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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변호사의 십자가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3. 29. 20:28





그 변호사의 십자가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나는 십년 전 천국으로 가신 그 선배변호사의 일을 알고 있다. 1986년 봄 인천사태가 있었다. 대규모 시위였다. 재판이 있어 인천법원으로 간 길에 판사인 친구의 방에 들렸었다. 판사실까지 매캐한 최류탄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다.

시위를 주도한 이부영은 지명수배가 되어 모 변호사의 집에 숨어 있었다. 그는 체포 될 경우 숨겨준 변호사에게 끼칠 영향이 부담이 된 것 같았다. 그가 꾀를 낸 것이 사회명사로 이름이 알려진 친구의 아버지인 변호사의 집에 숨어 있었다고 거짓자백하는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 정도라면 연세도 있고 사회적위치도 있어서 쉽게 구속하지는 못하리라는 계산이었다. 친구의 아버지인 그 변호사는 김근태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들을 맡아왔다. 이 사회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이부영이 친구의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범인은닉의 죄를 뒤집어 써달라는 뜻이었다. 그 변호사는 흔쾌히 수락을 했다. 큰아들의 친구인 이부영이 투쟁위원회시절부터 총명한 눈빛과 바른 자세가 기억에 선명했다. 그해 늦가을의 스산한 기운이 돌던 날이었다. 치안본부요원들이 그 변호사의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그 변호사는 얼마 전 이부영이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배중이던 민통련의 이부영을 숨겨준 사실을 인정하시죠?”

치안본부요원이 물었다.

“큰아들 친구요, 우리 집에 살았지, 무슨 일이 있어요? 아무말 없이 나간 후 돌아오지 않던데”

“언제부터 언제까지죠?”

“집 나간 지가 일주일쯤 됐나? 지난 오월말부터 말이요”

그는 미리 들은 대로 말을 맞추었다.

“민통련이 반국가단체인 걸 모르셨습니까?”

치안본부요원이 냉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소리? 반정부라면 몰라도 반국가단체라니?”

“어쨌든 좋습니다. 함께 좀 가셔야 겠습니다.”

그가 구속이 됐다. 검찰은 사회 지도층인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좌경용공세력을 비호해준 사건으로 규정했다.

재판장은 기계적으로 그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 변호사는 이런 내용의 항소 포기서를 작성해서 재판부에 제출했다.

‘나는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 우리 사법부를 신뢰할 수 없는 현실을 직접 확인하게 됐다. 따라서 나는 내 사건에 관하여 더 이상 사법적인 판단을 기대하지 않는다. 재판이라는 요식절차가 과연 무슨 필요가 있을까. 나는 수천명의 양심범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들과 끝까지 고통을 함께 하는 내 자신이 되기를 바라고 그 길을 가고자 한다.’

판결이 확정된 그는 수인번호 6005를 가슴에 달고 일체의 사식을 거절하면서 독서에 심취했다. 범브란트 목사의 ‘하나님의 지하운동’등 수많은 책을 감옥 안에서 독파했다. 그는 고행의 십자가를 스스로 졌다. 세월이 흘러 그 변호사는 십년전쯤 저 세상으로 옮겨갔다. 

나는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읽었었다. 사형집행을 명령받은 독일친위대 병사가 갇혀 있던 포로를 살려주고 자신이 죽는 장면에서 감동의 물결이 가슴속으로 흘러들어왔었다. 사냥꾼에게 쫓기던 짐승이 자기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 숨겨주는 게 따뜻한게 아닐까?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를 당하고 계엄령이 선포됐을 때였다. 살벌한 시국에서 나는 계엄사의 검찰 장교였다. 그때 시위를 주도하던 친구가 숨겨달라고 해서 같이 집에서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깊은 생각이 없이 그냥 단순한 행동이었다. 


얼마 전 동네 공원을 산책하다가 아는 얼굴을 봤다. 범인은닉죄로 억울하게 징역을 산 그 노변호사에게 징역을 선고한 재판장이었다. 그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는 아버지 나이이자 법조의 대선배인 그 노 변호사를 피고인으로 앞에 세워놓고 어떤 고민을 했을까? 그는 그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이념적지향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걸 막연히 느꼈다. 둔한 사람에게는 고통이 있을 수 없다.

원로원으로 귀환한 빌라도도 예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정치의 근대화는 법치의 확립이다. 법치의 실질화는 판검사의 통찰과 철학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