 양반과 상놈으로 나뉘던 반상班商계급이 타파되고 고문과 연좌제가 폐지되는 등,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일대 개혁이 이루어진 그 갑오경장이 떠올랐다. 우리 집에도 그런 갑오경장이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어물쩍 물러날 사람이 아니다. 달리 갈 데도 없는 나는 그냥 이 집 주방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식탁 위에 불었던 바람이 집안 전체로 퍼져갔다. 일요일 저녁마다 가족회의를 했다. 남편은 나에게 회의록을 적으라고 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것이 지켜지지 않는지 가족 모두 느끼고 반성하려면 기록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제각기 가슴에 접어두었던 불만이나 불편함, 희망 사항등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다. 엄마 말씀이 명령조라든지, 너무 모범생의 틀에 짜 맞추려 한다든지 하는 얘기는 나와 관련이 있었고, 가족 여행을 가본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얘기에는 모두 공감했다. 저희들 의견을 아버지가 수시로 무시하더라는 얘기에는 가슴이 뜨끔했다.

 

 낡은 운동화가 편하다며 다 떨어질 때까지 신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는 작은 습관 하나도 바꾸기 싫어한다. 그런 타성을 일깨우는 것이 '어느 날 문득 불어온 바람'이리라. 날개를 편 채 공기 흐름에 따라 가만히 떠있는 잠자리처럼, 활공滑空상태로 바람을 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바람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남편은 축 처진 빨랫줄도 새로 매어주었다. 빨랫줄은 다시 팽팽해졌다. 내 삶도 저런 탄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내 삶을 한번 뒤집어 볼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까. 가파른 성격, 버리지 못하는 물욕物慾, 순수함을 잃어버린 마음 등, 안 걸리는 게 없다.

 

 내 속에도 갑오경장이 일어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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