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내 안의 새1. 손 숙

Joyfule 2012. 4. 30. 21:21

 

내 안의 새1. 손  숙

 

살랑살랑 살갗을 가볍게 애무하는 봄바람에 꽃향기 풍기며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괴괴할 만큼 주변은 조용했다. 
나는 몇 시간째 줄곧 어둠과 정적이 적재된 마당의 나무숲에 의자를 내다 놓고 앉은 채
 은하가 아름답게 흐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자유로움이 무척이나 감미로웠다. 그 감미로움을 만끽하며 산다는 동물적 본능과 이유로 나라는 존재를 실종시킨 채 감성이 메말라 건조했던 시간들을 정적 속에 묻으며 나는 열심히 새로운 나를 조각하고 있었다.


아니다. 앞으로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좋은가 하는 해답을 얻어내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해답이 명쾌하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을 새로운 형태로 구축해 보고 싶은 열망의 시간은 즐거웠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보았다. 사람에게 팔자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 것인가. 참으로 미묘하게도 문득 그런 의문이 나를 지배했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절망적인 일들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기쁨 보다는 슬픔과 괴로움이 끈질기게 삶을 흐트려 놓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살아온 지나간 시간들도 그렇지만 내 아버지 유진호 옹의 삶을 보아도 그렇다. 아버지는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 월남전에 참전하였는데 그때 월남에서 한 여자와 사랑하였다. 아버지는 그 여자가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여러 가지 현실적 상황과 국제적 상황에 의해 복무를 마치고 혼자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여자를 한 순간도 잊지 못한 채 평생을 그 여자를 가슴 속 깊이 새긴 채 그리워하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다하여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그 여자를 만나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고 심경을 고백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리움에 몸살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측은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그랬다. 

늘 무엇인가에 혼을 빼앗긴 채 살고 있는 남편이지만 그래도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현모양처의 본분을 다해 온 어머니였는데 어느 날 친정집에 다녀오는 길에 갑자기 길바닥에 쓰러져 반신불구가 된 채 십 수 년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불운한 삶을 살고 있다. 

비운도 집안의 내력인지 나도 그랬다. 

첫딸 아이의 죽음과 아내와의 이혼도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팔자에 의해 일어난 신의 유형(流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 운명적인 것이 또 있었다. 하니와의 재혼도 그렇다. 

멀리 베트남에서 온 하니와 내가 결혼을 하리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하니와 재혼한 것은 불행한 내 인생을 희망과 행복으로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수많은 순간들을 그래도 지금까지 잘 참고 견뎌오고 있었다. 이제는 좀 안정되고 자유스러운 순간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정말로 이제는 어떤 슬픔도, 어떤 아픔도 내 삶을 흔들어놓는 것은 싫었다.
평범해도 좋으니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삶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포용하려 노력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향이 짙은 커피를 마시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달콤하게 속삭이며 금세 내게로 사뿐히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번잡한 도심의 자투리땅에 자리 잡은 열 평 남짓한 우리 집 소박한 마당에는 몇 그루의 꽃나무를 심었는데 봄이 되면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 그 꽃들이 외등의 불빛 따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참 아름다운 밤이었다. 나는 밤의 한가운데에 앉아 또 다시 생각했다. 

요즘 무엇이 그렇게도 나를 바쁘게 휘몰아 갔는지……. 나는 그동안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숨을 돌릴 여유도 없이 동분서주했는가? 정말로 그랬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계절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 계절을 떠나보냈다. 

그렇다. 내가 꽃의 웃음소리인 봄의 교향악을 듣지도 못한 채 그렇게 봄은 어느새 소리 없이 내 곁을 떠나갔다.
봄이 되면 앞마당의 백목련과  뒤뜰의 자목련은 한껏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며 우리 집 마당을 황홀하게 장식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 집을 꽃대궐로 만들어 주는데 한 몫을 단단히 해낸 것이 또 있다. 

바로 한 그루의 벚나무이다. 마당 한켠에 초병처럼 우뚝 서 있는 벚나무는 키 큰 덩치에 다소 촌스러운 늙은 자태를 하고 있지만 봄이 되면 어김없이 가지마다 소중한 연분홍빛 꽃을 망울망울 맺어 소담스레 피었다.


