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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민군 상좌였어요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3. 31. 11:45





나는 인민군 상좌였어요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동해 바닷가 임대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노인을 우연히 만났다. 몇 년 전 딸과 함께 북한에서 넘어왔다는 팔십대 노인이었다. 정부에서 한 달에 사십여만원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중 이십여만원은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는 딸에게 보내고 나머지 돈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더러 밤중에 편의점을 지키는 알바를 해서 생활비를 보충한다고 했다. 아직 눈빛이 형형한 그는 인민군 군관으로 계급이 상좌 출신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군대에 있었다고 했다. 앞에 짜장면과 소주를 놓고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는 피하고 시사적인 것부터 물었다. 자연스럽게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물었다. 그의 대답이 기계같이 튀어나왔다.

“인민군 상좌로 있으면서 작전일꾼 회의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해서 중국 러시아등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핵이라구요. 핵은 우리의 생명이라고 배웠습니다. 그 핵이 없으면 우리는 몇 시간 안에 미국에 의해 초토화 될 거라고 들었어요.”

그들의 깊은 인식인 것 같았다.

“고모부인 장성택을 왜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죠?”

김정은은 고모부인 장성택을 살점을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기관총을 쏴서 죽였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 장성택은 북한의 궁핍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중국식 개방을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국민을 애틋하게 여기는 사랑이 있고 국제적 정치감각이 있고 중국의 지도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그를 죽인 게 의문이었다.

“죽은 게 마땅하죠. 권력을 탈취하려고 했으니까요. 북은 지도자가 자주 바뀌는 남과는 달라요.”

북에서 온 그 노인은 아주 당연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군관출신인 그는 선거로 지도자를 바꾸는 게 민주주의인 걸 얼마나 실감할까. 나는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칠십년대까지는 북이 더 잘살았다면서요? 맞아요?”

내가 물었다. 그의 자존심을 고려해서였다.

“김일성 수령은 인민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해 줬어요. 팔십년대 초까지도 북이 남보다 잘 살았어요. 그런데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나라를 망쳤어요. 멍청하고 나쁜 놈입니다. 그 아들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아서 좀 나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죠. 그런데 뭐니 뭐니해도 북의 인민들의 정신적 지주는 황장엽 선생입니다.”

나는 북에서 내려온 황장엽의 변호를 제안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주체사상을 만든 사상가이기도 했다. 나는 남북이 근본적으로 서로 증오하게 된 원인을 그가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해방후 북에서 지주나 반동분자를 숙청하는 걸 경험하셨죠?”

“예 모두 죽여서 숙청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물어보면 그때 반동이라도 죽이지 않았다고 해요. 신분증에 그저 지주출신 자본가 출신이라고 적어서 행정적으로 불이익을 줬을 뿐이라고 해요. 그런데 북에서는 사람을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동으로 찍힌 사람들에게는 절실한 생존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반공이 나오고 멸공이 나왔죠. 철저한 적대감과 미움이 생기지 않았겠어요? 담 안에서 형제가 싸우다가도 주위에 적이 있으면 합쳐야 하는데 죽이기까지 하면 됐겠습니까?”

“북에서도 지주라고 다 죽이지는 않고 가지고 있는 땅의 평수에 따라 분류해서 용서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가 궁핵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를 보면서​

월북했다가 몇 개월만에 쫓겨 내려온 내가 아는 한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당나귀 같은 특이한 귀를 가진 노인이었다. 그는 사업에서 망한 후 북으로 도망갔다. 북에 가면 대우를 해 줄줄 알고 중국으로 통해 두만강을 건넜다. 처음 몇 달은 대접을 해 주다가 아무런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자 판문각으로 끌고와서 남쪽계단으로 밀어버리더라는 것이다. 그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몇 달 감옥에 있다가 나왔다고 했다. 살겠다고 넘어온 사람이 노인이고 이용가치가 없더라도 그걸 받아주는 게 인도주의 아닐까. 살겠다고 절규하는 보트피플들을 다시 바다로 내쫓는 나라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민주화가 되면서 내가 자라던 냉전시대와는 분위기가 백팔십도 달라졌다. 내가 만난 북한에서 온 노인은 팔십년대 철원쪽 철책선 북쪽에서 근무했다고 했다. 인민군 이십일사단 군관이었다고 했다. 그 시절 나는 철책선 남쪽의 국군 장교였다. 순찰을 돌면서 북한의 대남방송용 거대한스피커에서 나오는 정치선전이 시끄러워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틀라고 지피 병사들에게 부탁하기도 했었다. 그런 얘기를 서로 나누었다.

“그때 우리는 스피커는 사람하나 들어갈 만큼 큰 데 기능이 약했어요. 남조선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더 크더라구.”

그의 대답이었다. 그 때의 적이 이제는 이웃 노인으로 바뀌어 동해 바다를 내려다 보면서 짜장면과 소주를 앞에 놓고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세상의 작은 변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