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구백팔십삼년 사월 그녀는 냉기 서린 구치소 벽에 기대선 채 잿빛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하던 그녀는 간첩이 뭔지도 몰랐다. 오래전 북에서 내려온 친척 한 사람을 며칠간 집에 묵게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간첩이라는 말에만 연루되면 파멸인 사회였다. 그녀는 어느 날 정보기관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나를 간첩으로 몰아도 법정에서 모든 진실이 밝혀질텐데 왜 이렇게 괴롭히세요?”
그녀는 끈질기게 저항했다.
“야, 너 법 좋아하는데 검사도 판사도 우리가 하라면 하라는 대로 다 하게 돼 있어, 알겠어?”
고문에 못이긴 그녀는 평양에 다녀 온 것처럼 허위자백을 했다. 검사와 판사에게 그녀는 진실을 말했다. 그러나 판검사는 모두 그녀의 말을 외면했다. 그녀는 누명을 벗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했다. 수사당국은 변호사들을 압박했다. 변호사들은 반국가사범은 맡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어느 날 한 변호사가 구치소로 찾아왔다. 눈이 큰 변호사였다.
“남편께서 어린 아들을 돌보면서 구명운동을 하고 계십니다. 사법부의 최종판결이야 어찌 되던 간에 이제 머지않아 온 세상이 이번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될 테고 무죄가 될 게 분명합니다. 저를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변호사는 감옥에 있는 여선생의 빛이었다. 그 변호사의 노력으로 대법원에서 불법 구속과 억압에 의해 진술한 허위자백이었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내가 본 자료에 담겨 있는 그시절 한 변호사의 기록이었다. 몇 년 전 저 세상으로 간 아버지 또래의 김이조 변호사는 특이한 분이었다. 변호사 생활의 상당 부분을 기록자로 지냈다. 수 많은 법조인들의 재판과 그 이면의 흔적들을 조사해서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그는 내게 일본어로 된 ‘페리메이슨 변호사’란 책을 복사해서 내게 가져다 주었다. 그가 조사한 법조인물들에 대해 말해주기도 하고 자료를 주기도 했다. 그가 생전에 내게 준 자료들을 이따금씩 읽어 보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한다.
내가 변호사를 막 시작할 무렵 정권의 시녀노릇을 하는 일부 재판부에 대항해서 절망적인 싸움을 하는 변호사들이 있었다. 텁수룩한 모습의 그런 선배들이 사무실 주변에 여러명 있었다. 공동목욕탕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법원에서 만나 화단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기도 했었다. 그 당시 특이했던 법정 풍경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당시 정의와 인권을 외치다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법정에서도 주저함 없이 정의를 말했다. 판사 중에는 그런 말을 들을 정신적 여백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회의 구조와 이념적 편향에 대해 의식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어느 순간 말을 하던 사람이 신고있던 검정고무신을 벗어 판사석으로 던지는 광경도 흔했다. 왜 판사가 날아오는 검정 고무신짝을 맞아야 할까. 그런 법정모독을 하는 사람들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재판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권을 탄압하고 생활을 짓밟고 목숨을 빼앗는 시절이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판사들의 입장도 딱해 보였다. 그때 한 젊은 판사가 내게 이런 하소연을 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시국사범을 재판하러 들어가면 어느 순간 고무신짝이 날아올까부터 살피게 된다구요. 그런 순간이 있었는데 재판장이 번개같이 뒷문으로 혼자 도망치고 배석판사인 나만 뒤늦게 따라가느라고 혼이 났어요.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검정고무신짝을 맞아야 하나 참”
또 다른 판사는 내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검은 옷을 입고 법대에 앉아 있는 순간 나는 국가 그 자체아닌가요? 고무신이 날아오면 얻어 맞더라도 판사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법대 위에서 맞아 죽으려고 했어요.”
그 무렵 우리 민주화의 상징이 된 시국사건을 배당받아 재판한 판사가 내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기도 했었다.
“권력이 보낸 사람이 판사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 유죄와 무죄는 물론이고 선고할 형량까지도 정해주는 거야. 속으로 울분이 터졌지만 우리는 그 압력을 이겨내지 못했어.”
그런 세상을 거쳐왔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를 한 변호사도 있었다. 노무현 변호사가 그랬다. 법정에서 변론으로 항거하기도 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들의 주장은 세상과 미래를 위한 기록이었다. 그분들이 대개 세상을 떠났다. 남아있는 나는 기억의 편린과 그들이 남긴 자료를 보고 더러 글을 쓰기도 한다.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호사일지'속의 두 신선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0) | 2023.04.05 |
---|---|
대통령들의 수고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0) | 2023.04.04 |
독거노인 반창회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0) | 2023.04.01 |
나는 인민군 상좌였어요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0) | 2023.03.31 |
판사들의 결혼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0) | 2023.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