그런데 금년에는 참으로 아쉽게도 그 벚꽃의  앙증스러운 잔치를 보지 못했다. 그런 내가 오늘 이렇게 치열한 삶의 무거운 짐을 잠깐 내려놓고 침적된 적요 속에서 하늘에 반짝이는 은하를 바라보며 만끽하는 감미로운 자유의 시간은 특별하다. 

그리고 달빛이 아련하게 내려앉는 이 깊은 밤에 돌 틈 사이사이에 예쁜 얼굴을 쏘옥 내밀고 활짝 피어 있는 철쭉꽃과 함께 대화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귀한 시간의 여백 속을 마음껏 유영하면서 그동안 의식에서 실종되어 있던 나 자신을 되찾고 싶었다.
하늘을 보았다. 깊고 깊은 어둠 속에 광휘 되는 별빛이 전설처럼 친숙한 서정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주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를 한 모금 길게 들여 마셨다가 내뿜었다. 담배연기가 폐부에 와 닿는 쾌감이 짜릿했다. 

이처럼 기가 막히게 좋은 담배를 주변에서는 왜 끊지 않느냐고 극성스럽게 몰아붙였지만 나는 담배를 끊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치 무슨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숨어서 담배를 피웠다. 담배연기를 내뿜자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문득 직장의 입사 동기인 경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경진은 회사의 업무 차 나에게 서류를 전해 주려고 여길 잠간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경진은 아기자기하게 조경해 놓은 우리 집의 정원을 보고 닭장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보다는 주택이 훨씬 운치가 있어서 좋다며 나를 부러워했다. 화려하게 지은 대저택도 아닌데 말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나와 경진이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 어떤 대재벌 그룹의 회장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너무나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나를 감탄케 하였다. 그 집 정원이 너무나 아름답고 멋져서 관리인에게 서울 시내에 어떻게 해서 이처럼 고풍스러운 대저택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관리인은 아주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회장님 댁의 이 집터는 조선조 영조 때 궁궐인 조정 궁터이지요. 그래서 저기 회나무 옆에 있는 저 바위에는 영조가 직접 새겨 넣은 취암(醉岩)이란 두 글자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선명하게 남아 있지요. 그래서 바깥 회장님께서는 자신의 호를 거기에서 따서 취암이라고 하셨지요.”


관리인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그 집은 오랜 역사의 숨결이 맥락지어 내려오는 좋은 집터라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 회장은 문화재관리재단으로부터 궁궐터를 매입하여 멋진 양옥을 짓고 마치 대자연의 한 부분을 옮겨놓은 것처럼 웅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꾸며 큰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원의 오른쪽에 우직하게 버티고 서 있는 수령이 오래된 건강한 회나무가 이 댁의 길함을 수호해 주고 있다고 했다. 그 집의 정원을 보고 감탄한 경진은 자기도 언젠가 정원 한쪽에 미니 분수가 있는 집에서 사는 게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경진은 지금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나는 작지만 마당이 딸린 한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경진은 우리 집 마당을 유독 좋아하고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몰두해 있는 사이에 밤은 무척 깊어져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내 시선에 포착되는 철쭉 한 그루가 있었다. 그 철쭉은 며칠 전에 사납게 휘몰아쳤던 비바람을 견디지 못해 가지가 심하게 휘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 철쭉의 휘어진 가지를 바로 세워주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나를 향해 아내 하니가 말을 붙여왔다.
“이제 그만하고 들어와서 과일 드세요.”
“그래. 알았어.”
나는 하니를 향해 대답을 하며 돌아보았다. 하니를 볼 때마다 참 아름답고 현명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니는 젊었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택해 주었다. 그런 하니가 나는 무척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다음 달 이맘때 베트남에 있는 친정으로 나들이를 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기에 하니는 요즘 몸과 마음이 높은 음표처럼 들떠 있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하긴 결혼한 후 처음으로 가는 친정 나들이였기에 기분이 들뜨는 것은 당연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니가 나와 결혼한 지도 어느새 삼년이 지났다. 삼년이 지났는데도 지금까지 부모 형제가 살고 있는 베트남에 한 번도 보내주지 못한 내가 무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니와 나는 삶의 환경과 조건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주변의 걱정과 극성스러운 반대에 부닥쳐 이루지 못할 뻔했던 사랑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베트남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었던 아버지의 특별한 배려로 하니와 나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 결혼을 했다. 

그리고 예쁜 딸 미나까지 얻는 기쁨을 누렸다. 나의 딸 미나는 총명하고 나를 쏙 빼닮아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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