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최악의 판사가 있다. 공부선수인 그는 일찍 판사가 되었다. 그리고 매매혼의 시장에 상품으로 내놓아졌다. 준재벌급 부자가 그를 샀다. 샀다고 하는 표현을 나는 감히 사용한다. 부자가 판사를 사위로 들이면서 그 부모에게 거액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중매판에서는 그걸 ‘매매혼’이라고 했다. 중개수수료도 억대였다. 그 판사를 구입한 장모가 물건에 하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위가 된 판사가 어떤 여성과 몰래 통화를 하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판사 사위는 그럴 때마다 당황했다. 장모는 그걸 트집잡아 사돈집에 준 돈의 반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사위인 판사와 통화를 한 여성에게 해악을 가했다. 나는 피해여성의 아버지로부터 이런 하소연을 들었다.
“판사인 그 친구를 만나러 가서 따졌죠. 장모가 오해를 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 판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거예요. 장모한테 말을 할 용기가 없는 못난이죠. 그 판사를 보는 순간 나는 그가 사람이 아니라 꽃으로 치면 조화이거나 마네킹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악취가 나는 현장이었다. 변호사를 해 오면서 그런 영혼이 없는 판사가 쓴 판결문을 국민들이 인정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 시절 판사라는 자리는 그런 면이 있었다. 천민에서 결혼을 통해 신분이 바뀌는 사다리라고 할까.
뒤늦게 피를 흘리면서 탈출하는 판사도 봤다. 대학시절 천재로 소문이 났던 그 선배는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가 되자 대재벌의 사위가 되었다. 판사로 있으면서 그는 우연히 만난 젊은 여성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틀에 갇혀 살던 세상에서 처음으로 짜릿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묶어놓고 있었던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나오려고 시도했다. 재벌회장의 딸인 아내에게 이혼을 요청했다. 간통죄가 있을 때였다. 바로 보복성 형사고소가 있었고 그를 거지로 만들려는 위자료 청구소송이 제기됐다. 판사의 자리에서 그는 바로 간통의 피고인이 되어 법정에 섰다. 전 재산을 빼앗기고 징역생활이 눈 앞에 닥쳤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그 어두운 보복의 터널을 통과한 후 그는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했다. 그리고 변호사로 새출발했다. 세월이 흐른 후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이 육십에 일곱 살짜리 아들하고 놀 때 얼마나 귀엽고 행복한 줄 알아? 그 기쁨 아무나 느낄 수 없을거야”
그는 뒤늦게 자유인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만족해 하는 표정이었다.
불행을 미리 예견하고 미리 현명하게 대처하는 그 또래의 판사의 얘기도 들었다. 그는 가난한 시골 초등학교 교사의 맏아들이었다. 그는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다. 아버지는 직장인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나뿐인 런닝셔츠를 벗어놓고 맨몸으로 농사일을 하고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빨아 말린 그 셔츠를 다시 입고 학교로 출근했다. 그의 아버지는 박봉이지만 그를 서울의 학교로 진학시켰다. 그는 고시에 합격했다. 총각 판사시절 그는 딸을 가진 부모들이 탐을 내는 사윗감이었다. 믿음직하고 온후한 인상 때문에 그에게는 많은 중매가 있었다. 장관도 사위를 삼고 싶어 했고 부자들도 딸을 그와 짝지어 주고 싶어 했다. 법조 선배들이 갖가지 좋은 조건들을 가진 집안에 중매를 들었다. 그는 그 여자들에 대해 호감을 느끼면서도 사양했다. 부유하거나 높은 자리에 있는 처가나 아내가 가난한 부모를 내심 무시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우연히 본 대학의 여직원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그 여성은 중소기업을 다니는 회사원의 맏딸이었다. 그는 결혼하고 나서 기록 보따리를 들고 버스를 타고 다녔다. 박봉으로 동생들 학비를 거의 전담했다. 부부가 알뜰살뜰 돈을 모아 미아리에 백만원을 주고 처음으로 조그만 집을 샀다. 그가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고 했다.
내 주변에서 보면 판사가 되고 나서 나름대로 신파극 같은 고비를 겪는 모습들을 더러 보기도 했다. 판사라는 지위와 돈이 비즈니스 같이 맺어지는 결혼에 행복의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행복은 부부가 맨 땅에서 벽돌을 한 장 한장 쌓아 올라가는 데 있는 건 아닐까? 그 과정에서 오래된 잘 삭은 된장 간장 고추장 같은 신뢰와 정이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거노인 반창회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0) | 2023.04.01 |
---|---|
나는 인민군 상좌였어요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0) | 2023.03.31 |
그 변호사의 십자가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0) | 2023.03.29 |
대학노트에 빼곡한 사건일지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0) | 2023.03.28 |
알뜰하고 당당한 여성들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2) | 2023.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