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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새2. - 손 숙

Joyfule 2012. 5. 1. 21:52

 

 

 내 안의 새2. - 손  숙

 

 

내가 이혼한 아내와 처음 만난 것은 대학캠퍼스였다. 그해는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고, 군복무를 마친 나는 삼학년 이학기에 복학했다. 그런데 학교생활이 뭔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그날 도서관에서 전공에 필요한 전문서적을 찾고 있는 나와 그녀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 순간 그녀는 나를 향해 유난히 따뜻한 눈길을 보냈고, 아직은 남아 있던 군인의 체취가 전신에서 물씬 풍기던 나에게 자상한 누님처럼 끌어주었다.


한 번 두 번 만나면서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 너무나 많은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업을 크게 하는 부자였고, 그녀의 미모 또한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한마디로 내게는 과분할 만큼 조건이 아주 좋은 여자였다. 정말로 그랬다. 그녀와 나는 생활환경, 학벌, 부모의 재력, 성장한 가정문화 등 모든 것이 달랐다. 아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삶의 요건에서 발생되는 이질감 때문에 우리 사이에는 불편함이 많았다. 불편함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만나고 있으면 자꾸만 내 자신이 왜소해지는 열등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였으며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였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그러한 이질감과 정서적 장애가 있었지만 제대하고 만난 첫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점심시간에 그녀를 만났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데리고 학교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녀가 제동을 걸었다.
“오빠. 난 구내식당은 싫어. 어디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우아하게 먹자, 응.”
“점심 한 끼 그냥 구내식당에 가서 국밥으로 간단히 때우면 되지. 분위기 있는 곳은 좀 과하지 않니?”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밥이 뭐가 좋다고 그래. 난 싫은데…….”
그녀가 토라졌다.
“나 돈 없어. 지난번에 고급 레스토랑에 갔다가 돈이 모자라서 시계를 풀어 맡기고 온 거 너도 잘 알잖아. 아직 그 시계도 못 찾았어.”
“까짓 밥값 내가 내면 되잖아. 오빠는 그냥 먹기만 하면 돼. 오빠 고집 부리지 말고 우리 근사한 데로 가자, 응.”


그녀는 내게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나는 그녀의 팔짱을 뿌리칠 용기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밀착되어 오는 감각은 부드럽고 황홀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풍기는 질감 좋은 화장냄새도 나를 은근히 취하게 했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은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고, 바닥에는 붉은색 융단이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밝고 달콤한 곡조의 음악이 마치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듯이 흘러나왔다. 

나는 서민들의 삶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실비음식점에서 삼겹살을 지글지글 구워 놓고 소주 한 병을 마시면 모든 것이 만족해지는데 비해 그녀는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식당이나 메뉴는 그녀가 아주 싫어하는 것들이었다. 싸구려나 천박한 것은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와 내가 상반되는 것이 또 있었다. 내가 영화를 보자고 하면 그녀는 꼭 연극이나 오페라 관람을 원했고, 나는 청바지나 티셔츠를 입고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하는데 그녀는 나에게 가능하면 정장에 넥타이를 매라고 강요했다.
그녀의 그러한 요청은 평범한 대학생인 나에게 차츰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압박감으로 내 숨통을 조였다. 그녀의 정서에 맞추어 나가는 것은 정말로 힘들었지만 나는 묘하게도 그녀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점심을 먹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오빠. 오늘 저녁에 롯데호텔 식당에서 가족 모임이 있는데 얼굴도 익힐 겸 오빠도 같이 가자 알았지. 남자 친구로 소개할 테니 단정한 복장으로 나와야 돼.”
“싫어. 기대하지 마. 나 절대로 안 가.”
내가 그녀의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왜? 우리 결혼할 거잖아.”
“암튼 싫어. 그러니까 너 혼자 가.”
그녀가 토라졌다. 난 결국 그녀의 가족 모임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 혼자서 홀가분하게 포장마차에 들러 닭똥집 구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 일로 그녀는 나에 대한 불만이 많았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관계는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밤이었다. 아침부터 희끗희끗 내리던 눈은 정오를 지나면서 굵어지더니 저녁부터는 폭설로 변했다. 그녀가 내 자취방으로 와서 하루 종일 함께 보내다가 저녁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밖에는 비바람을 동반한 폭설이 계속 거칠게 쏟아져 내렸다. 
날씨 탓이었을까? 그녀는 평창동 자기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비좁은 내 자취방에 죽치고 있었다. 비좁은 공간에 단 둘이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있다 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 포옹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려 올랐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이성과 지성적 억제력으로 버티었다. 그런데 나의 젊고 건강한 혈기는 인내력을 잃게 했다. 그녀에게로 다가가 슬며시 안았다. 그녀가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그녀를 더욱 힘 있게 포옹하고 입술을 차지했다. 그녀도 내가 그렇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농밀한 애무와 포옹을 능동적으로 했다. 우리는 열정적으로 애무하고 포옹했다. 그리고 우리는 혼전 성관계를 완벽하게 치렀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내 하숙방을 빈번하게 드나들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 우린 사랑했다. 아니 그러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정한 뒤 부모님께 인사를 올리고 결혼승낙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나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뭐? 결혼을 해. 누구 마음대로……. 난 자네 같은 시골 청년에게 소중하게 키운 내 딸의 인생을 맡길 수 없어. 그러니 꿈도 꾸지 말라구.”
“아빠. 우린 서로 사랑해요. 그러니까 아빠가 아무리 반대를 해도 소용없어요. 우린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결혼을 하고 말 거예요.”
“너, 그걸 말이라고 해. 내 허락 없이 결혼을 했다가는 널 자식 취급하지 않을 테니 어디 마음대로 해봐.”
그녀의 아버지는 거칠게 고함을 지르며 우리들의 관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우린 너무나 단단한 벽에 부닥쳐버렸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헤어지자.”
“싫어. 난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헤어지지 않아. 그러니 다시는 내 앞에서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마.”


