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웬수 덩어리 - 박 완서
내 컴퓨터가 또 이상해졌다.
이번엔 망령이었다.
A4용지로 30장 분량이나 되는 원고를 감쪽같이 집어삼킨 지 일년도 채 안되고 나서였다.
이 기회에 이놈의 386 구닥다리를 586 신형으로 갈아치워 버리고 싶었지만
집에 컴퓨터가 두대나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었다.
새걸 들여다 놓고 나면 헌것은 버리든지 필요로 하는 데를 찾아서 기증을 하던지 하는 게 순서겠으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집어삼킨 30장 때문이었다.
원고지로 환산하면 300매 가량 되고 내가 쓰고자 하는 장편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분량이 문제가 아니었다.
장편이고 단편이고 간에 나는 처음 반의 반을 쓰기까지가 가장 힘이 들었다.
시간도 지긋지긋하도록 오래 걸렸다.
반의 반만 쓰고 나면 반까지는 훨씬 수월해 지고 반에서 나머지 반은 마치
천산만고 끝에 오른 정상에서 내리막길을 타듯이 휘파람을 불며 수월하고 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중요한 반의 반을 그놈의 컴퓨터가 감쪽같이 집어삼킨 거였다.
제조회사의 AS사원을 불렀더니 백업을 안 해놓은 내 무지와 실수만 탓하고 가버렸다. ....
비록 기계일 망정 많은 시간을 같이하는 동반자에 대한 불신은 피곤한 일이기도 해서
수작업 할 때가 그립기도 했지만 나는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백방으로 애써보았지만 그놈의 컴퓨터가 내 원고를 더는 토해놓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나서는
도사 대신 어디서 고문기술자라도 불러대고 싶었다.
그 정도로 구슬려도 실토를 안하면 고문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발상은 내 딴엔 꽤 그럴듯했다.
나는 안 나오던 라디오를 모르고 발길로 걷어찼더니 다시 소리가 나던 옛날 경험을 살려
그 놈의 컴퓨터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쳐보기도 하고,
노크하듯 똑똑 여기저기를 두드려도 보고,
이 웬수덩어리야,
들입다 욕을 하면서 박살을 낼 듯이 몽둥이로 위협고 해보고 나서 다시 띄워봐도
문서이름만 남아 있고 내용은 감감무소식 뜨지 않았다.
이런저런 노력과 싸움에 지쳐 며칠 동안 머리 싸고 누웠다 일어나니
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까지 완전히 날아가버렸다.
결국 일생일대의 걸작이 될 뻔한 소설은 그렇게 하여 무로 돌아갔다....
글쓰기의 원동력은 심장의 더운 피, 고결한 양심이라고 외눈 하나 깜짝 안하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남은 구 시대의 글쟁이 중의 하나인 나 같은 사람이 그까짓 기계 나부랭이 하고 원한관계를 맺다니.
그래도 기계한테 원한은 너무 인간적인 대우였을 것이다.
이제 그놈의 컴퓨터라면 지긋지긋했다.
마침 급한 원고 때문에 쩔쩔매는 나를 딱하게 여긴 이가 있어 노트북을 빌려줬다.
노트북을 써보니 암만해도 정이 든 내 기계만 못했다.
그까짓 기계한테 정은 무슨 놈의 정. 그 속에 나의 불후의 명작이 숨어 있는 한
아무리 버려도 아무도 안 집어갈 낡은 기계라 해도 진주를 품은 조개나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끼고 돌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또 한번 회사에다 AS를 의뢰했다.
....(중략)....
"이 컴퓨터 누가 쓰던 거예요?"
"쓰던 거 아녜요. 내 거지요. 처음부터 내 거예요"
"그럼 할머니, 그 실력으로 채팅을 한단 말예요?"
뭔가 시답지 않아하는 것도 같고 경멸하는 것도 같던 그의 얼굴에 잠시 능글거리는 호기심이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가 전문직으로 글 써먹고 사는 작가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래도 내가 꽤 유명한 작가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채팅이 뭔지 난 그런 거 몰른다우."
"그럼 게임을 즐기시나"
그는 점점 더 불손하게 능글댔다.
그러면서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들겨대더니 바이러스에 형편없이 감염됐다고 했다.
나는 부랴 부랴 그 앞에 놓인 노트북을 딴 방으로 옮겼다.
"그거 뭐하러 들고 나가고 그래요?"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면서요? 이 노트북 한테까지 올까봐..."
"할머니, 할머니가 이 컴퓨터 쓴다는 거 맞아요?"
청년이 기가 차다는 듯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나도 그제서야 아차, 싶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기계에 무지하다고 해도 컴퓨터 바이러스라는 게 공기나 접촉으로
전염하는 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러스라는 소리를 듣자 반사작용처럼 순간적으로 떠오른
남의 기계까지 망치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그런 실수를 저지른 거였다.
이 나이에 왜 한 자루의 펜 대신 이런 거창한 기계는 써가지고 종당엔 이런 모욕까지 당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록 분했다.
청년은 다 고쳤다고 말하고 나서 이 컴퓨터가 할머니 쓰는 것 맞느냐고 또 물었다.
삼세번째인가. 암만해도 내 입으로 내가 작가라는 걸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젊은이, 젊은이는 이런 기계를 고치는 게 직업인 것 처럼
나는 이런 기계를 이용해서 글을 쓰는 게 직업이라우."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에 짙은 연민이 어렸다.
"할머니 이만한 아파트에 살면서 뭘 그렇게 힘들게 사세요.
그 타자 실력 가지고 하루에 얼마나 벌겠다구.
우리 어머니는 할머니 보다 훨씬 젊은데도 자식들한테 용돈 내놓으라고 큰소리 땅땅치면서
관광이나 다니면서 얼마나 편하게 사신다고요."
"그러게나 말이요"
나는 나도 모르게 순순히 동의를 하고야 말았다. 실수의 연속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급수 딴 타자수도 얼마나 많은데 할머니한테까지 돌아올 일자리가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청년이 7000원짜리 수리비 청구서를 내밀며 정말로 안됐다는 듯이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신기했다.
(문학사상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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