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의 초상肖像 - 임병식
오랜 세월 거친 세파에 부대끼며 살다보니 감정이 많이 무뎌 졌지만, 그러나 먼지 낀 거울을 닦듯 마음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아직도 순수로 가득 찬 내 유년시절의 흔적들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것은 켜켜이 쌓인 세월의 진애에 덮혀 오히려 지워지지 않고 남아서 과거를 잊고 사는 나를 불현듯 깨워주곤 한다 .일테면 '본래의 나'로 되돌아가게 해준다고나 할까. 그것들은 모두가 예 일곱 살 유년의 추억들이다.
1.
날씨 따사롭던 봄날, 나는 삘기를 뽑기 위해 무논의 논둑에 들어섰다. 조금 있으면 모내기를 하려고 가득 물을 가두어 놓은 무논은 마치 바다처럼 보였는데, 그 물은 바람이 불 때마다 연신 일렁이며 제법 깊은 바다처럼 파문진 물 너울이 갈기를 새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논둑 길에서 나는 삘기를 뽑으려 하였으나 둑을 붙이면서 튀겨놓은 흙투성이 때문에 삘기는 뽑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안쪽으로 가면 괜찮겠지 기대를 하고 계속 발을 떼어놓고 있는데,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자꾸만 개구리란 놈이 놀래키며 발등에 오줌을 내갈기는 바람에, 애궂게 신고있던 고무신만 자꾸 미끄러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 먹고 우렁이를 잡기로 했다. 우렁이는 무논에서 쉬 눈에 뜨이지 않지만 요령만 알면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논바닥을 기어가는 흔적을 쫒이면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놈은 성층권 위를 나르는 젯트 비행기가 하늘에 비행운(飛行雲)을 남기듯, 기어가는 흔적을 남겨주어서 그 괘적을 따라가면 금방 발견이 되었다.
그날 나는 그런 요령을 알아내어 우렁이를 많이 잡았다. 그렇게 잡은 게 주머니가 다 차고, 나중에는 고무신에 담게 되었다. 애초 목적한 건 삘기였으나 ,대신 이렇게 우렁이를 많이 잡았으니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됐다. 누구보다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이다. 생각지도 않던 국물에 넣을 국거리를 마련해 왔으니 얼마나 칭찬을 해 주실까. 그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화로 불에 구워먹을 생각도 했다.
우렁이는 익으면서 '핏시'하고 소리를 내는데 그걸 연상하니 마냥 즐거웠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허리를 펴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아뿔사! 이게 뭐란 말인가. 뱀이 아닌가. 바로 코앞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놈이 내가 놀라자 제 놈도 놀랐는지 기겁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고무신에 가득 담은 우렁이를 다 쏟아 버리고 말았다. 한참 후에 달아나는 것을 바라보니 놈은 그때까지도 그 징그러운 긴 몸둥이를 갈지 자로 휘저으며 달아나고 있었다. 그 일로 해서 얼마나 놀라고 허망하였는지 모른다.
2.
그 다음은 나무에 걸린 잃어버린 연에 대한 아쉬움이다. 늦가을부터 이른 봄 까지는 연을 날리기에 참 좋은 철이었다. 이때가 되면 서툰 솜씨지만 정성을 다하여 연을 만들었다. 가오리연은 대충 만들어도 바람에 잘 떴으나 방패연은 많이 신경 써 만들어야만 곤두박질을 치지 않고 균형을 잡고 떴다. 나는 방패연을 만들어 밖으로 나갔다. 한데 정성스레 만든 연이 그만 당산나무 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다른 곳은 바람이 불지 않아 바람 부는 곳을 택해 당산나무쪽으로 간 게 잘못이었다. 바람이 불어와 공중 높이 떠있던 연이 갑자기 힘없이 내려앉기에, 다시 띄우려 연줄을 잡고 힘껏 내달렸는데 결국 나뭇가지에 걸리고 만 것이다. 어떻게 끌어내 보려고 연신 연 실을 잡아당겨 봐도 연은 꿈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좀더 힘을 주어 끌어당기니 이번에는 그 실까지도 중간에서 뚝 끊어져 버리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연 실은 금방 보푸라기가 되어 공중으로 휘날렸다. 그 방패연의 휑한 바람구멍. 그건 마치 내 가슴이 뚫려버리기라도 한 듯 오래토록 허전하고 시렸다.
3.
6.25 전쟁이 종전이 되던 해는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구호품 가루우유를 배급 주었다.우유를 배급받은 날은 가슴이 설레었다. 청부아저씨 앞에 나아가 한 되 박씩의 우유를 타는 날은 하교하는 중도에서 꺼내먹느라 목이 맸다. 그런데, 하루는 언덕배기 밑에서 꺼내먹으려다 돌개바람을 만나 그만 들고있던 보자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우유가루가 하늘로 비산하였다. 어이가 없었다. 저절로 자신에게 '병신 병신' 소리가 흘러 나왔다. 누가 이 광경을 보면 어쩌나. 나는 다급히 옷에 칠감이 된 우유가루를 털어 냈다. 그러나 그것은 쫀득하게 늘붙어서 좀처럼 털려 나가지 않았다. 마치 나의 부끄러움이나 되는 것처럼. 유년의 이런 나의 기억은, 뱀에게 놀란 만큼 심약하고, 나무에 걸린 연을 못 잊어 한 것처럼 애잔해한 모습으로, 그리고 우유가루도 간수 못하고 바람에 날려버릴 만큼 강단지지 못한 모습으로 마치 옷에 묻은 우유가루가 털려 나가지 않듯이 기억에 각인되어 나의 유년의 변변히 못한 모습을 그려내 주고 있다.(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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