그녀도 막무가내였다. 나는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녀와 인생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두 가지 생각으로 고뇌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나를 더욱 단단히 얽어 묶었다. 그녀는 집에도 잘 들어가지 않고 아예 내 비좁은 하숙방에 눌러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란히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오늘 병원 갔다 왔는데 임신이래.”
“뭐 임신?”
그녀가 임신을 했다는 말에 나는 당혹했다.
“왜 그렇게 놀라. 축복을 해 줘야지.”
그녀는 의외로 담담하고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이제 우리 결혼식을 올리자.”
“안 돼. 난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은 절대로 할 수 없어.”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그녀의 제안을 묵살했다.
“난 이미 결심했어. 아빠가 우리 결혼 끝까지 반대하면 난 아빠 안 봐.”
그녀는 그녀대로 단호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한숨을 쉬었다. 세월이 흘러갔다. 그녀의 배가 불러 오르기 시작했고, 그녀의 혼전임신으로 우리는 주변사람들에게 온갖 수모와 질타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했다. 그날 이후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은 완전히 끊겨버렸고 힘든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대궐처럼 큰 집에서 살던 그녀가 단칸 월셋방에서 신혼생활을 하는 것이 퍽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서 그녀의 불평불만이 시작되었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돼. 난 참을 만큼 참았어. 이제 무슨 수를 내야 하지 않겠어.”
“자꾸 보채지 마라. 그런다고 내 능력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은 아니잖아.”
나는 부잣집 딸인 그녀를 고생시키는 것이 정말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내 능력이 거기까지인데 어쩌겠는가? 그녀는 자꾸만 나를 몰아붙였고 그로 인해 우리들의 행복과 사랑은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불평하는 그녀도 지쳤고, 그것을 견뎌야 하는 나도 지쳤다. 하는 수 없이 처가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에게 쏟아졌던 비난과 차디찬 냉소는 내 마음속 깊이 상처로 남았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예쁜 딸을 출산했다. 딸의 출생으로 균열될 대로 균열되어 있던 아내와의 사랑이 조금씩 복원되어 갔다. 그런데 참으로 운명은 내게 가혹했다. 천사처럼 귀엽던 우리 딸아이가 생후 다섯 달 만에 천상으로 가버렸다. 어린 딸과의 영원한 이별은 우리 부부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아내는 공허한 마음을 달래지 못해 거의 실신상태로 세월을 보냈고, 끝내 우리는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나는 오랜 세월을 딸을 잃은 슬픔과 이혼의 아픔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혼자서 중얼거린다.
……아가야. 난 너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랬다. 그 아이의 잔영은 내 기억의 강에서 영원히 유영하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사계절 중에 나는 유독 봄을 좋아했다. 우리 집 마당에도 개나리와 산수유가 활짝 피어 봄을 장식하고 있었다. 벌과 나비도 꽃들을 향해 분주히 날아다녔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 일요일을 맞았으나 특별히 가야 할 곳도 없고 만나야 할 사람도 없는 나는 쓸쓸한 기분이 되어 마당을 서성거렸다. 

그때 옆집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대선배인 어봉출이 대문을 들어서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아, 이렇게 좋은 날 집에만 틀어 박혀 있을 거야. 날 따라와. 관악산에나 가세. 오늘 마침 산행모임이 있어.”
“관악산 좋지요. 갑시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산행을 하자는 문자메세지를 받은 터라 나는 망설임 없이 쾌히 응했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여 간단한 등산복 차림을 하고 따라나섰다.
“이번 모임에는 다양한 연령층이 오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등산하는 재미가 쏠쏠할 거야.”

