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문학>
뒤늦게 불붙은 글쓰기의 열정 - 임병식
요즘 나의 생활은 그야말로 매두몰신(埋頭沒身), 온전히 글쓰기에 바치는 생활로 보내고 있다. 몇 년 전 30여 년간 몸담은 직장을 퇴임 한 후로 여유시간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내의 와병으로 인하여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집에서 가능한 컴퓨터 작업에 매달리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신작을 쓰고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전에 발표했거나 써둔 미 발표작들을 다시 꺼내어 퇴고를 한다. 당초 작품을 쓸 때는 이만하면 됐다 싶어서 발표를 했던 것이, 이제 와서 읽어보면 마음에 안든 부분이 많고 문학성도 살리지 못한 게 많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수필을 쓰다보면 소재을 두고 한계를 느낄 때가 많은데, 그런 체험이 녹아든 것을 그냥 태작(駄作)으로 놔둘 수가 없어서 손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은 편수도 어지간하지만, 그기에는 게의치 않고 어떤 건 한 편을 두고 10여 차례도 더 넘게 퇴고를 하기도 한다.
나는 1989년 등단 이후, 적잖이 400여 편의 작품을 썼다. 그렇게 써서 묶은 수필집이 4권이다. 첫 작품집 ‘지난세월 한 허리를(1990)’를 비롯하여, ‘인형에 절 받고(1993)’, ‘동심으로 산다면(1995)’, ‘당신들의 사는 법(2002)'.
여기에다 청탁을 받고 수필이론집이랍시고 ‘막 쓰는 수필 잘 쓰는 수필(2007)’까지 펴냈으니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첫수필집은 반응이 괜찮아 초판 2천권을 찍고도 추가로 재판은 1500부가 모두 팔렸다. 그리고 세 번째 수필집‘ 당신들의 사는 법’으로는 과분하게도 한국수필문학상까지 수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수필이론집인 ‘막 쓰는 수필, 잘 쓰는 수필’은 해당 출판사의 100권 기념 기획출판으로 채택 되어서 자비 한 푼 들리지 않고 출간을 하게 되었다. 그런 만큼 수필은 내게 적잖은 행운도 가져다주고, 생활의 일부가 되어 내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함께 가는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다.
나는 2002년에 수필집을 내고 잊지 못하는 전화를 한통 받은 적이 있다. 조경희 회장님께서 “임병식씨는 수필이 뭔지 알고 쓰는 작가야. 몇 편 읽어보고 기분이 좋아 전화 한 거예요” 라고 하셨던 것이다. 얼마나 마음이 뿌듯했는지 모른다.
나는 비교적 일찍이 문학을 접하였다. 중학교 다닐 때인데 형님이 사상계 잡지를 구독하고 있어서 거기에 발표된 시와 소설작품을 두루 읽었다. 지금도 생각나지만 그때 읽은 작품으로 김동리 선생의 ‘늪’, 황순원선생의 ‘나무 비탈에 서다’, 안수길선생의 ‘북간도’, 손창섭선생의 ‘잉여인간’등이 있다.
그러면서 나는 ‘학원’잡지도 구독 했는데, ‘우리네 동산’란에 투고하여 여러 번 작품이 발표도 됐다. 그 덕분에 중3때와 고1때는 일 년에 한 번씩 시상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하여 두 차례나 상장과 메달을 받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제법 알아주는 문사가 되어서 학교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수업시간에 다른 학생들은 한눈을 팔면 가차 없이 체벌이 가해졌지만 나만은 예외로 인정해 주어 자유롭게 봐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내가 전국공모전에 응모하여 동국대 총장상, 조선대 총장상, 서라벌예대 학장상을 두루 수상한 이력을 높이 사서 예외를 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결과는 졸업 때까지도 이어져서 전통적으로 학생회장에게만 주는 ‘공로상’을 예외적으로 나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영광은 그것으로 끝나고, 곧이어 시련이 이어졌다. 오랜 병원생활을 하시던 선친께서 돌아가시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고 말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진학은 꿈도 꿀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여러 대학에 특대생으로 입학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도 자취방 한 칸은 물론, 용돈 한 푼 마련할 처지가 못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훗날을 기약하며 농사일을 돕다가 입대를 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그리고 제대하고 나서는 호구지책으로 서둘러 직장을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한데, 직장에 들어와 보니 도무지 글을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만약에 그런 행동이라도 보이면 ‘일은 않고 딴 짓’이나 하는 사람으로 내몰리기에 딱 알맞은 곳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직장상사의 연설문 작성 전담자가 되어 문학의 끈은 놓지 않았다. 사전을 뒤적여 어휘를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과 관계된 잡지사에서 직원과 가족상대로 수필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시험 삼아 보냈는데 그 게 최고상을 받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그동안 눙쳐놓은 문학에의 열정을 불태워 다시 원고지와 씨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수필 공부를 하지 못해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어찌 등단의 관문은 통과하였으나 수필에 대한 계념이 뚜렷이 서지 않다보니 인생이 녹아든 글은 쓰지 못했다. 그 점이 많이 아쉽고 후회가 된다.
나는 수필의 소재를 주로 나의 생활주변에서 찾는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선호하는 것은, 내가 어렸을 적 자랐던 농촌의 풍속과 세정(世情), 그리고 인연의 소중함과, 가치관의 문제들이다. 나는 수필이 그저 객쩍은 한담의 나열이나 무엇을 소개하는데 그치는 글이 아니라 사람의 정서와 정신세계에 공헌해야 하고, 그렇게 하는데 다가서야 한다고 믿고 있다.
나는 최근에 이렇게 퇴고된 작품을 깐깐하기로 소문난 어느 문학전문 사이트에 올려놓고 있다. 고급 독자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다. 한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보는 눈들이 한 치의 오차가 없는 것이다. ‘이것만은 누구도 생각 못했을 거야’,아니면 ‘좀 시선을 끌지 않을까, 하는 작품은 틀림없이 반응이 있는데, 그렇지 않고 평범한 작품은 댓글도 달리지 않는 걸 보고서 많은 걸 느낀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요즘 나는 새삼스레 글쓰기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있다. 수많은 작품 중에 겨우 몇 편만이 눈여겨 봐주고 관심을 끌 정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필은 절대로 글 따로 사람 따로의 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필을 쓰는 사람은 글이 자기 양심에도 일치해야 하지만 행동과도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약이 조건부터 만만치가 않는 것이다.
나는 젊음시절엔 세월이 내 곁에 오래 머물러 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요즘 들어 많이 느끼게 된다. 자연스레 마음이 바빠진다. 도로(徒勞)의 세월을 보냈다는 후회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제라도 열정적으로 글을 쓰려고 한다. 젊은 시절에 품은 꿈을 이제야 나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이다.
나는 나의 수필이 많은 독자에게 두루 읽혀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내 글을 접한 사람들이 글을 읽으면서 빙그레 웃음을 웃고 책장을 덮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절대로 내가 글을 잘 쓰기 때문에 글을 쓰거나, 내세울게 있어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만큼 내 글이 소박한 심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나, 고단함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물 한 잔이 되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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