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노트에 빼곡한 사건일지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나는 어떤 변호사가 될까 생각했었다. 내 눈에 여러 형태의 변호사들 모습이 다가왔다. 글을 통해 한 선배 변호사의 활동하던 모습을 보게 됐다. 내가 대학 이학년때쯤 있었던 재판과 관련된 글이었다. 살벌하던 시절이었다.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헌법개정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긴급조치가 발동되어 바른 말을 하던 사람들이 감옥으로 들어갔다. 사회는 급격히 냉각되고 모두들 숨을 죽이고 살았다. 거리의 벽마다 현상금을 건 벽보가 보였다. 이철과 유인태라는 사람을 제보하면 삼백만원을 주겠다는 현상광고였다. 간첩을 신고하면 삼십만원인데 시국사범인 대학생 이철에게는 삼백만원의 현상금이 붙어 있었다. 이철은 고교선배이기도 했다. 당시 시국사범은 변호사들이 맡기를 꺼렸다. 잘못 맡았다가는 권력의 협박과 세무조사등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결과가 뻔히 내다보이는 군법회의 재판이었다. 그 선배변호사는 이철이라는 대학생에 대한 변호를 맡았다. 그가 구속된 이철이라는 학생을 접견하러 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철군, 정의와 진리 그리고 사회의식에 눈을 뜨면 고통과 절망이 따라오지. 난 이 사건이 권력이 만들어낸 조작극인 걸 확신하네.반대자에 대한 강한 충격요법이지.”
그는 법률을 넘어 사건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변호사였다.
그 얼마후 군법회의 법정에서였다. 당시 군법회의 법정에는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이철, 노무현 정권의 민정수석인 유인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된 유근일 등이 있었다. 재판은 각본을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재판중 그 자리에 참석했던 다른 변호사가 “차라리 학생들이 있는 저 자리에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건 사법살인입니다”라고 항의했다. 그 선배 변호사도 강경한 내용의 변론을 마치고 이렇게 덧붙였다.
“피고인의 무죄를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유죄판결이 떨어지리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재판이 끝난 후 정보부원이 변호사들을 옆의 콘셋 막사로 끌고 가서 조사를 했다. 차라리 학생들의 자리에 서고 싶다고 항의한 변호사가 법정모독과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이 됐다. 그 선배 변호사도 중앙정보부 수사국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 선배 변호사는 사건을 맡을 때마다 대학노트를 사서 깨알 같은 글씨로 재판의 진행과정은 물론 피고인과 관계인의 진술등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리고 심혈을 기울여 변론요지서를 작성했다. 그의 사건별 대학노트와 그것과 함께 보관되어 있는 재판기록은 역사적 가치와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 선배변호사에 관한 글을 보고 나는 많은 걸 배웠다. 먼저 남들이 맡기를 꺼려하는 사건을 자청해서 맡았다. 돈을 벌 사건은 들어오지 않아도 그런 사건은 줄을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돈이 안 될 사건은 대신 내용들이 풍부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애환과 하소연 그리고 절규가 들어 있었다.
사건을 할 때마다 노트를 만들어 기록했다. 피고인 및 관련자들의 내면까지 들여다 보려고 노력했다. 재판장의 표정과 무심히 지나치는 말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기록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나를 검열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법정에 남길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검토했다. 그건 판사에게 뿐만 아니라 세상과 미래에 대한 나의 표현이기도 했다. 독재시대의 진정한 변호사들은 바른 말을 하고 그 댓가를 정보부의 지하실에서 몸으로 때웠다.
나는 시간과 공간이 제한되는 법정에서 못다한 말을 글로 발표해 왔다. 그 댓가로 수많은 고소와 민사소송을 제기당했다. 스스로 자초한 고통들이었다. 재산을 다 날릴 각오도 하고 감옥 갈 각오도 했다. 자기 십자가를지지 않고 될 일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형사들에게 능멸을 당하기도 하고 검사실에서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법정에서 판사의 조롱하는듯한 싸늘한 눈길도 받아 봤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행동들이 사실은 나의 자유의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소심한 겁쟁이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나의 허리띠를 묶어 그렇게 데리고 다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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