어봉출 선배는 신이 나서 지껄였다. 그 선배는 언제나 성격이 호탕해서 좋았다. 등산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선배는 오랜 세월 동안 국가공무원으로 재직해 오다가 몇 년 전에 시청 앞에서 사무실을 개설해 결혼알선업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국제결혼이 전문이었다. 그런 직업적인 측면도 있긴 했지만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는 후배인 나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제는 세월도 많이 흘렀고, 직장도 안정되고 집안 형편도 많이 좋아졌으니 이제는 혼자서 사는 궁상은 그만 떨고 더 늦기 전에 빨리 결혼을 하라는 것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결혼 같은 것은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도 선배는 나를 만날 때마다 걱정을 해주었다. 선배와 나는 정부과천청사 뒤쪽으로 이어지는 등산길을 택해 부산하게 올라갔다. 첫 번째 집결지인 초입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회원들이 와 있었다. 회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어, 하니도 왔군.”
“네, 사장님. 안녕하세요.”
선배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아가씨는 아담한 키에 단정한 용모의 미인이었다. 한국말이 다소 어눌하기는 했지만 목소리가 맑고 또랑또랑했다. 그리고 전신에서 이국적 멋과 매력이 물씬 풍겼으며 그녀의 미소는 아주 살인적이었다. 그리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이끌려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그런 내 속셈을 알아차렸는지 선배가 소개를 했다.
“인사해. 하니는 약 육개월 전에 S대 일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어. 머리가 좋아서 불과 육개월 정도 체류했는데 한국어를 가상할 만큼 잘해. 아는 언니가 한국남자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군.”
선배는 하니를 비교적 자상하게 소개해 주었다. 

하니와 나는 정중히 인사했다. 베트남은 우리보다 개발 후진국이지만 하니의 첫 인상은 아주 세련되고 지적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다소 구릿빛이었지만 상큼한 이미지는 나를 흔들어 놓았다. 인사가 끝나자 선배는 나에게 덧붙였다.
“하니는 아직 한국의 지리도 서툴고 언어소통도 완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특별한 연고자도 없으니 자네가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가볼 만한 서울 안내를 해 주게나. 신분이 확실한 학생이니까 아무 걱정 말고….”
선배 어봉출의 말은 나더러 하니와 한 번 잘 사귀어 보라는 암시였다. 그래서 나는 쾌히 대답했다.
“하니 양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하지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하니가 생글 웃으며 내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서로를 향해 조금씩조금씩 다가갔다. 내가 하니를 만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고 내 인생의 구원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하니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첫 번째 결혼을 실패해 이혼을 했으며 이혼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아 고통과 번뇌와 좌절로 혼란스럽고 깊은 외로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니는 베트남 여자였기에 나와는 국적과 언어가 다르고 문화적 가치와 감각이 달랐다. 그런데도 하니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지금까지 이성에게서 느껴보지 못했던 생경함과 신선함으로 내 빈 가슴에 파고들었다.
정말로 그랬다. 하니의 샛별처럼 반짝이는 순수한 눈망울과 미묘한 매력을 풍기는 이국적인 모습은 내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하니는 한 치의 거부감도 없이 나에게 부드럽고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곧 사랑의 징후였다. 우리는 서로 극과 극이 다른 자석처럼 서로에게 강력하게 끌렸고 점화되기 시작한 사랑의 불꽃은 우리를 마른 가랑잎처럼 빠르게 불태웠다. 왜 그런지 몰랐다. 그녀와 만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좋았다. 그리고 나는 하니와 재혼을 했으며 딸 미나를 낳았다.

이제 막 첫돌을 넘기고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미나는 얼굴색이 뽀얗고 계란형으로 아주 예뻤다. 게다가 긴 속눈썹, 맑고 큰 눈망울, 오똑한 콧날 그렇게 미인의 조건을 다 갖추고 태어났다.
전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첫아기를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 있던 나는 생각지도 않게 베트남 여자인 하니를 만나 예쁜 딸 미나를 얻었으니 이것은 대단한 행운이며 하나님은 정말로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주더니 이제는 가슴 벅찬 행복을 안겨주었으니 말이다.
천사가 되어 하늘로 가버린 아기와 너무나 닮은 미나! 미나를 보고 있으면 나는 하나님께서 먼저 천상으로 가버린 그 아기에게 귀한 생명을 불어넣어 미나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딸 미나는 나의 행복 그 자체였다. 내가 하니와 결혼을 하겠다고 아버지에게 인사를 시켰을 때 아버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넌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애비처럼 여자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짓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요즘은 다문화가정이 많이 생겨나는 사회적 추세이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너희들의 생각과 의사를 존중한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촉촉한 비애로 젖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눈빛과 분위기에서 하니를 보는 순간 베트남에 두고 온 첫사랑 여자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 갑자기 증폭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