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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간이역 - 김병규

Joyfule 2012. 9. 25. 10:47

 

    인생 간이역 -



나는 시골의 보 잘 것 없는 역이 좋다. 기차로 지나가면 눈 깜짝 할 사이에 통과해 버리는 작은 역의 무너져 가는 나무 울타리에 기대서서 지나가는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들이 옛날에는 더러 있었다. 나 자신도 그런 아이였다. 역에는 얼마 안 되는 코스모스 꽃이 피고 역장이 홀로 쓸쓸히 선로를 건너면 뒤에는 조용히 두 가닥의 레일이 뻗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언제까지나 울타릴 떠나지 않았다. 또 지나갈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권태롭기만 한 텅 빈 역은 어린 날의 꿈을 조용히 키우고 있었다. 울타리에는 어린 시절의 체온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나는 가만히 회상해 본다. 나의 인생행로에서 나는 몸과 마음을 조용히 기댈 수 있는 곳을 찾는다. 꿈꾸지도 않고 조용히 쉴 수 있는 작은 역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작은 역이라고 했다. 더욱이 간이역이 좋다. 어렸을 때 몇 개의 산과 고개를 넘고 긴 골짜기를 지나 삼 십리 먼길을 조그만 역에서 기차를 타고 캄캄 어둔 굴을 빠져 나온 다음 내린 곳은 간이역이었다. 시집 간 사촌누이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간이역은 참 간단했다. 역사도 없이 승객은 그냥 내렸다. 그것이 신기했다.

그 뒤부터 나는 간이역이 실없이 좋았다. 아무런 격식도 없고 그래도 추억은 오래오래 남았다. 그 허전함이. 어쩌면 적막감이 오히려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큰 역보다도 간이역이 나의 마음을 매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모른다. 간이역 같은 곳에 잠시 쉬어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뿐이다. 어찌 내가 화려한 곳을 바라겠는가? 인생은 잠깐 쉬다 가는 것인데 말이다.

인생행로에서는 하나 하나의 여정(旅程)이 중요하다. 여행의 진실한 부(富)는 세부의 여정에 있다. 한 여정을 뛰어넘어 가면 그만큼 공백이 생긴다. 이어가는 고리가 끊기면 비약이 생기고 비록 목적지에 도달할지라도 공백은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간이역은 차라리 텅 빈 공간이다. 그것이 바로 들판으로 이어지고 꼬부랑 소로로 끌려 들어가면서 초가마을이 나타난다. 이 모두가 빨려가듯이 이루어진다. 거긴 아무런 말도 필요 없다. 사람들은 그런데서 고만고만하게 살아간다.
간이역은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간난한 마음의 지탱을 받아 그래서 넉넉하게 버티고 있다. 기차를 탄 사람도 간이역이 있길래 거길 헛되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멀리까지 착실히 도착할 수 가 있다.

등산의 경우 한발 한발의 움직임에 따른 굽이굽이의 산길이 하나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 것을 음미하면서 산을 오른다.

거긴 뛰어 넘든가 한 군데를 빼먹을 수가 없다. 그 모든 곳이 구실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그는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는 그런 즐거움을 스스로 획득한 것이요,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다.

간이역에 한번 내린 것 밖에 없는 그 간이역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 그 이유를 나는 표현할 수 가 없다. 그러면서 나는 거기에 기대를 건다. 그때 어린 나에게 나는 쓸쓸했지만 지금도 쓸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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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1920년 경남 고성 출신의 법학자 언론인 수필가
2000년 3월 4일 생애를 마감.
그가 <부산매일>에 연재한 명칼럼 <인생산책> 김병규 철학에세이 『인생산책』(문화유산, 1993) 및 『인생산책』제2집(동아대학교 출판부, 1996)으로 출간됐다.
작품 「인생 간이역」은 제2집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